청담동 송은(SONGEUN)에서 열린 불가리와 송은의 협업 전시 《빛, 형상 그리고 비전(LIGHT, FORM AND VISION)》에 다녀왔어요. 불가리의 아이코닉 주얼리 비제로원(B.zero1)을 한국 동시대 작가 여섯 팀의 시선으로 다시 읽어보는 전시인데요, 주얼리 브랜드 전시라고 해서 제품만 잔뜩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영상·조각·회화·향·사운드까지 꽉 찬 진짜 '미술 전시'라서 생각보다 훨씬 오래 머물다 나왔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송은 건물을 좋아하는 분이나 로마 건축, 불가리 비제로원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꼭 한 번 가보시길 추천해요. 2026년 10월 29일부터 11월 14일까지, 딱 2주 남짓한 짧은 전시라 서두르셔야 해요.

비제로원은 1999년, 새로운 밀레니엄의 문턱에서 탄생한 컬렉션이에요. 로마 건축, 특히 콜로세움의 원형 구조에서 영감을 받은 링 위에 불가리 로고를 새기고, 메종 특유의 투보가스 나선을 결합한 디자인이죠. 반지 하나에 '로마'가 통째로 담겨 있는 셈인데, 이번 전시는 바로 이 비제로원의 디자인 철학을 출발점으로 삼았어요.



송은 x 불가리 《빛, 형상 그리고 비전》 전시 개요


송은 입구 유리문 너머로 오렌지빛 'LIGHT FORM AND VISION' 포스터가 반겨줘요. 헤르조그 앤 드 뫼론이 설계한 송은 특유의 콘크리트 건물과 불가리의 컬러가 묘하게 잘 어울리더라고요. 방문 전에 알아두면 좋은 정보를 한눈에 정리해볼게요.
- 전시명 : 빛, 형상 그리고 비전 (LIGHT, FORM AND VISION: Roman Heritage in Dialogue with Korean Contemporary Art)
- 기간 : 2026년 10월 29일(목) ~ 11월 14일(토)
- 장소 : 송은(SONGEUN),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75길 6
- 관람시간 : 월~토 11:00~18:30 (일요일·공휴일 휴관)
- 예약 : 네이버 사전 예약 후 관람
- 도슨트 : 매일 오후 3시, 5시 (네이버 사전 예약)
- 주최 : (재)송은문화재단, 불가리 / 기획 : (주)로렌스 제프리스
- 참여 작가 : 그레이코드·지인, 김지수, 박준범, 이은우, 정영호, 최성임
층별로 보면 2층에 박준범(오디토리움), 정영호(웰컴룸), 이은우(전시장), 김지수(라운지)가 있고, 3층에 최성임, 지하 2층 벙커룸에 그레이코드·지인과 불가리 레트로스펙티브 룸이 있어요. 저는 오디오 가이드 순서대로 2층부터 보고 3층, 지하 2층 순으로 내려갔는데 이 동선이 제일 자연스러웠어요.
전시 서문 | 보이지 않는 감각, 물질의 형태, 과거를 보는 태도

전시 제목인 '빛, 형상 그리고 비전'은 각각 보이지 않는 감각, 물질적 형태, 그리고 과거를 현재의 감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뜻한대요. 서문을 읽고 나니 주얼리 브랜드가 왜 굳이 현대미술 작가들과 손을 잡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어요. 비제로원이 '로마의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주얼리'라면, 이번 전시는 그 재해석의 과정을 작가들이 각자의 언어로 다시 해보는 자리예요.

여섯 작가의 키워드를 미리 알고 가면 감상이 훨씬 편해요. 그레이코드·지인은 이질적인 요소 사이의 공명, 김지수는 시간과 장소의 감각, 박준범은 도시 이미지에 쌓인 기억, 이은우는 건축 구조와 재료, 정영호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과 시간의 흐름, 최성임은 서로 다른 물질의 조합이에요. 결국 '유산과 혁신, 구조와 변화'라는 하나의 질문을 여섯 갈래로 풀어낸 전시라고 할 수 있어요.
변우석 오디오 도슨트 정보 | 비제로원 익스피리언스


이번 전시의 숨은 재미는 불가리 앰버서더 변우석 배우의 오디오 도슨트예요. 휴대폰으로 'B.ZERO1 EXPERIENCE' 페이지에 접속하면 1층 인트로(BEYOND)를 시작으로 2층 헤리티지(박준범), 스트럭처(정영호), 트랜스포메이션(이은우), 레조넌스(김지수)까지 챕터별로 들을 수 있어요. 차분한 목소리로 작품 설명을 들으며 걸으니 혼자 가도 전혀 심심하지 않더라고요. 이어폰은 꼭 챙겨 가세요!
박준범 Junebum Park | 〈비슷한 골목〉, 〈네 개의 비슷한 모서리〉






2층 오디토리움에 들어서면 계단식 공간 정면에 커다란 스크린이 걸려 있어요. 박준범 작가의 단채널 비디오 〈비슷한 골목〉(2026, 7분)과 〈네 개의 비슷한 모서리〉(2026, 13분)가 번갈아 반복 재생되는데, 화면 속 두 손이 로마 거리 사진을 들고 이어 붙이듯 장면을 만들어가는 콜라주 방식이 정말 독특했어요.
작가는 직접 로마를 답사하며 바티칸 시국, 트라야누스 포럼, 판테온, 빌라 줄리아 같은 곳의 골목, 건물 모서리, 문과 벽, 그림자까지 촬영했대요. 오래된 건물의 남은 부분, 복원된 부분, 나중에 덧붙인 부분이 한 화면에 뒤섞이는데, 현지인에겐 일상이지만 여행자에겐 묘하게 낯선 그 감각이 고스란히 전해지더라고요.

제가 가장 좋았던 건 '유사함의 불규칙한 반복'이라는 개념이에요. 비슷해 보이지만 똑같지는 않은 장면들을 이어 붙여 '익숙함'을 만들어내는 건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떤 도시를 기억하는 방식도 딱 이렇잖아요. 여행에서 돌아와 떠올리는 골목이 사실은 여러 골목이 섞인 이미지인 것처럼요. 계단에 잠깐 앉아 두 편을 끝까지 보고 나오길 추천해요.
정영호 Jeong Young Ho | 〈우리는 반복하고 있지 않다〉

2층 웰컴룸에서는 정영호 작가의 대형 작업 〈우리는 반복하고 있지 않다〉(2026)를 만날 수 있어요. 가로 571.5cm, 세로 355cm 필름에 솔벤트 인쇄한 작품인데, 어두운 공간 속에서 빛의 궤적이 나선처럼 휘감겨 있어서 보는 순간 '와' 소리가 절로 나왔어요.


이 작품은 18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의 나선형 역사관(The Spiral Theory of History)에서 출발했대요. 역사는 단순히 원을 그리며 반복되는 것도, 일직선으로 전진하는 것도 아니라 과거를 품고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는 나선이라는 거죠. 작가는 태양계 행성의 공전 궤도를 화면에 시뮬레이션으로 띄우고 장노출로 촬영해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나선 궤적을 한 장의 사진에 담아냈어요.



맞은편 벽에는 50×40cm 크기의 인물 사진 여섯 점이 나란히 걸려 있어요. 제목이 〈5e0112627b1b300007f592f1〉처럼 전부 데이터 고유값 같은 문자열인데, 언뜻 보면 같은 얼굴 같아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조금씩 달라요. 무수한 픽셀로 이루어진 이미지가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흐리는 시대에,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얼굴은 과연 무엇인지 묻는 것 같았어요.


비제로원의 나선 디자인과 비코의 나선형 역사관이 이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어요. '우리는 동일한 궤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끌어안은 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는 메시지가 이번 전시 주제와 가장 맞닿아 있는 작품이라고 느꼈어요.

이은우 Eunu Lee | 콜로세움을 일상의 사물로 다시 짓다

2층 메인 전시장은 이은우 작가의 공간이에요. 넓은 원목 바닥 위로 황동 아치가 공중에 둥실 떠 있고, 양쪽엔 하얀 천 기둥이 서 있어서 들어서자마자 탁 트인 느낌이 들어요.


작가는 일상 사물의 기능과 물성을 해체하고 다시 조합해온 조각가인데, 이번에는 그 관심을 콜로세움의 건축 문법으로 확장했대요. 반복되는 아치, 층층이 쌓인 구조,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로, 그리고 그 안에 쌓인 일상의 흔적까지요. 비제로원의 링 구조가 콜로세움에서 왔다는 걸 떠올리면 이 전시실이 전시의 심장 같은 곳이었어요. 입구 쪽 〈함께〉(2026)는 황동, 비즈, 유목, 동전, 돌을 실로 엮은 작은 작품인데, 전시장 전체의 예고편처럼 느껴졌어요.

〈게이츠 1~6〉, 2026





〈게이츠〉 시리즈는 여섯 개의 황동 아치로 이루어져 있어요. 콜로세움의 반복되는 아치를 가볍고 유동적인 구조로 바꾼 건데, 아치가 비대칭이라 매달린 작은 오브제들의 무게로 균형을 잡고 있어요. 공기 흐름이나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회전해서, 가까이 가면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게 되더라고요.

매달린 오브제를 하나씩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해요. 유목, 돌, 동전, 비즈는 기본이고 카펫타일과 뜨개실, 편지, 조개껍질(게이츠 2), 가죽과 뿔소라 뚜껑, 꽃(게이츠 4), 마카다미아 껍질(게이츠 5), 단추와 색유리(게이츠 6)까지 있어요. 거대한 고대 건축이 우리 서랍 속 사물들로 다시 지어지는 느낌이랄까요.

〈기둥 1〉, 〈기둥 2〉, 2026


높이 350cm의 〈기둥〉 시리즈는 얇은 패브릭을 겹겹이 쌓아 만든 기둥이에요. 건물을 받치는 구조적 기능에서 벗어난 '장식적 기둥'에 주목했다고 하는데, 견고한 돌기둥을 하늘하늘한 천으로 바꿔놓으니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더라고요. 특히 〈기둥 2〉에는 구동 장치가 달려 있어 천천히 움직이는데, 기둥이 숨을 쉬는 것 같아 한참 바라봤어요.

〈개집〉, 2026


낙엽송 합판에 조명을 넣은 〈개집〉은 아치형 입구 안에서 따뜻한 주황빛이 새어 나와요. 콜로세움 아치의 축소판 같기도 하고, 그 거대한 건축물 한구석에도 누군가의 작은 쉼터가 있었겠구나 싶은 상상을 하게 만들어요. 크기가 아담해서 지나치기 쉬우니 꼭 찾아보세요.

〈코인즈〉, 2026

〈코인즈〉는 동전만으로 이루어진 350cm 길이의 작업이에요. 로마 하면 트레비 분수에 동전 던지는 장면부터 떠오르는 저로서는 괜히 반가웠던 작품이에요. 〈게이츠〉의 재료 목록에도 동전이 자주 등장하는데, 관람석을 오가던 사람들의 주머니 속 일상을 상징하는 것 같았어요.

〈갬블링〉, 2026

바닥에 놓인 〈갬블링〉은 놀이판을 연상시키는 작품이에요. 황동, 구리, 나무, 돌, 뼈, 단풍나무, 벚나무, 솔방울, 석고, 펠트, 비즈까지 정말 다양한 재료가 쓰였어요. 콜로세움 관람석으로 드나드는 통로 '보미토리움' 주변에서 사람들이 경기를 기다리며 내기를 하던 장면이 자연스레 그려져요.

〈간식 탑〉, 2026

소뼈로 만든 최대 높이 30cm의 〈간식 탑〉 네 점이에요. 처음엔 뭔가 했는데 제목을 보고 웃음이 났어요. 경기를 보며 먹고 남긴 간식의 흔적 같기도 하고, 지금 우리가 공연장에서 간식을 먹는 모습과도 겹쳐지더라고요.

〈구석〉, 2026


전시장 한쪽 구석에는 영수증과 팝콘으로 구성된 〈구석〉이 있어요. 유희와 소비의 흔적을 통해 건축물 안에 쌓인 생활의 장면을 환기하는 작품인데, 2천 년 전 원형경기장이나 오늘의 영화관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구나 싶어 피식 웃게 되더라고요.

〈드라마〉, 2026

〈드라마〉는 벽에 연필로 남긴 낙서예요. 너무 자연스러워서 처음엔 작품인 줄 모르고 지나칠 뻔했어요. 고대 건축물 벽에도 당시 사람들의 낙서가 남아 있다고 하니, 시대를 건너 이어지는 '사람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이 공간과 참 잘 어울렸어요.


〈화장실은, 주차장은,〉, 2026

출구 쪽 벽에는 보랏빛 조명 아래 '화장실은 지하 1층, 주차장은 지하 1층입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떠 있는데, 이것도 작품이에요! 서체 디자인은 슬기와 민, 윤민구가 맡았대요. '올라오신 김에 전시를 다시 관람하셔도 좋습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에서 빵 터졌어요. 관람객을 안내하고 흘려보내는 통로의 언어를 작품으로 끌어온 게 정말 재치 있었어요.
건축의 질서와 일상의 사물을 나란히 놓으며 익숙한 기능과 의미가 어떻게 새롭게 보일 수 있는지 보여준 방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의 베스트였답니다.

김지수 Kim Jee Soo | 〈시공향〉, 〈나의 시적 우주〉






2층 라운지는 김지수 작가의 공간인데, 들어서는 순간 은은한 향이 먼저 반겨줘요. 김지수 작가는 뛰어난 후각으로 주변을 관찰하고, 향과 냄새로 포착한 시공간을 회화·드로잉·설치·영상으로 풀어내는 작가예요. 이번 신작 〈시공향〉(2026)은 시간, 공간, 향, 공기, 회화 다섯 가지 요소를 하나로 응축한 작업이에요.
출발점은 콜로세움이에요. 긴 시간에 걸쳐 지금의 모습을 갖춘 콜로세움이 비제로원 조형 언어의 모티프가 되었고, 작가는 여기서 다시 단서를 얻어 고대 로마인들이 콜로세움에서 함께 맡았을 향기를 상상했대요. 불가리 향의 자연적이고 보태니컬한 감각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실이 있는 제주의 자연에서 향을 추출했다고 해요.






벽에 붙은 원목 모듈 안에서 향이 퍼져 나오는데, 공기 흐름에 따라 농도가 달라져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향이 조금씩 다르게 느껴져요. 이웃한 벽에는 그 향에 작가의 상상력을 입힌 회화 〈나의 시적 우주〉(2025, 130.3×193.9cm, 3점)와 〈시공향〉(116.8×91cm, 3점)이 걸려 있어요. 코로 맡은 향을 눈으로 다시 보는 경험이라, 후각과 시각을 넘나드는 감각의 전환이 정말 신선했어요.
사진으로는 절대 전해지지 않는 작품이라 직접 가서 천천히 머물러 보시길 바라요. 저도 라운지에 한참 앉아 향을 맡다가 나왔어요.

최성임 Sungim Choi | 일상의 재료로 짜낸 생성의 장
3층으로 올라가면 최성임 작가의 공간이 펼쳐져요. 플라스틱 공, 양파 망, 빵 끈, 실처럼 흔한 재료에 노동과 시간을 촘촘히 엮어 조각과 설치를 해온 작가인데, 이번에는 전시 공간을 '생명력이 깃든 장'으로 바라보고 여러 물질의 집합을 통해 의미와 존재가 생성되는 과정을 보여줘요.

〈발끝〉, 2026



스테인리스 스틸과 금도금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발끝〉은 열두 점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에요. 제목처럼 무언가가 조심스럽게 발끝을 내딛는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데, 반짝이는 금속이 공간 곳곳에 놓여 있어 시선이 자연스럽게 다음 작품으로 이어져요.

〈황금 이불〉, 2026



이번 전시에서 가장 압도적이었던 작품 중 하나예요. 700×800×350cm 크기의 〈황금 이불〉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드리운 강렬한 황금빛 덩어리인데, 놀랍게도 재료가 빵 봉지를 묶을 때 쓰는 빵 끈(와이어 타이)이에요. 한없이 가볍게 소비되는 재료로 물질적 고귀함과 영원함을 표현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면서도 뭉클했어요. 작가가 일상 틈틈이 엮어냈을 시간을 생각하면, 그 크기가 곧 노동의 무게처럼 느껴져요.

〈시작〉, 2026




이어지는 황금빛 〈시작〉은 철, 스테인리스 스틸, 금박, 실로 만든 700×700cm 크기의 작업이에요. 탄생의 긴장감이 깃든 자리를 은유한다고 하는데, 경계 너머로 발을 내딛는 순간의 미묘한 진동과 공명이 태슬의 떨림으로 표현돼요. 가까이 다가가면 태슬이 살랑 흔들리는데, 새로운 관계를 맺기 직전의 설렘처럼 보였어요.

〈구멍들〉, 2026


통로에 놓인 〈구멍들〉은 폴리카보네이트 허니컴 스크린 안에 솜으로 메운 구멍과 비어 있는 구멍이 섞여 있는 작품이에요. 빛이 닿으면 어떤 구멍은 빛을 반사하고 어떤 구멍은 통과시키는데, 보는 위치와 시간에 따라 계속 달라져요. 서로에게 기대어 시시각각 변화하는 존재들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설명이 딱 와닿았어요.

〈맨드라미가 있는 풍경〉

라운지 공간의 〈맨드라미가 있는 풍경〉은 스테인리스 스틸, LED, PE망, 실로 식물의 외형을 따라 만든 작업이에요. 어린 시절 상처를 꽃으로 지혈했던 작가의 기억에서 출발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알고 나니 붉은빛이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공간 전체를 물들인 붉은 색채가 경계를 지우고 서로 다른 대상들을 하나로 연결해줘요.

그레이코드, 지인 GRAYCODE, jiiiiin | 〈비어 있는 듯, 이미 가득 차 있는〉

지하 2층 벙커룸으로 내려가면 공기부터 달라져요. 그레이코드, 지인은 소리, 빛, 시간, 공간이 서로 관계하며 만들어내는 현상을 감각 가능한 경험으로 바꾸는 작가예요. 이번 작품 〈비어 있는 듯, 이미 가득 차 있는〉(2026)은 금속, 돌, 아크릴, LED 빛, 다채널 사운드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공간 설치예요.
검은 거울처럼 반사되는 원형 금속 구조물 〈지속하는 것〉은 서로 다른 파(波)의 충돌과 간섭을 하나의 원 안에 담아 작품들 사이의 기준점 역할을 해요. 천장에 매달린 〈변화하는 것〉은 콜로세움의 반복되는 아치에서 형태를 가져왔고, 금속 표면에 빛이 반사되며 공간과 함께 시시각각 달라져요.





전시 공간을 따라 이어지는 두 개의 윤곽 〈있는 것 A〉, 〈있는 것 B〉는 각각 검은 금속과 돌, 투명한 아크릴과 빛·소리·돌로 이루어져 있어요. 두 번째 윤곽을 따라 음악 작품 〈이미 있던 것〉이 흐르는데,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모노 음악(A)과 하루 다섯 번, 7분 13초 동안 재생되는 스테레오 음악(B)이 겹쳐지며 여러 겹의 시간을 만들어요. B가 재생되는 순간을 만나면 좋으니 조금 여유 있게 머물러 보세요.
벽의 〈악보〉는 개별 작품들의 구조와 관계를 한 장의 종이 위에 펜으로 겹쳐 그린 작업이에요. 텅 비어 있다고 생각했던 공간이 사실은 이미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작품 제목이 그대로 이해되더라고요.

불가리 레트로스펙티브 룸 | 비제로원 아이콘의 진화








같은 지하 2층 벙커룸에는 불가리 비제로원의 이야기와 유산을 조명하는 '레트로스펙티브 룸'이 마련되어 있어요. 1999년 첫 탄생부터 지금까지 비제로원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따라가 볼 수 있는 공간인데, 로고를 새긴 링과 나선이라는 디자인 코드가 예상 밖의 소재와 협업을 만나 얼마나 다양하게 변주되는지 한눈에 보여요.











작품을 다 보고 마지막에 이 방에 오니, 앞서 본 여섯 작가의 작업이 왜 비제로원과 연결되는지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어요. 참고로 롯데백화점 잠실 에비뉴엘(10/30~11/15), 신세계 센텀시티(12/3~12/15), 신세계 강남(12/24~2027/1/10)에서는 비제로원 익스피리언스 팝업도 열린다고 하니 함께 들러봐도 좋겠어요.
송은 불가리 전시 관람 후기 총평 & 관람 팁
《빛, 형상 그리고 비전》은 '브랜드 전시'라는 편견을 시원하게 깨준 전시였어요. 반지 하나에서 출발해 로마의 건축, 역사관, 향, 소리, 일상의 사물까지 이렇게 넓게 뻗어나갈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무엇보다 작가 한 명 한 명의 작업이 탄탄해서 현대미술 전시로서 만족도가 높았어요.
- 네이버 사전 예약 필수, 도슨트 투어는 매일 오후 3시·5시
- 변우석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려면 이어폰 챙기기
- 추천 동선 : 2층(박준범 → 정영호 → 이은우 → 김지수) → 3층(최성임) → 지하 2층(그레이코드·지인, 레트로스펙티브 룸)
- 김지수 작가의 향 작업과 그레이코드·지인의 사운드는 사진으로 담기지 않으니 천천히 머물기
- 일요일·공휴일 휴관, 11월 14일(토) 종료
자주 묻는 질문 (FAQ)
Q. 송은 불가리 전시 기간과 관람시간은?
A. 2026년 10월 29일부터 11월 14일까지, 월~토 오전 11시~오후 6시 30분이에요. 일요일과 공휴일은 휴관이에요.
Q. 예약이 필요한가요?
A. 네, 네이버 사전 예약 후 관람할 수 있어요. 도슨트 투어(오후 3시, 5시)도 네이버로 따로 예약해요.
Q. 참여 작가는 누구인가요?
A. 그레이코드·지인, 김지수, 박준범, 이은우, 정영호, 최성임 총 6팀이에요.
Q. 비제로원(B.zero1)은 어떤 주얼리인가요?
A. 1999년 탄생한 불가리의 아이콘 컬렉션으로, 로마 콜로세움에서 영감을 받은 원형 구조에 불가리 로고를 새긴 디자인이 특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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