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얼리 컬렉션으로 손꼽히는 ‘카즈미 아리카와 주얼리 컬렉션’을 중심으로 기획되었으며, 역사적인 작품들과 함께 세계적인 건축가 쿠마 켄고가 디자인한 특별한 공간에서 관람객을 맞습니다.
카즈미 아리카와는 지난 40여 년간 동·서양의 주얼리를 수집해왔으며, 이번에는 약 200여 점의 쥬얼리를 이번 롯데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아트 주얼리 전시회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섹션 01. 고대 / 중세 / 르네상스
신성에서 예술로 : 주얼리 정신사
이번 전시회 첫 공간은 고대부터 르네상시시대 까지의 다양한 보석들을 소개합니다. 특히 르네상스 이전까지의 대부분 예술작품들은 종교를 벗어나 생각할 수 없는데요. 과연 주얼리는 어떤 유행을 보였을까요?
올리브잎화환
'올리브 잎 화환'은 약 이천 삼백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황금 티아라로, 지혜와 힘의 여신 아테나를 상징하는 올리브 잎들이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신들의 축복을 받고 싶어서 신들이 쓰는 것과 같은 화환을 머리에 썼다고 합니다. 이런 티아라는 승리의 상징이기도 했고, 결혼식이나 화려한 연회 같은 특별한 날에 꼭 착용하는 귀한 장신구였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티아라가 손상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건, 주인과 함께 무덤에 붙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고대 그리스입들의 뛰어난 금세공 기술과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라모스를 위한 심장 풍뎅이
이런 고대 영화에서 본 것 같은 보석들고 보이네요.
기원전 1550~1069년 사이로 예상되는 '라모스를 위한 심장 풍뎅이' 사문석 보석
이번 The Art of Jewellery: 고혹의 보석. 매혹의 시간 전시회는...
롯데뮤지엄에서 열렸던 다른 전시회와는 다소 다르게 다소 어두운 전시장 구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전시장에 턱이나 굴곡이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불가리나 까르띠에 전시회에 비해서는 다소 미흡한 부분이 보였지만,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보석들을 한 곳에서 만나볼 수 있는 의미가 있는 전시회입니다.
그리스 시대 금으로 만든 목걸이와 귀걸이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시그닛 반지
푸른색 사파이어 위에 프리드리히 3세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이 반지는 '시그닛 반지'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말로 도장 반지, 인장 반지라고 합니다, 이 반지는 단순한 창신구가 아니라 소유자의 신분을 나타내고 공식 문서에 도장을 찍는 실용적인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대에는 뜨거운 왁스를 눌러 사용했고, 후대에는 잉크를 사용해 문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시그닛 반지는 가문의 권력과 권위를 상징하며 대대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이 반지는 타인이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소유자가 사망하면 함께 없애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중세 이전의 시그닛 반지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니다.
아래 사진 맨 오른쪽 반지는...
| 리멤버 반지
검은 오닉스 보석 위에 귀를 만지는 손이 새겨진 <리멤버 반지>는 3~4세기 로마 시대의 열쇠반지입니다. 반지 윗부분에 보이는 사각형의 장식은 당시 집안의 중요한 열쇠를 안주인이 보관하던 풍습을 반영하며, 신부에게 주는 특별한 약혼 선물이 되었습니다. 로마에서는 귀가 기억을 상징했기 때문에, '리멤버 반지'는 '날 잊지 말아요' 라는 애틋한 마음을 담은 연인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The Art of Jewellery: 고혹의 보석. 매혹의 시간 전시회 첫 공간에는 십자가나 반지등 여러가지 종교관련 주얼리가 전시됩니다.
금과 애나멜로 만든 십자가 & 피에타 카메오가 있는 반지
카메오는 참고로 불투명, 또는 투명 보석을 양각으로 조각해서 만든 보석을 의미합니다.
아래 사진 왼쪽에 있는 반지는...
| 메멘토 모리 키멜 반지
빨간 루비와 다이아본드 반지가 결합되어 마치 하나의 반지처럼 보이는 <메멘토 모리 기멜 반지>는 라틴어로 쌍둥이를 뜻하는 '게멜루스'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두개의 동일한 반지가 하나로 결합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결혼으로 하나가 되는 연인들의 모습을 표현하며, 반지 어깨 부분에는 따뜻한 마음을 상징하는루비 하트와 변함없는 사랑을 의미하는 다이아몬드 하트가 있습니다. 두 반지를 분리하면 다이아몬드와 루비 아래에 해골과 갓난아기 조각이 나타납니다. 이는'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라는 익미를 담고 있으며, 짧은 인생을 소중히 살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아래 무시무시한 팬던트는 메두사라고 하네요. 귀신 나오겠다는...
다양한 십자가가 주얼리가 전시되어 있는데요.
이중에서 마음에 들었던 십자가 모양의 보석 두 점 입니다.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로 제작한...
섹션 02. 17 ~18세기
권력과 사치의 상징 예카테리나 2세와 17~18세기 유럽의 주얼리
The Art of Jewellery: 고혹의 보석. 매혹의 시간 전시회 두 번째 섹션에서는 주얼리 예술사를 발전시킨 주요한 인물중 한 명인 러시아제국의 황제 예카테리나 2세 컬렉션을 소개하는 공간
| 러시아의 캐서린 2세 초상화 음각이 새겨진 펜던트
고귀한 월계관을 쓰고 진주 목걸이를 한 옆모습에서 여황제의 당당함이 느껴지는 이 작품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뮤명한 여황제, 예카테리나 2세의 초상이 새겨진 에메랄드 펜던트입니다.
펜던트에는 예카테리나 2세와 그리고리 오를로프 형제와의 궁중 비화가 담겨있습니다.예카테리나 2세는 이 펜던트를 연인이었던 그리고리 오를로프의 동생, 알렉세이 백작에게 선물했습니다.1762년, 오를로프 형제가 주도한 쿠데타로예카테리나의 남편인 표트르 3세가 왕위에서물러나면서 예카테리나 2세는 새로운 통치자가 됩니다.
특히 고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보석을 열심히 수집했다고 합니다. 이 펜던트의 초상을 만든 예거라는 예술가도 예카테리나 2세의 특별한 후원을 받았는데, 예카테리나 2세는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서 조각을 가르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 웰링턴 가문의 브로치
에메랄드의 깊은 녹색과 루비의 붉은빛, 그리고 다이아본드의 반짝임이 서로 어우러져 마치 살아있는 꽃다발 같은 화려한 장신구는 '웰링턴 가문의 세비네 조개 브로치' 입니다. 이 브로치는 18세기 중반, 프랑스 최고의 장인이 만든 걸작으로, 섬세한 디자인과 뛰어난 보석 세공 기술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세비네" 라는 용어는 17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귀족 여성이자 문인이었던 마담 드 세비네에서 따온 이름으로, 그녀가 리본 모양의 브로치를 가슴에 달고 찍은 초상화가 유명해져서 같은 스타일의 브로치들을 모두'세비네'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위쪽을 보시면 여섯 개의 카보송 에메랄드가 조개껍데기처럼 우아하게 펼쳐져 있고, 그 중앙마다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만든 꽃이 피어있습니다. 조개와 꽃, 그리고 아래쪽의 술 장식은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로코코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 제1대 로즈 자작의 브로치와 귀컬이 세트
가슴 장신구와 귀걸이로 이루어진 화려한 <제 1대 로즈 자작의 브로치와 귀걸이 세트>는 약300년 전, 프랑스의'태양왕' 루이 14세 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먼저 가슴에 다는 장신구에는 우아한 리본 모양 위에 루비와 장미모양으로 깎인 다이아몬드가 반짝이고, 그 아래로 십자가 모양의 펜던트가 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쌍의 귀걸이는 마치 작은 샹들리에처럼 세개의 물방울이 늘어진 모양으로, 꽃 장식과 물방울 부분에 루비가 장식적으로 세팅되어 있습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하얀 에나멜로 만든 섬세한 꽃들과, 네 개의 루비로 이루어진 십자가, 그리고 귀걸이를 장식한 초승달 모양의 다이아몬드와 루비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다이아몬드도 귀했지만, 루비는 더묵 귀했기 때문에 다이아몬드보다 더 비싼 보석이었다고 합니다.
"Parure"는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단어로, 주로 보석 세트를 의미합니다. 보통 "파뤼르(parure)"는 목걸이, 귀걸이, 팔찌, 반지 등의 보석 세트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역사적으로 왕족이나 귀족들이 착용하던 고급 보석 세트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으며, 일반적으로 한 쌍 또는 세트로 맞춰진 보석들로 구성됩니다.
직접 롯데뮤지엄에서 해당 파뤼르를 보면 디테일에 압도 당한다는...
"사도닉스"는 보석의 한 종류인 **사도니(Sardonyx)**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닉스는 온yx와 사르돈(Sard)이라는 두 가지 종류의 보석이 결합된 형태의 반귀석입니다. 이 보석은 흑색과 흰색 또는 갈색과 흰색의 띠 모양이 특징인 석재로, 고대부터 사용되었으며 아름다운 패턴을 자랑합니다. 사도닉스는 고대 로마와 그리스에서 인식되었으며, 왕족이나 귀족들이 장신구나 인장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보석은 보호적인 속성을 지닌다고 믿어지기도 했습니다. 사도닉스는 주로 반지나 펜던트, 귀걸이 등에 사용되며,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을 제공합니다. 또한 고대부터 인장과 같은 장식물로도 많이 활용되었습니다.
칼세도니(Chalcedony)**는 석영(Quartz) 속의 일종으로, 미세한 결정들이 모여 형성된 반투명한 보석입니다. 칼세도니는 여러 가지 색상을 가질 수 있으며, 주로 파란색, 흰색, 회색, 녹색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파란색 칼세도니가 가장 유명합니다.
칼세도니는 고대부터 다양한 문화에서 인식되었으며, 보석, 장식품, 인장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칼세도니를 보호의 상징으로 여겼고, 영적인 의미나 치유적인 속성이 있다고 믿어졌습니다.
그나저나 주얼리 디테일이 정말로...
섹션 03. 반지
이런 전시공간에 각각 반지 한 점식 감상할 수 있는데요. 너무 작은 반지를 상자 안에 넣으니 감상하기가 다소 불편하네요.
곰 음각 반지
'곰 음각 반지'는 섬세하고 가는 금빛 반지 위에 이채로운 다이아몬드가 올려져 있습니다.
다이아몬드를 자세히 틀여다보면 곰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약 400년 전 17세기에 누군가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보석인 다이아몬드에 자신의 가문을 나타내는 곰 문양을 새긴 것입니다.
그시절에 다이아몬드에 무늬를 새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문양이 새겨진 다이아몬드는 매우 희귀합니다. 이 반지의 가는 테와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금 테두리는 19세기에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반지는 중요한 문서에 도잠을 찍을 때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점하고 있습니다.
지아르디네티 반지
작은 정원을 품은 듯한 이반지는 약 300년 전인 18세기에 만들어진 반지로, '작은 정원'을 의미하는 '치아르디네티 반지'입니다. 반지 한 가운데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로 만든 화병이 놓여있고, 그 주변으로는 초록빛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로 만든 꽃들이 마치 분수처럼 화사하게 피어오릅니다.
장인들은 더 아름다운 보석 정원을 만들기 위해 다이아몬드는 은으로, 에메랄드는 금으로 세팅하여 꽃들이 더욱 생생하게 보이도록 디자인했습니다.
18세기에 만들어진 이 반지는 결혼 반지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두 사람의 사랑이 아름다문 정원처럼 영원히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반지의 윗부분에 있는 화병과 꽃틀은 300년 전 만들어졌고, 이를 받치고 있는 아래쪽 반지는 나중에 만들어졌습니다.
이 반지는 벌반은 다이아몬드, 나머지 절반은 에메랄드로 처리한 더블 하트 반지.
은하수 반지
크리스탈라이즈드
롯데 아트홀 The Art of Jewellery: 고혹의 보석. 매혹의 시간 전시회 중간에는 '크리스탈라이즈드'라는 제목의 영상 작품이 전시되고 있디만, 어렵다는...
섹션 04. 19세기
신고전주의 영향을 받은 보석들과 나폴레옹, 빅토리아 여왕의 주얼리를 만나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 조세핀 황후가 선불한 귀걸이와 목걸이
이 주얼리 세트는 나폴레옹의 부인 조세핀 황후가 가까운 이에게 선물한 것으로, 특별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목걸이를 자세히 보면 진주와 에나멜로 꾸민 동그란 고리들이 하나하나 이어져 있고, 가운데에는 다이아몬드로 테두리를 두른 타원형 장식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네 마리의 비둘기가 다이아몬드로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리는 물을 마시고 있고, 나머지는 쉬고 있거나 깃털을 다듬고 있습니다. 비둘기들이 물을 마시는 그릇은 짙은 파란색 에나멜과 다이아몬드, 그리고 터키석 빛 에나멜로 꾸며져 있습니다, 귀걸이에도 폭발은 모양의 비를기카 한 마리씩 장식되어 있습니다.
비둘기를 묘사한 창식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정을 상징하는 이 디자인은 1737년 로마의 옛 황제 별장에서 발견된 모자이크에서 따 온 것으로, 기원전 2세기 그리스 작품을 로마인들이 모사하여 제작한 것입니다. 조세핀 황후는 이런 고대 예술품을 무척 좋아해서 이 유명한 비둘기 모차이크의 복제품도 가지고 있었고, 특별한 이에게 선불하기 위해 이를 본따 귀걸이와 목걸이를 제작했습니다,
| 앙굴렘 공착 부인의 팔찌
핑크색 루비와 다이아몬드가 정교하게 세팅된 화려한 팔찌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딸, <앙굴렘 공착 부인의 팔찌>입니다. 앙쿨렘 공작 부인은 프랑스 혁명 때 부모를 모두 잃고, 혼자 목숨을 건져 오스트리아로 피신을 해야 했습니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야 숙부인 루이 18세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올 있었습니다. 프랑스로 돌아온 공작 부인은 공식 행사에 쓸 왕실 주얼리를 주문했는데, 공교롭게도 나폴레옹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마리 루이즈의 장신구를 개조해서 만든 팔찌가 그 중하나였습니다,
<앙굴렘 공작 부인의 팔찌>와 거의 똑같은 한쌍의 팔찌인 공식 왕실 주얼리는 지금 루브르 박불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당시 황실 주얼리는 개인 소유가 아닌 국가 소유였기 때문에, 공작 부인은 자신의 돈으로 이와 비슷한 디자인의 팔찌를 따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 지란톨 귀걸이
원형 다이아몬드를 중심으로 세 갈래로 뻗은 가지 아래 물방물 모양의 다이아본드가 달려있는 이 귀걸이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 귀걸이입니다. 1837년 6월 20일, 18세의 어린 나이에 여왕이 된 빅토리아는 이 화려한 '지란돌' 귀걸이를 대관식에서 착용했습니다. '
"지란돌'이란 여러 가지 촛대가 달린 화려한 샹들리에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을 말합니다. 여왕이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며 반짝이는 귀결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당시 영국의 패션을 이끄는 트렌드 세터였습니다. 부유한 영국 사람들은 여왕이 착용한 주얼리는 무조건 따라 샀다고 합니다, 심지어 남편 알버트 공이 사망한 후 여왕이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착용했던 검은색 애도 주얼리'까지도 영국에서 대유행했다고 합니다
| 빅토리아 여왕이 포르투갈의스테파니 여왕에게 선물
다이아몬드와 루비, 에메랄드로 화려하게 장식된 이 팔찌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이 담겨 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이와 같이 자신의 초상이 새겨진 주얼리를 특별한 사람들에게 선불하기를 즐겼는데, 특히 이 팔찌에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조카 스테파니는 포르투갈 국왕과 결혼을 앞두고 런던의 버킹엄 궁전에서 며칠간 머무르며, 화려한 만찬과 오페라, 무도회를 즐겼습니다. 스테파니가 포르투갈로 떠나기 전, 빅토리아 여왕은 사랑하는 조카를 위해이 특별한 팔찌를 선물했습니다.
팔찌 안쪽에는 '1858년 5월 9일 사랑하는 조카 스테파니에게 빅토리아로부터'라는 애정 어린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스테파니는 이 선불에 부척 감통했고, 이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빅토리아 여왕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에요. 어머니도 분명 여왕님을 좋아하실 거예요"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루미나 후작부인의 파뤼르
규모와 디테일에 놀랐던 작품...
작은 발걸음에도 떨리는 보석들...
이 보석도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낀...
아트 주얼리 고혹의 보석. 매혹의 시간 전시회에서는 이런 목걸이와 브로치들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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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문자 주얼리
알파벳 '엠(M)'자 모양의 왕관 사이로 성모 마리아와 가브리엘 천사가 마주보고 있는 이 주얼리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의 어머니가 될 거라고 전하는 성경 속 이야기 '수태고지' 장면을 담은 주얼리입니다. 19세기 중반 이탈리아의 유명한 장인 카스텔라니가 만든 이 주얼리는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고딕체 '엠(M)'자 왕관에 붉은 루비와 진주, 초록빛 에메랄드가 세팅되어 있습니다.
중앙에는 푸른 수정의 꽃병이 보이는데 그 안에는 순결을 상징하는 하얀 진주로 만든 백합꽃 세 송이가 꽃혀 있습니다. 중앙에는 푸른 수정의 꽃병이 보이는데 그 안에는 순결을 상칭하는 하얀 진주로 만든 백합꽃 세 송이가 꽃혀 있습니다. 꽃병 양 옆에는 빨간 옷에 파란 망토를 입은 성모 마리아와 하얀 옷에 하늘색 망토를 입은 가브리엘 천사가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카스텔라니는 1862년 런던 국제박람회에서이 작품을 처음 선보였으며, 당시 매우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장신구는 브로치로도, 목걸이로도 사용할 수 있어 귀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로마의 빌라 줄리아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곳에 비슷한 디자인의 작품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 작품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금으로 세공된 목걸리와 브로치, 금 세공기술보다도 수작업으로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에 더 놀라는...
십자가, 펜던트, 목걸이
섹션 06. 아르누보
새로운 예술의 탄생 : 아르누보 주얼리의 혁신과 도전
| 공기의 요청 브로치
초록빛의 날개를 가진 요정을 표현한 이 브로치는 1900년경 프랑스의 보석 세공사 르네 랄리크가 만든 아르누보 스타일의 <공기의 요정 브로치>입니다. 랄리크의 뛰어난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의 모습을 금으로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나비의 날개와 물고기의 지느러미를 더해 환상적인 생명체로 만들어냈습니다. 요정의 날개를 자세히 보시면, 초록색과 파란색 에나멜로 채색되어 있고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마치 실제 나비의 날개처럼 영롱하게 빛납니다.
특히 반투명한 에나멜 기법을 사용하여 날개를 통과하는 빛까지 표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원래 이 브로치는 벨벳 리본에 달아 목에 착용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이런 초커 스타일을 프랑스어로 '강아지 목걸이'라는 뜻의 '콜리에 트 시앙', 영어로는 '도그 칼라 초커'라고 불렀습니다, 도쿄 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세계 유수의 미술관이 소장할 만큼 가치를 인정받은 이 작품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환상적으로 표현한 20세기 초 아르누보 양식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겨울 풍경 펜던트
겨울 풍경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담아낸 이펜던트는 르네 랄리크가 제작한 <겨울 풍경 펜던트> 입니다. 하얀 눈 속에 세 그루의 상상한 소나무가 있고, 오른쪽 앞에는 소복하게 쌓인 눈으로 뒤덮인 낙엽송이 서 있습니다. 중앙에는 회색빛 진주가 우아하게 매달려 있으며, 황금빛 나무껍질 질감의 비대칭 프레임에는 파란 유리 보석들이 반짝입니다.
르네 랄리크는 자신의 시골집 근처 호숫가에서눈 쌓인 나무들을 관찰하며 영감을 받아 작품을제작했습니다.청백색의 다양한 에나멜 색조는 차가운 겨울아침 분위기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청백색의 다양한 에나멜 색조는 차가운 겨울 아침 분위기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디자인은 당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지금도 리스본의 굴벤키안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 함부르크 공예미술관 등 세계 유명 박물관에서 비슷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랄리크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섬세하게 예술로 표현했는지 잘보여주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혹의 보석 · 매혹의 시간 전시회장에 별다른 설명은 없었지만 상당히 독특했던 펜던트와 브로치들...
다소 그로테스크한 작품들도 있더라는...
|코르사주 창식품
동그란 펜던트에 뾰족한 화살이 관통하고 있고 그 주변으로 형형색색의 네 개의 참이 달려있는 <코르사주 장식품>은 주얼리 디자이너 조르주 푸케와 화가 알폰스 무하가 함께 만든 특별한 작품입니다. 작품 중앙에는 알폰스 무하가 그린 금발 소녀의 초상화가 보이는데, 깃털 펜을 들고 마치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듯한 사랑스러운 표정의 소녀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아르누보의 주요 주제인 여성과 자연을 연보라색, 녹색, 호박색, 반투명 블루 에나멜의 풍부한 색감으로 표현했고, 금으로 둘려싼 보석 테두리가 이를 한층 돋보이게 합니다,
작품 아래쪽에는 바로크 진주와 보석으로 장식한 네 개의 참이 달려 있습니다, 코르사주 양 옆 체인에 달린 참들은 당시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기념한 것으로,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소리를 내는 참을 출겨 착용했다는 점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 날개 달린 용과 해초 코르사주 장식품
날개 달린 초록빛 용과 황금빛 해초를 표현한 이코르사주는 프랑스의 보석 세공사 조르주 푸케의 작품입니다. 용의 머리에는 반짝이는 모스 아게이트가 세팅되어 있고, 그 주변은 에메랄드가 화려하게 둘러싸고 있습니다. 용의 몸은 비늘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알록달록한 반투명 에나멜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코르사주 아래쪽에는 황금빛 해초 모양 장식이 우아하게 늘어져 있는데, 하얀 담수 진주와 에나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로 꾸며져 있고, 맨 아래에는 큰 진주가 매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큰 코르사주는 1900년대 초의 대표적인 주얼리 스타일이었으며, 당시 상류층 여성들은 특별한 모임에 이런 화려한 코르사주를 드레스 앞가슴에 달았습니다. 푸케는 당시 새로문 예술 흐름인 아르누보 스타일을 사랑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다이아몬드 중심 디자인에서 벗어나 에나멜과 진주, 에메랄드 같은 다양한 보석으로 자연을 자유롭게 표현했습니다.
헤이즐넛 머리빗, 1900년경 프랑스 작품이라고 한다.
아르누보라는 주제에 잘 어울리는 주얼리들, 플리카주르 기법이 발달하면서 등장한 장신구들...
섹션 07. 벨 에포크
이번 디 아트 오브 주얼리 전시회에서 가작 작은 전시 공간...
전쟁은 정말로 많은 것을 바꾸기도...
| 피베르게의 상자
피베르게는 러시아 황제의 보석 디자이너로 유명하며, 특히 **황제의 부활절 달걀(Easter Eggs)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상자 또한 매우 정교하고 화려한 작품으로, 귀족이나 왕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 밀랍 성냥갑
회색 출무늬가 있는 마노로 만든 이 작은 케이스는 1900년경 파베르체가 체착한 <밀랍 성냥갑>입니다. 케이스의 결합 부분은 금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는 초록색 에나멜로 만든 나뭇잎들이 붉은 루비를 감싸고 있습니다. 회색 마노의 은은한 광택, 금의 반짝임, 루비의붉은 빛,그리고 싱그러운 초록색 나뭇잎이 마치 한 폭의그림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라이터가 없어서흡연자들은 항상 성냥을 가지고 다녀야했습니다
특히 1890년대 중반에는 러시아 여성들 사이에서만 허용되던 공개적인 흡연이 다른 나라 여성들에게도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성냥갑은 남성의 주머니나 여성의 파우치에도 들어갈 수 있도록 슬림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상류층에서 흡연이 유행하면서 파베르제는 이처럼 흡연 용품을 예술품으로 만들어 큰인기를 얻었습니다. 특히 이 성냥갑은 파베르제의 수석 장인이었던 헨릭 비그스트룀의 뛰어난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 리본 브로치
실제 리본이 묶여있는 것처럼 섬세하게 제작된 <리본 브로치>는 벨 에포크 시대의 우아함을 대표하는 주얼리 작품입니다. 504개의 다이아몬드가 플래티넘 위에 아름답게 세팅되어 있으며, 리본 안쪽에는 자연스러운 나뭇잎 문양이, 아래쪽으로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술이 늘어져 있습니다. 나뭇잎 부분의 다이아몬드는 플래티넘으로 정성스럽게 테두리를 둘렀습니다. 이러한 자연을 닮은 디자인은 18세기 예술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이 브로치가 만들어진 시기는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시대', 프랑스에서는 '벨 에포크'라고 불렸습니다. 벨 에포크는 '아름다운 시대'라는 뜻입니다, 이때는 18세기 로코코 시대의 화려했던 귀족 문화를 현대적으로 되살린 주얼리틀이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당시 여성들에게 가슴 브로치는 티아라만큼이나 소중한 장신구였습니다. 이렇게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리본 브로치는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섹션 08. 아르데코와 그 이후
아르데코 : 세계 문화를 흡수한 기계의 미학
| 일본식 정원 시계
일본 정원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일본식 정원 시계>는 프랑스 장인이 일본의 아름다움을 담아낸 작품으로, 시계와 필기도구를 함께 툴 수 있는 실용적인 장식품입니다. 양쪽에 우아하게 놓여진 바위 위에는 일본 전통 등불인 토로가 자리잡고 있고, 그 안에는 전구가 들어있습니다.
시계를 보면 시침과 분침이 용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푸른빛의 청금석, 라피스 라줄리로 만든 잉크병 위에는 한 쌍의 수호신이 앉아 있는데, 이를 '코마이누'라고 부릅니다. 옥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이 사자개들이 잉크병을 지키고 있습니다
만년필들은 호수를 표현한 아름다운 장벽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시계 사원 위로 자라난 나무는 붉은 산호로 만든 꽃과 가지들이 한쪽으로 자연스럽게 기물어져 있고, 푸른 이끼가 나무를 감싸 오랜 세월이 흐른 느낌을 줍니다. 이처럼 동양의 정취를 서양의 섬세한 공예 기술로 표현한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시계는 정면은 물론 뒷변을 보는 것도 즐겁다.
| 이집트풍 팔찌
붉은 루비와 초록색 에메랄드의 대비가 인상적인 <이집트풍 팔찌>는 파리의 주얼러 라클로슈가 1925년에 제작한 작품입니다. 1922년 투탕카멘 파라오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이집트풍 주얼리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이 팔찌는 7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중앙의 루비로 만든 스핑크스가 특히 눈에 됩니다. 스핑크스의 머리 장식과 가슴 장식은 에메랄드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고, 스핑크스의 손 위에는 이집트의 법과 정의의 여신 마아트의 조각상이 올려져 있습니다.
스핑크스 주변에는 파라오의 힘을 상징하는 지팡이와 도리깨가 이집트 문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팔찌의 양쪽에는 붉은 루비를 배경으로 이집트의신 호루스를 상칭하는 매가 스핑크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팔찌의 각 부분을 잇는 부분은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로 나일강을 표현했습니다. 1925년,이 팔찌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민소매 원피스가 유행이었기 때문에, 훤히 드러난 팔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위해 이런 화려한 팔찌가 여성들의 필수품이었습니다.
| 그림자의 격자
이번 The Art of Jewellery: 고혹의 보석매혹의 시간 전시 공간을 구성한 건축가 구카 켄고의 설치작품. 이번 전시회 포토존 역할하는 곳 중 하나.
섹션 09. 티아라
존엄과 고귀함의 표상
나폴레몽 1세가 바사노 공작에게 선불한 브로치
옆에서 본 나폴레옹의 초상이 담긴 이 작품은 이번 전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나폴레옹 1세가 바사노 공작에게 선물한 브로치>입니다. 마노 위에 정교하게 조각된 나폴레옹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머리에는 다이아몬드로 창식된 월계관을 쓰고 있으며, 어깨에도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장식을 둘렀습니다. 어깨 근처의 브로치에는 그의 이름 첫 글자인 'N'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이전 프랑스 왕가가 사용하던 '백합' 문양 대신 나폴레옹만의 새로운.표식이 적용된 것을 보여줍니다.
나폴레옹의 머리카락도 마치 실제처럼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새겨져 있습니다. 나폴레몽은 자신의 모습이 새겨친 이런 카메오를 측근들에게 자주 선물하며, 황제로서 자신의 권력과 위엄을 과시하려 했습니다.
|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파뤼르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뷔르템베르크 왕실의 화려한 주얼리 세트입니다. 프랑스어로 '파뤼르'라고 부르는 이 세트는 티아라, 목걸이, 귀걸이, 브로치, 팔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100개가 넘는 핑크 토파즈가 사용되어 있습니다.
핑크 토파즈는 열을 가하지 않아도 천연 분홍빛을 내는 특징이 있는 보석으로, 한 장신구 세트에 이렇게 많은 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 티아라에는 핑크 토파즈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아칸서스 잎 무늬가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나폴레옹 시대의 위엄이 느껴지는 디자인을 볼 수있습니다.
목걸이는 여덟 개의 타원형 핑크 토파즈를 다이아몬드로 연결했고, 아래로는 불방물 모양의 핑크 토파즈가 늘어져 있습니다. 이 펜던트는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또브로치는 '세비네'라고 불렀는데, 네모난 핑크 토파즈를 꽃잎이 감싸고 있고 아래로는 다이아몬드 장식이 달려있습니다. 이것 또한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눠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팔찌는 핑크 토파즈 여섯 쌍과 작은 다이아몬드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티아라, 목걸이, 귀컬이, 브로치, 팔찌로 구성된 완벽한 한 세트가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몬전히 남아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입니다. 이 주얼리 세트는 나폴레옹의 통생 제롬과 뷔르템베르크의 캐서린 공주의 결혼식에서 처음 선보였다고 하는데, 두 왕가의 정치적 결합을 상징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티아라 (tiara)는
이번 The Art of Jewellery: 고혹의 보석ㆍ매혹의 시간 전시회에서 원 없이 볼 수 있더라는...
이런 화려함과 엄청난 공수가 떠오르는 수십점의 티아라가 전시되어 있고.
산호로 만든 다소 독특한 디자인과 컬러의 티아라.
이렇게 공간별로 구분되어 티아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요.
이 많은 왕관에 설명이 없다는 부분은 다소 아쉽게 남았다.
| 공작 깃털 주얼리
이 작품은 아름다운 공작 깃털을 본따 주얼리로 만든 작품입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유명 주얼리 브랜드 부쉐론이 만든 브로치 겸 머리 장신구입니다. 공작은 예로부터 권력과 영광, 불멸을 상징하는 새였고, 인도에서는 나라를 대표하는 국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많은 주얼리 디자이너들이 공작 깃털의 아름다움을 주얼리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브로치 가운데에는 공작 깃털의 특징인 '눈' 모양을 파란색의 스타 사파이어로 표현했고, 주변은 초록빛 에메랄드로 둘러쌌습니다. 이 브로치의 특징은, 움직일 때마다 깃털 부분이 실제 공작 깃털이 바람에 살짝 흡들리듯이 살랑거린다는 것입니다
| 애들레이드 마가렛 스펜서 부인의 티아라
영국의 궁정 신하로 1939년부터 1952년까지 엘리자베스 여왕 의 시녀였던 스펜서 부인의 티아라...
공작 깃털 주얼리
이 작품은 아름다운 공작 깃털을 본따 주얼리로 만든 작품입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유명 주얼리 브랜드 부쉐론이 만든 브로치 겸 머리 장신구입니다. 공작은 예로부터 권력과 영광, 불멸을 상징하는 새였고, 인도에서는 나라를 대표하는 국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많은 주얼리 디자이너들이 공작 깃털의 아름다움을 주얼리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브로치 가운데에는 공작 깃털의 특징인 '눈' 모양을 파란색의 스타 사파이어로 표현했고, 주변은 초록빛 에메랄드로 둘러쌌습니다. 이 브로치의 특징은, 움직일 때마다 깃털 부분이 실제 공작 깃털이 바람에 살짝 흡들리듯이 살랑거린다는 것입니다
코흐, 러시아 왕실 보석 (크라운 주얼)의 티아라
플래티넘, 금, 아쿠아마린, 다아아몬드로 1910년 경 독일에서 만든 티아라인데. 개인적으로 참 깔끔하고 좋다는 느낌을 받은 몇 작품중 하나.
| 10. 크로스
성스러운 유산, 십자가의 증표, 신성과 예술의 만남 발레리오 벨리의 십자가 이번 롯데뮤지엄에서 열리는 The Art of Jewellery: 고혹의 보석ㆍ매혹의 시간 전시회 마지막 공간입니다. 어두운 복도 끝으로 보이는...
| 그리스도와 천토사의 십자가, 유물함
이 십자가는 정교한 세공 기술로 '보석 조각의 라파엘로'라 불린 발레리오 벨리가 만든 작품으로, 전 세계에 단 세 개만 남아있습니다.
십자가 가운데에는 예수의 모습이 표현되어있습니다.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뜻을 가진'아이 엔 알 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고통받고 있는 예수의 머리 뒤로는 거룩한 빛이비치고 있습니다. 십자가 주변에는 성경의 복음서를 쓴 네 사람이각자의 상징과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위쪽의 요한은 독수리, 누가는 소, 마태는 천사.마가는 사자와 함께 표협되었습니다.
이 십자가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바로 받침대 때문입니다. 1762년에 파리의 뛰어난 금세공인 피에르 제르맹이 은으로 만들고 금으로 도금한 받침대인데, 1833년에 프랑스의 귀족 가문 봉모랑사-라발이 이 받침대에 십자가를 올려놓았습니다, 받침대 가운데 있는 투명한 창 안에는 예수가 짊어지고 못 박힌 십자가의 작은 조각 두 개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성스러운 유물과 함께 놓인 십자가는 신앙과예술의 교차점에서 숭고한 희생과 신의 의지를 담은 그릇으로서,인간의 창조성으로 구현되어 상징적으로빛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잠실 롯데뮤지엄에서 내년 3월 초까지 전시 예정인 'The Art of Jewellery: 고혹의 보석ㆍ매혹의 시간' 전시회 관람후기 였습니다. 지난 불가리 컬러 전시회나 까르띠에 시간의 결정 전시회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장르에 상관없이 다양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부분은 장점 입니다.
지하철 잠실역 근처 롯데캐슬플라자에 위치한 이춘복 참치 잠실점 가족식사 후기입니다. 잠실 맛집중 하나인 무한리필 잠실 이춘복 참치 메뉴 및 가격, 주차, 위치, 점심특선메뉴, 룸예약 소개합니다.
| 이춘복 참치 잠실점 위치 및 주차
잠실 무한리필 참치집 이춘복 참치 잠실점은 지하철 2호선과 연결되어 있는 롯데캐슬 플라자 2층 식당가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하 추차장에 주차 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거나, 지하철이나 도보 방문시 에스컬레이터를 타시고 올라오시면 됩니다. 오피스동과 사무동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잠실 롯데캐슬플라자 2층에는 TGIF. 차이797 등 여러 잠실 맛집들이 있는데요. 이춘복 참지 잠실점 위치는 아래 지도에서 라이언이 있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평면도만 봐도 상당히 넓은 규모라는 것을 직감하실 듯...
| 이춘복 참지 잠실점 실내입니다
무엇보다도 탁 트인 실내와 밝은 조면, 개방된 주방이 인상적이네요. 또한 테이블 배치도 공장같은 바둑판형 배치도 아니고 테이블간 간격이 상당히 여유가 있어 고급스러운 느낌이 옵니다. 2021년 오픈...
식사 공간은 공개된 공간과 주방장님과 마주보면서 식사가 가능한 1인 좌석, 그리고 4인 기준으로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잠실 이춘복 참치 규모는 총 300석이라고 하네요.
단독룸 50개 (4인 6인 8인)
무엇보다도 잠실 횟집 맛집 추천 드리는 이유 중 하나는 단독룸이 50개가 있습니다. 아쉽게도 룸 사진을 찍지는 못했는데요. 식당 안쪽으로 50여개의 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3명이 평일 점심 예약 없이 방문하였는데, 바로 4인 테이블 방으로 안내 받아 방해받지 않고 편하게 식사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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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춘복 참치 메뉴 및 가격, 점심 특선
이춘복 참지는 참치회 무한리필로 유면한 곳인데요. 가장 저렴한 참치 스페셜 가격은 36,000원, 참치 특수부위 들이 나오는 혼마구로 플러스 메뉴는 110,000원 입니다. 저녁 코스에는 축, 초밥, 샐러드, 튀김, 알밥, 마끼 등의 사이드 요리들이 나온다고 하니,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점심메뉴 평일 11시~14시 30분
평일 점심시간에는 조금 더 저렴한 가격에 이춘복 참치 메뉴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참치회가 나오는 회정식과 참치초밥, 회덮밥, 돈까스 탕류들이 준비되어 있는데요. 점심메뉴 회정식이나 초밥 가격은 1만원 중반 부처 3만원 대, 식사류는 1만원 초중반 가격으로 부담없이 식사 가능합니다.
저희는 일반초밥 두 개와 대구창, 히레카츠 주문 했습니다.
기본찬은
샐러드와 피클이 나오네요. 초밥 주문하면 장국 나오고요.
락교, 초생강, 김치등 기본 일식찬이 나옵니다.
| 이춘복 참치 일반초밥 (16,000원)
저는 특초밥이나 혼마구로초밥을 먹어보려 했는데, 딸아이가 일반초밥 조합이 더 좋다고 해서 주문했네요. (효녀인지...)
12피스 나오고요. 연어놔 새우초밥이 한 피스씩 나옵니다. (아마도 연어초밥 좋아하는 이유가 있을 듯 합니다.)
저렴한 가격의 참치초밥이다 보니 참치 고급부위는 없습니다. 속살이나 등살로 만든 참치초밥이지만 맛있게 잘 먹었네요.
이춘복 참치 초밥 가성비는 너무 좋습니다. 밥양도 적당하게 들어있고 참치살도 도톰하게 올려 있네요.
다음에 방문한다면 최고급 참치인 참다랑어로 만든 초밥인 혼마구로 초밥 주문해 먹을 예정입니다.
방문일은 2025년 1월 1일 설날 맞이해서 사전 예약하고 방문 했습니다. 아라리 주차 및 예약, 메뉴, 가격 맛, 가족들 만족도 후기 진행합니다.
당근 내돈내산 / 내돈내먹 후기!!!
| 아라리 위치 및 주차
잠실 한정식 맛집 아라리는 올림픽 파크텔 지하 1층에 위치해 있습니다.
대중교통으로 방문하신다면 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2번 출구에서 약 600미터 10분 정도 도보이동 하셔야 합니다. 올림픽파크텔 앞에 정차하는 버스들도 있습니다만 차량으로 방문하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아리리 주차장은 잠실에서 천호방향으로 가다가 올림픽 파크텔 앞에서 진입 후 좌측 주차장을 이용하면 됩니다. 올림픽 파크텔 주차요금은 10분에 500원 한 시간에 6천원 주차요금이 부과되만, 아라리 한정식에서 식사하면 올림픽파크텔 주차요금은 무료입니다.
주차 후 올림픽파크텔 건물로 들어오시면 되고요.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셔서 지하 1층으로 내려오시면 됩니다. 아래 사진이 올림픽공원 한정식 맛집인 아라리 입구입니다.
영업시간은 오전 11시 부터 21시까지 운영되며, 아라리 라스트오더는 20시까지 입니다. 아라리 휴일은 없는데요. 설이나 추석 휴일은 별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1월 1일에는 정상영업 하셨네요.)
잠실 한정식 맛집 아라리 한정식 실내입니다. 한쪽에는 테이블룸이, 다른 한쪽에는 테이블세팅이 되어 있는데요. 예약이 늦어서 그런저 룸으로 배정 받지는 못했네요. 그래도 각각 테이블이 분리되어 있어 다른 방문객 방해받지 않고 편안하게 식사힐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방문하신다면 일찍 예약하시고 룸으로 배정해 달라 하세요.
| 한정식 아라리 메뉴 및 가격
메뉴는 코스 한정식과 단품요리가 준비되어 있는데요. 가격은 28,000원 부터 68,000원 까지 10,000원 단위로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평일에는 산정식 28,000원에 간단한 한정식을 맛볼 수 있는데요.
주말 기준 보통 아라리 메뉴에서는 38,000원 해정식이나 48,000원 진정식을 많이 드시는 것 같아요. 두 차이는 불고기가 나오냐, 떡갈비가 나오냐, 고등어나 조기구이 vs 보리굴비가 나오는 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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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떡갈비 보다는 불고기 선호하는 일행이 많았고, 생선으로 회와 우럭탕수도 나와
저희는 가장 저렴한 가격인 해정식 (38,000원) 5인분 주문합니다.
갈비찜, 전복구이, 석갈비, 장어구이 등이 나오는아라리 특선 메뉴도 있는데요. 아마도 상견례 등 격식?을 챙겨야 하는 모임등에는 잘 맞을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단품메뉴도 맛볼 수 있습니다. 저희도 낙지볶음을 추가로 주문할까 고민하다가 우선 한정식만 먼저 먹어보고 결정하기로 했는데요. 이 선택이 탁월한선택 이었네요.
송파 올림픽 파크텔 맛집 아라리 한정식 해정식 메뉴 소개하고 총평 진행합니다.
사진속 한정식은 2인분 기준으로 세팅되었습니다.
01. 에피타이저 : 계절죽과 물김치
에피타이저로 나온 계절죽은 녹두죽이 물김치와 함께 나왔습니다. 우선 맛은 쏘쏘...
02. 회와 야채요리
야채 샐러드와 삼색탕평채, 새우 냉채, 활어회, 토마토와 낫토가 먼저 나옵니다.
활어회는 광어회와 우럭회가 각 한점씩 나왔는데요. 우럭이 아닌 광어회만 나온 것 같기도 합니다. 회는 두툼하게 식감 좋게 나왔습니다. 보통 이렇게 회가 나올때는 광어 & 연어, 우럭 & 도미 조합이 많은데...
토마토와 낫토는 껍질을 벗기 토마토에 상큼한 맛의 낫토소스가 올려진 메뉴입니다. 가위로 먹기 편하게 잘라 주시는데요. 이름과는 다르게 달콤 상큼한 맛을 보입니다. 유자? 소스맛이 더 강한... 입맛 돋구기 좋은...
고소한 흑임자 소스가 올려진 야채 샐러드는 맛있게 잘 먹었고요. 한 번 다시 리필해서 먹었습니다.
삼색탕평채와 새우냉채
두 메뉴 모두 맛있게 잘 먹었는데요. 새우냉채는 와사비의 콕 쏘는 맛이 좋네요. 일행중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잠실 한정식 맛집 아라리 테이블에는 여분의 접시와 그릇이 여유있게 세팅되어 있어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었네요
03. 우럭 탕수
잠시 후 우럭탕수와 계절야채전, 흑임자 두부가 나왔네요.
고소한 맛의 계절야채전과 두분은 따뜻하게 나와 겨울철에 먹기에는 더욱 좋았네요.
새싹이 올려진 흑임자 두부는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이 참 좋았습니다.
아라리 한정식 우럭탕수는 우선 큼직한 크기의 우럭에 놀랐고요. 통통한 살과 달콤한 소스에 만족 했습니다.
아라리 한정식 코스요리에서 우럭탕수를 먹다 보니 배가 슬슬 불러오기 시작합니다. 정말로 살이 통통한 우럭 한 마리가 튀겨 나왔네요.
04. 식사
마지막 코스입니다.
불고기와 영양 돌솥밥, 된장찌개, 5가지 반찬과 조지구이, 궁중잡채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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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좋아하는 잡채, 만약 잡채가 앞부분에 나왔다면 리필했을 음식인데, 이미 배들이 불러서 맛만 봅니다.
오늘 아라리 한정식 코스메뉴에서 가장 실망한 메뉴인 불고기입니다.
불고기가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데요. 촉촉한 불고기가 아닌 말라버린 불고기가 나왔네요. 불고기는 잠실 한정식 맛집 아라리 코스에서 가장 아쉬운...
영양돌솥밥은 밥 덜어내고 누릉지 만들어 먹으면 좋고요. 밥은 찰지고 맛있게 잘 되었네요.
같이 나오는 된장찌개도 짜지 않으면서도 맛있게 잘 나왔네요.
메뉴에는 고등어조림으로 나왔지만 오늘은 작은 굴비찜이 나왔습니다.
한정식 메뉴이지만 기름진 음식이 나와서 매콤한 고등어조림을 기대했는데... 그래도 굴비찜도 밥과 함께 맛있게 잘 먹었답니다.
이번 전시회 관람시간은 최소 2시간 이상 고려하셔야 합니다. 우선 관람객이 많아서 주요 작품에는 대기가 필요하고요. 좋아하는 작품들이 많다 보니 저는 2시간30분 정도 소요 되었네요.
[프롤로그] 비엔나에 분 자유의 바람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비엔나를 유럽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도시 확장 계획을 단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비엔나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꼽히는 유명한 건축물들이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과거 예술 양식의 모방과 재현에 그쳤습니다. 기대와 실망 속에 논란의 중심이 된 대도시 비엔나에는 각종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였고, 토론의 장이 펼쳐졌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이때 새로 지어진 건물에 벽화를 그리면서 크게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전통 양식을 그대로 따르는 일은 클림트의 뜻과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예술의 길을 탐구했고,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특별한 예술 운동을 시작합니다. 클림트는 새로운 도전을 꿈꾸던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클림트와 동료들이 만든 비엔나 분리파의 활동으로 이제 비엔나에 ‘자유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에곤 실레 (1890–1918) / 1918년, 종이에 석판화 / 개인 소장
비엔나 분리파는 '시대에는 시대에 맞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을 모토로 1897년 창립되었습니다. 초대 회장에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선출됐어요. 당시 비엔나 예술가들이 가장 믿고 따랐던 클림트는 많은 전시회를 열면서 그들이 추구한 '새로운 예술'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1902년에는 베토벤에 경의를 표하는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비엔나 분리파는 전통을 깬 혁신의 상징이었던 베토벤을 존경했습니다.18세기 음악적 형식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던 때, 베토벤은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나 감정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음악적 구성을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전시회의 포스터는 알프레드 롤러가 그렸습니다. 그는 포스터 역시 하나의 예술 분야로, 관심 없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포스터에는 수수께끼 같은 상징이 많습니다. 빛나는 물체를 들고 몸을 굽힌 여성은 어둠에서 빛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마치 비엔나의 새로운 빛이 되고 싶었던 비엔나 분리파의 꿈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흔히 구스타프 클림트를 ‘황금의 화가’라고 알고 있지만, 예술가로서 그를 설명하는 한 단어를 꼽는다면 그건 바로 ‘혁신’입니다. 초기에 클림트는 주로 전통 양식으로 작업했고, 황제로부터 상도 받으며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곧 인간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주제에 주목했고, 유럽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인상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비엔나의 방식으로 수용한 ***아르누보 등 다양한 예술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클림트는 외국 작품을 소개하고 활발한 전시 활동을 하면서 오스트리아 예술을 모더니즘의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젊은 예술가들이 실험적인 예술을 할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혁신’을 향한 그의 열망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시장 모습과 클림트의 사진, 정말로 옛날에 클림트 도록에서 이 사진을 보고 클림트에 대한 환상이 깨진적이 있었다는... 조금은 그의 작품과 비슷한 느낌을 상상하고 있었던 시절...
국립극장의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86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수도 비엔나를 대도시로 탈바꿈시킨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비엔나를 둘러싼 성벽이 철거된 자리에 생긴 커다란 대로에 오스트리아의 정치경제, 문화, 예술을 위한 수많은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비엔나로 여행을 간다면 방문해야 하는 대표적인 명소들이죠. 구스타프 클림트는 바로 이 시기, 새로 만들어진 건물을 장식하기 위한 예술가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이 작품은 클림트가 국립극장의 실내 장식을 위해 그린 습작입니다. 바로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연회 장면인데요, 중앙에는 디오니소스의 조각상이 있고, 양쪽으로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왼쪽 여인은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지팡이를 들었고, 오른쪽 여인은 월계수 관을 들고 있습니다. 디오니소스 연회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돈 연극의 기원으로 생각되었기에, 클림트는 국립극장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이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초상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하나 지역의 소녀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83년경 패널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작품에 제작 시기가 쓰여 있지 않지만, 구스타프 클림트가 학생이던 시절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체코 모라비아에 있는 하나 지역에서 온 소녀를 그렸다. 소녀는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있는데, 이는 하나 지역 풍습을 따른 것이다. 옷과 배경을 모두 옅은 회색으로 칠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얼굴이 더욱 두드러진다. 살짝 옆을 보는 소녀의 눈길은 그녀가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노인의 옆모습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96년경 카드보드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트라운 백작’이라는 제목으로도 전해지는 까닭에 주문받은 초상화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림 속 인물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옆얼굴만 보여 주는 구도 역시 평범하게 주문받아 제작한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클림트는 얼굴의 특징을 명확하게 드러내면서도 윤곽선을 부드럽게 처리했다. 배경을 단색으로 칠해서 노인의 옆얼굴에 더욱 눈길이 머문다. 클림트가 인물화에서 새로운 구도와 효과를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모자를 쓴 여인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97/98년 캔버스에 유화 클림트재단
작품 속 여성은 당시 비엔나에 유행하던 패션과 장신구를 보여 준다. 목을 감싼 칼라와 챙이 넓은 모자를 모두 검은색으로 칠해 여인의 얼굴이 더욱 돋보인다. 19세기 말 유럽에서는 불편한 코르셋이나 지나친 장식에서 벗어나 실용적이고 편안한 의복을 강조하는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비엔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디자이너였던 에밀리 플뢰게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예술적 동반자로서 깊은 관계를 유지했고, 그녀의 패션은 클림트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풀 속 여인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98년경 캔버스에 유화 클림트재단
세련된 모자를 쓰고 풍성한 소매가 돋보이는 블라우스를 입은 초상화 속 여인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두터운 물감으로 그려낸 수풀과 여인의 블라우스 소매는 손으로 만지지 않아도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구스타프 클림트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예술을 오스트리아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과정에서 프랑스의 인상주의와 같은 화풍이 오스트리아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클림트도 초기에는 전통적인 화풍으로 그렸지만, 점점 인물화에서 여러 가지 구도나 표현법을 실험했습니다. 1890년대 후반에는비엔나 중.상류층 여성들의 초상화가로 자리 잡으면서, 이 작품처럼 완성도 높은 인상주의 화풍의 인물화틀 그렸습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대표작품이기도 한데요. 작품 사이즈도 A4 용지정도 크리로 작고, 제가 기대한 것보다는 다소 소박한 크림트의 인물화 입니다.
클림트를 기대하고 방문했다면 실망할 전시회
뒤에도 클림트의 그림은 계속되지만 기대했던 황금빛의 클림트 그림은 이번 전시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번 전시회 제목인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뒤에 클림트는 빠져야.
1부. 비엔나 분리파, 변화의 시작
19세기 말 비엔나에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변화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예술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기득권과 맞서는 젊은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된 구스타프 클림트는 동료들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하여 과거의 관습과 예술 양식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의 초대 회장이 된 클림트는 활발하게 전시를 열어 작품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는 교류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회화뿐 아니라 공예, 삽화, 책 표지와 우표 디자인 등 일상의 여러 분야로 예술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그들의 예술 철학과 외국의 예술 동향을 알리는 잡지인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도 발행했습니다. 여러 예술 장르를 합쳐 하나로 완성된 아름다움을 구현한다는 ‘총체예술’의 개념은 비엔나 분리파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영원하지 않았던 클림트의 분리파
비엔나 분리파는 크게 두 개의 단체가 결합된 형태였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7인회’와 더 전통적인 양식을 고수했던 ‘하겐 클럽’입니다. 두 단체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졌기에 분열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1905년 비엔나 분리파 회원들의 작품 판매처로 7인회와 친분이 있는 갤러리를 활용하는 방안을 두고 형평에 어긋난다며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요인은 풍경화를 주로 그리며 순수미술을 중요시한 하겐 클럽과 예술과 공예의 통합을 지향한 7인회의 서로 다른 성향으로 인한 충돌이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결국 분열로 이어졌고, 클림트와 콜로만 모저, 요제프 호프만을 비롯한 예술가들은 비엔나 분리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비엔나 분리파는 이후에도 존속하며 젊은 예술가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습니다.
제14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알프레드 롤러 (1864–1935) 1902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는 '시대에는 시대에 맞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을 모토로 1897년 창립되었습니다. 초대 회장에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선출됐어요. 당시 비엔나 예술가들이 가장 믿고 따랐던 클림트는 많은 전시회를 열면서 그들이 추구한 '새로운 예술'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1902년에는 베토벤에 경의를 표하는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비엔나 분리파는 전통을 깬 혁신의 상징이었던 베토벤을 존경했습니다.18세기 음악적 형식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던 때, 베토벤은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나 감정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음악적 구성을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전시회의 포스터는 알프레드 롤러가 그렸습니다. 그는 포스터 역시 하나의 예술 분야로, 관심 없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포스터에는 수수께끼 같은 상징이 많습니다. 빛나는 물체를 들고 몸을 굽힌 여성은 어둠에서 빛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 포스터
루돌프 칼바흐 (1883–1932) 1908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 안에는 구스타프 클림트처럼 다양한 예술장르를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회화와 같은 순수미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1905년 클림트와 뜻을 함께한 예술가들이 비엔나 분리파를 탈퇴했습니다. 클림트가 비엔나 분리파에 속했던 시기를 '빛나는 7년'이라고 부릅니다. 무려 23번의 전시회를 열면서 유럽의 예술가들과 왕성하게 교류를 했고,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변혁의 움직임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클림트는 비엔나 분리파를 탈퇴한 후 '클림트 그룹'을 만들어 더 급진적인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지금 보고 계시는 전시회 포스터는 클림트 그룹이 개최한 '비엔나 예술전람회'입니다.이 전시에서 만나게 될 '꿈꾸는 예술가들'이 총출동했습니다. 콜로만 모저와 요제프 호프만은 디자인과 장식 예술 분야를 담당했고,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도 출품했습니다 이 전시는 오스트리아 예술계가 모더니즘으로 전환하는 시작점으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좀 더 자유롭게 자신만의 예술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겠죠?
제40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에른스트 에크 (1879–1941) 1912년 종이에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는 클림트와 동료들이 떠난 뒤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열어 다양한 예술가의 작품을 오스트리아에 소개했다. 또한 젊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제40회 전시회에서는 포스터라는 장르가 독립된 예술 분야임을 강조했다. 비엔나 분리파는 서체와 그래픽 디자인이 조화를 이룬 다양한 포스터를 전시했다. 에른스트 에크는 흰색과 검은색만으로 강렬하고 순수한 디자인의 포스터를 만들었다.
제14회 전시회장에서 촬영한 비엔나 분리파 회원들
모리츠 네어 (1859–1945) 1902년 사진 비엔나 이마그노 사진 기록 보관소 (크리스티안 브란트슈테터 수집)
혁신의 상징, 베토벤을 위한 전시회
비엔나 분리파는 1902년 ‘베토벤에 대한 경의’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 전시관인 *제체시온의 중앙 전시실에는 독일 조각가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조각상이 놓였습니다. 베토벤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곳곳에 전시되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중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일부를 인간의 고통과 투쟁,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여정으로 묘사한 <베토벤 프리즈>를 전시실의 세 벽면에 그렸습니다.
전시회 개막식에는 비엔나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지휘 아래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일부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 전시회의 전체 디자인은 비엔나 분리파의 요제프 호프만이 맡았습니다. 새롭고 대담한 전시회였다는 좋은 평가도 있었지만, 급진적인 시도를 어려워하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엔나 분리파는 이 전시회에 회화, 조각, 음악, 디자인 등 전시의 모든 요소가 하나로 어우러져 특별한 감상을 선사하는 ‘총체예술’의 이상을 구현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가 만든 잡지
비엔나 분리파는 미술과 문학을 아우르는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이라는 잡지를 발간했습니다. 이 잡지는 1898년부터 1903년까지 간행되면서 외국의 예술 동향을 알리고 새로운 예술을 보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이 잡지는 비엔나 분리파의 초기 역사를 가장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예술가들이 돌아가며 디자인을 담당한 까닭에 누가 맡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양식의 잡지가 발간되었습니다. 이 또한 특정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예술을 지향했던 비엔나 분리파만의 특징이었습니다. 『성스러운 봄』은 단순한 잡지가 아니라 문학과 그림, 표지 디자인을 결합하여 비엔나 분리파가 추구했던 ‘총체예술’을 구현한 또 하나의 매체였습니다.
성스러운 봄 1호
1898년 1월 발간 오스트리아 예술가연합 활판 인쇄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는 6년 동안 '성스러운 봄'이라는 잡지를 발간했어요. 이 잡지는 유럽 예술의 동향을 파악하고 그들이 보여주려고 한 새로운 예술이 무엇인지 알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정사각형 판형으로 만들어진 '성스러운 봄'의 첫 번째 호입니다. 표지를 보시면 나무의 뿌리가 화분을 뚫고 자라나 있고, 풍성한 나무에 열매처럼 매달린 세개의 문장이 있습니다. 이는 예술의 중요한 요소인 건축회화, 조각을 상징합니다. 마치 새롭게 뿌리내리는 비엔나 분리파와 성스러운 봄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성스러운 봄'은 매번 다른 예술가가 편집장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나올 때마다 각자의 색을 담은 제각각의 디자인이 돋보입니다. 라틴어로 쓰인 잡지 제목 '베르사크룸'은 '성스러운 봄'이라는 의미로, 비엔나 분리파가 전통에서 벗어나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스러운봄 5/6, 9월, 10월호
오스트리아 황제 즉위 60주년 기념우표를 위한 디자인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기마상, 60헬러 콜로만 모저 (1868–1918)
1908년 카드보드에 연필(23), 종이에 연필(24-26), 불투명 수채 오스트리아 포스트 AG
콜로만 모저는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재위 1848-1916)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디자인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98년 열린 제1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의 개막식에 참석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고 비엔나가 유럽 예술의 중심지임을 강조하기 위해 비엔나 분리파를 지지했다. 모저는 기하학적인 무늬로 우표의 테두리를 각각 다르게 디자인했다. 예술이 삶의 모든 부분에 스며들어야 한다는 모저의 예술적 지향을 잘 보여 주는 작업이다.
벨베데레 궁전
카를 몰 (1861–1945) 1909년경 종이에 다색 목판화 레오폴트미술관
19세기 후반 비엔나에서는 목판화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비엔나 분리파의 창립 회원이었던 카를 몰 역시 비엔나 풍경을 담은 판화를 많이 만들었다. 이 판화는 벨베데레 궁전 정원의 겨울 풍경을 담고 있다. 왼쪽에 보이는 조각상에서 쭉 뻗은 정원 길을 따라 벨베데레 궁전으로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몰은 빛의 반사와 섬세한 색감을 세련되게 활용하여 겨울 분위기를 표현했다.
2부 새로운 시각, 달라진 오스트리아의 풍경
비엔나 분리파의 대다수 회원은 유럽으로, 일부는 아시아 지역까지 여행하며 새로운 예술을 접하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전시회를 열어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어떤 예술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오스트리아를 그린 풍경화가 나타났습니다.
전통 양식을 따르던 보수적인 아카데미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탐탁치 않아 했고, 당시 유럽에 퍼져 나갔던 예술적 자극에 대한 수용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비엔나 분리파는 새로운 시도와 자극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모방이 아닌 그들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들의 예술 철학과 도전은 이후 비엔나 예술계가 모더니즘으로 나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큰 포플러 나무 11 (다가오는 폭풍)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902/0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를 이끈 구스타프 클림트는 예술가들이 유럽의 다양한 미술을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오스트리아 밖으로 나가서 보고 배우라고 지시했습니다. 또한 유럽의 예술가들을 초청해 전시회를 열어 소통의 장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유럽에서 유행하던 인상주의나 상징주의가 비엔나에 알려졌고, 오스트리아의 예술가들은 이전과 다른 풍경화들을 그리게 됩니다..
클림트의 풍경화에서 거대한 포플러나무는 작품의 오른편을 가득 채우고 있죠. 나무를 잘 보시면 여러 가지 색 물감을 찍어서 반짝이는 효과를 냈습니다.어떤 평론가는 이것을 '마치 송어의 비늘 같다'고 말했어요. 멀리 펼쳐진 들판 너머로 하늘이 크게 그려져 있는데, 바람이 소용돌이치듯이 불고 먹구름이 져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쏟아질 것 같네요. 하늘을 극적이고 생생하게 그렸던 화가가 한 명 떠오르지 않나요?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클림트도 유럽에서 유행했던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당시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정사각형 화폭을 선택한 것도 참 클림트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숫가의 남녀
에른스트 슈퇴어 (1860–1917) 1897/190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그림 속 남녀는 호숫가 난간에 기댄 채 서로의 시선을 피해 먼 곳을 바라 보고 있다. 비엔나 분리파의 창립 회원인 에른스트 슈퇴어는 이 작품에서 여러 빛깔의 색들을 섞지 않고 점을 찍어서 표현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파란색과 연보라색 점들이 왠지 우울하고 쓸쓸한 감정을 자아낸다. 슈퇴어는 주로 희미한 저녁 빛을 표현해 서정적인 장면을 연출했고,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을 담아내고자 했다.
넓게 펼쳐진 들판과 언덕을 표현한 이 그림은 레오폴트 블라우엔슈타이너의 초기 작품이다. 높이 쌓아 올린 옥수수 짚을 여러 곳에 배치해 화면을 구성했고, 가까운 곳과 먼 곳의 풍경을 조화롭게 표현했다. 당시 흔했던 황토색 옥수수 짚을 소재로 수확 이후 여름날 풍경을 묘사했다. 일본 목판화와 인상주의 회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구도와 색을 실험적으로 사용하고 그 결과를 작품에 충실히 반영했다.
피아노를 치는 레오폴트 치하체크
에곤 실레 (1890–1918) 1907년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에곤 실레는 열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매독으로 죽자 삼촌인 레오폴트 치하체크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이 작품은 실레의 삼촌이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그렸다. 실레는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 밝은 부분과 그림자가 있는 어두운 부분을 구분하여 명암의 대비를 살렸다.
가로로 긴 화폭 역시 극적인 구도를 만들어 준다. 붓질의 방향이 모두 빛이 들어오는 오른쪽 아래를 향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치는 손으로 눈길이 간다. 실레는 삼촌의 손을 번지도록 표현하여 피아노를 치는 율동감을 살렸다.
실비아 콜러 (화가의 딸)
브론치아 콜러-피넬 (1863–1934) 1926년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브론치아 콜러-피넬은 구스타프 클림트, 요제프 호프만 등 비엔나 분리파 예술가들과 매우 가깝게 교류했다. 그녀의 집은 비엔나의 화가, 과학자, 음악가, 철학자들이 모여 교류하는 장소였다. 그녀는 특히 인물화와 정물화에서 독특한 색채와 구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화가로 활발히 활동하면서도 에곤 실레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브론치아의 딸 실비아는 자신감 넘치는 자세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으며, 사랑과 헌신의 상징인 분홍 카네이션을 들고 있다.
교류와 후원, 비엔나의 카페 문화
카페는 화가, 소설가, 음악가, 건축가, 정치인 등 주요 인사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정보를 주고받는 장소였습니다. 카페 문화는 당시 비엔나 예술계의 중심이었으며, 예술의 장르를 넘나들며 서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기 비엔나 예술가들은 활발한 예술 후원에 힘입어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 나갔습니다. 카페는 후원자와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탐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의 재력가들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술가들은 감사의 의미로 후원자의 드로잉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굽은 목재로 만든 의자, 255번
카페 뮤지엄을 위한 디자인 디자인: 아돌프 로스 (1870–1933) 제작: 야코프 & 요제프 콘 1898년경
굽은 목재, 너도밤나무에 검붉은 칠, 나무로 엮은 좌석 레오폴트미술관
여러분은 카페에 가면 무엇을 하시나요? 공부나 일을 위해 혹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가시나요? 19세기 말 비엔나에서는 이런 카페 문화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예술, 철학, 문학, 음악의 중심지 비엔나에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였던 가장 중요한 장소가 바로 카페였어요. 그 중에서도 최고의 명소로 꼽히는 곳이 바로 카페 뮤지엄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계시는 의자는 1899년 카페 뮤지엄이 문을 열었을 때 놓여 있었던 것이에요. 이때 만들어진 카페 의자는 단순한 디자인에 대량 생산이 가능한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이 의자를 디자인한 아돌프 로스는 장식이 없는 단순한 디자인으로 기능성을 살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막상 카페 뮤지엄이 문을 열었을 때는 엄청난 논란이 있었다고 해요. 화려한 장식을 기대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의 디자인이 너무 무미건조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아돌프 로스의 실용성과 기능성을 강조한 디자인은 이후 모더니즘 건축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이자 드로잉 작가로, 코코슈카는 다양한 매체와 기법을 사용했으며, 수많은 전시회와 작품을 통해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가 남긴 예술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파울 셰어바르트
작품집 『사람의 얼굴』에 수록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6년
출판사: 데어 슈투름, 베를린 종이에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가 그린 독일의 소설가이자 건축 이론가 파울 셰어바르트의 초상화다. 그는 표현주의 잡지 『데어 슈투름』에 많은 글을 기고했다. 특히 건축에 유리를 사용하여 인간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유리 건축 이론’을 제시해 주목받았다. 코코슈카는 다양한 굵기로 선의 강약을 조절하여 셰어바르트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헤르바르트 발덴
작품집 『사람의 얼굴』에 수록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6년
출판사: 데어 슈투름, 베를린 종이에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가 그린 독일의 미술 비평가 헤르바르트 발덴의 초상화다. 발덴은 표현주의와 같은 새로운 예술의 흐름을 지지했다. 그는 베를린에 출판사와 갤러리를 열어 새로운 예술 운동을 지원하고 이를 세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발덴이 1910년 창간한 잡지 『데어 슈투름(Der Sturm)』은 표현주의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중요한 출판물이었다. 오스카 코코슈카 역시 이 잡지에 여러 점의 삽화를 그렸다.
콜로만 모저
콜로만 모저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만든 예술가입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에서 조각, 유리 등 다양한 방면의 디자이너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주도하며 가구, 벽지, 도자, 직물,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도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모저의 디자인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부드러운 곡선과 자연스러움이 특징입니다. 또한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양식으로 세련되고 현대적인 디자인을 추구했습니다. 디자인 공방을 떠난 이후로는 빛과 색을 연구한 회화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했던 콜로만 모저는 비엔나 예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끈 만능 예술가였습니다.
산맥
콜로만 모저 (1868–1918) 191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이 그림을 그린 콜로만 모저는 이번 전시에서 주목하는 6명의 꿈꾸는 예술가들' 중 한 명입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로 활동하면서 많은 전시회를 디자인하고 기획했어요.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주도하면서는 공예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죠. 공방을 나온 이후에는 회화 작업도 남겼으니, 그야말로 장르의 경계 없이 만능으로 활동했던 예술가네요
콜로만 모저는 지금 보고 계시는 것과 같은 풍경화를 많이 그렸는데요,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여러 산을 그렸지만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어요. 노랗게 표현돈 하늘 아래로 몇 개의 선을 그려서 산맥을 구분하고, 열은 따란색과 어두운 색을 대비시켜서 구분했어요. 이런 단순한 구성과 색 대비는 일본 목판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우키요에 라고 부르는 일본 목판화가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간결하고 단순한 구성이 선명하고 풍부한 색감은 전통적인 원근법과 사실적 표현어 익숙했던 유럽 사람들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일본 미술이 비엔나에서 새로운 표현을 탐구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빛과 색의 마법, 모저의 꽃 그림
마리골드 콜로만 모저 (1868–1918) 1909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이끈 콜로만 모저는 다양한 재질의 공예품을 만들고 그래픽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 수공예와 장인 정신을 내걸었던 공방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자, 경영 방식에 대한 의견 충돌이 생겼고 결국 모저는 1907년 디자인 공방을 떠났다. 그 뒤로 모저는 회화를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특히 하루 또는 계절에 따라 빛과 색이 달라지는 장면을 담은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이후에는 강렬한 색채를 띠는 정물과 꽃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동굴 속의 비너스
콜로만 모저 (1868–1918) 1914년경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동굴의 둥근 공간에서 비너스가 베일을 쓰고 나오는 장면을 그렸다. 비너스의 몸은 밝은 부분에서는 노란색을, 어두운 부분에서는 옅은 보라색을 띤다. 모저는 비너스뿐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베일, 바위, 꽃다발 등에 흔히 쓰지 않는 색을 혼합해 사용했다. 그는 독특한 색채 대비와 상징으로 고전적 주제인 그리스·로마 신화를 새롭게 재해석했다. 1914년 무렵 모저 화풍의 변화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하겐 클럽과 알빈 에거-리엔츠
비엔나 분리파의 예술가들 중 일부는 하겐 클럽에 속했습니다. 이들은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공예보다 회화와 같은 순수 미술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사실적으로 자연을 묘사하면서도 차분하고 정돈된 분위기로 오스트리아의 풍경이나 풍속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알빈 에거-리엔츠는 1900년까지 하겐 클럽에 소속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농민, 노동자 등 서민의 삶을 담은 풍경을 많이 그렸습니다. 극단적으로 감정을 표출했던 표현주의 작가들과 달리 무게감 있고 따뜻한 정서로 오스트리아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깊은 숲 (<아베>를 위한 습작)
알빈 에거-리엔츠 (1868–1926) 1895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희미한 빛이 어린 울창한 숲속에 침엽수가 높이 뻗어 있다. 햇빛이 스며들고는 있지만 땅에 닿지 못하기에 차가움이 느껴진다. 빠르고 자유로운 붓질로 나무 아래 우거진 덤불을 표현했다.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뾰족하게 갈라진 나뭇가지다. 앞쪽에는 밝은 색을, 뒤쪽으로 갈수록 어두운 색을 두껍게 칠해 깊이감을 주면서 햇빛이 스며드는 느낌을 나타냈다. 이 작품은 1809년 베르기젤 전투 이후 티롤 민병대가 기도하는 장면을 묘사한 <베르기젤 전투 이후의 아베 마리아>의 배경을 위한 습작이다.
이상하게 이 그림도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장에서 마음을 흔들었던 작품 중 하나.
점심 식사 (<수프> 두 번째 그림)
알빈 에거-리엔츠 (1868–1926) 1910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의 한 축을 이루었던 그룹은 회화나드로잉이 공예보다 수준이 높다고 생각한 하겐 클럽사람들이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탈퇴한 후에도, 이들은 계속 전시회를 열고 활동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생활상이나 풍경을 차분하고 따뜻한정서로 다뤘던 알빈 에거-리엔츠라는 화가가 그러한 부류에속합니다.
사람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분위기는 침착하고 평온하며, 사람들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합니다.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어 따뜻한 분위기가 전해집니다.에거-리엔츠는 농부들의 일상을 무게감 있게 그렸는데요, 같은 주제로만 무려 25점이나 되는 그림을 남겼다고 합니요. 그만큼 이런 주제에 대해서 깊이 탐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실에서 2실로 2부에서 3부로
전시장 중간에 있는 공간에서는 이번 전시회관련 멀티미지디어 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과 에곤실레 작품을 대형 현수막으로 출력한 포토월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3부. 일상을 예술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탄생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동료들은 공예도 예술과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하며,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예술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에서는 회화, 공예, 조각, 포스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였고, 예술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대중에게 알렸습니다. 1903년 콜로만 모저와 요제프 호프만은 일상의 물건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설립했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초기 디자인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유행한 장식 미술과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곡선 형태가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곧 기능성과 미학의 조화를 강조한 영국 *예술공예운동의 영향으로 기하학적 단순함을 중시하는 디자인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들의 철학은 이후 기능주의를 추구하며 설립된 예술학교 **바우하우스를 비롯해 여러 방면의 디자이너와 건축가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판된 이 책의 제목은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03-1928’이다. 공방과 관련된 많은 사진 자료를 포함하고 있으며, 글은 여러 가지 언어로 쓰여졌다. 이 책의 제작에는 세 명의 예술가가 참여했는데 그 중 마틸데 플뢰글의 경우 책에 수록될 사진 자료와 글을 선정했고 전반적인 디자인을 담당했다. 책에는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활동한 주요 예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공방의 역사와 성과를 담았다.
연하장 엽서
디자인: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 (1893–1971) 제작: 비엔나 디자인 공방
연대 모름 카드보드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는 새해, 부활절,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날을 위한 엽서도 디자인을 했습니다. 여기, 붉은 옷을 입은 광대가 꽃다발에 둘러싸인 돼지를 들고 있는 장면이 보이시나요? 우리나라에서도 돼지꿈을 꾸면 그날은 복권을 사야한다는 말이 있죠.
전통적으로 돼지는 복을 상징하는데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에서도 돼지는 행운을 나타내는 동물이라고 해요. 특히 새해 연하장에 시용될 때는 풍요로움과 부유함을 나타내는 동물로 쓰여서, 새해에 행운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엽서 위에 쓰인 것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문구입니다. 그러니까 이 엽서는 새해 연하장이에요. 광대는 새해를 갖이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어요.
하얀색 바탕에 동글동글한 장식이 들어간 주황색 줄무늬 디자인이 너무 매력적이에요. 총 16점으로 이루어진 이 도자기 식기 세트는 여러 예술가들의 협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선 식기 세트의 모양은 콜로만 모저가 디자인을 했고, 주황색 장식은 콜로만 모저의 제자였던 유타 지카가 맡았습니다. 그리고 도자기 제작은 도자기 공방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비엔나 도자기 제작소'에서 만들었습니다.
1부에서 설명했던 '총체예술`기억하시나요? 베토벤 전시회처럼 회화, 조각, 음악, 디자인 등 예술의 여러 요소들이 어우러져 관람객에게 특별한 감상을 선사한다는 개념인데요, 일상과 예술을 통합하고, 이를 위해 모든 예술가들이 힘을 합치는 것, 이것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이 추구했던 '총체예술'의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06년 도예가이자 조각가인 미하엘 포볼니는 그래픽 디자이너 베르톨트 뢰플러와 함께 ‘비엔나 도예 공방’을 설립했다. 이들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미학과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함께 협력하기도 했다. 정수리 부분을 깎은 수도승 특유의 머리와 깡마른 얼굴, 움푹 들어간 눈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머리와 얼굴을 감싼 검은색 두건이 얼굴을 돋보이게 한다. 포볼니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표현하고자 했다. 수도승은 언젠가 맞이할 죽음을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잠긴 듯하다.
손가방
디자인: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1893–1971) 제작: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29년 천 에른스트 플로일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활동한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는 섬유, 금속, 도자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디자이너로 두각을 드러냈다. 리카르츠-슈트라우스는 독특한 기하학적 무늬와 밝고 대조적인 색채의 조합으로 장식미술과 일상 용품을 결합했고, 1920년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이끌었다. 이 가방은 일상생활에서 가볍게 들기 좋은 크기로 만들어졌다. 다양한 색의 동그라미 장식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형태로 표현했다.
가죽 공방의 성과, 세련된 디자인
디자인: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1893–1971) 마틸데 플뢰글 (1893–1958)
제작: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29년 염색한 가죽 에른스트 플로일
1912년 디자이너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는 열아홉 살 이른 나이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첫 작품을 만들었다. 1920년대에는 꽃 등 식물무늬를 활용해 직물을 만들던 당대 예술가들과 달리 기하학적 구성과 대담한 색채로 눈에 띄는 독특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크리스털 식기 세트, 메테오르 100번
네 개의 와인잔 디자인: 콜로만 모저 (1868–1918)
제작: 마이어스 네페 (바칼로비츠 & 죄네 의뢰) 1899년 주조 유리 레오폴트미술관
콜로만 모저는 일상과 예술을 통합하는 철학을 실천한 디자이너였다. 모저는 다양한 모양과 색을 활용한 유리 공예품을 섬세하게 디자인했다. 이 작품들 역시 모저가 디자인하고, ‘바칼로비츠 & 죄네’ 회사가 보헤미아의 유리 공방 ‘마이어스 네페’에 제작을 의뢰해 만들었다. 기하학적 무늬를 잘 살린 모저 특유의 디자인을 보여 준다. 특히 유리를 성형할 때 만든 동그란 무늬가 마치 물 밖으로 떠오르는 공기 방울을 보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만든 다양한 작품들로 가득한 공간에 오셨습니다. 1903년 설립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은 일상적인 용품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철학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전시된 공예품들은 당시 일상에서 쓰이던 것들입니다.요즘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로 참 예쁘고 멋지죠? 몇 개는 집에 갖다 놓고 싶을 정도인데요?
콜로만 모저는 비엔나 디자인 공방 설립을 주도하면서 디자이너로서 영역을 넓히기 시작합니다. 특히 공방은 디자이너, 제작사 그리고 판매사 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모저는 공 모양의 꽃병에 강렬한 색채로 식물무늬|에서 영감을 받은 독특한 디자인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디자인은 비엔나에서 활동하던 도자기 및 유리 공방에서 꽃병으로 제작됐고,'바칼로비츠와 쇠네' 회사에서 판매했습니다. 이렇게 예술가와 제작사 간의 분업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수준 높은 공예품들을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요제프 호프만
요제프 호프만은 기능주의 미학을 강조한 오스트리아 건축가 오토 바그너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에서 개최한 많은 전시회를 디자인했는데, 초기에는 장식 미술에 바탕을 둔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영국 예술공예운동이 추구하는 간결하고 단순한 디자인에 매료되었고, ‘정사각 호프만’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기하학적인 디자인에 빠져듭니다.
요제프 호프만은 일상생활 속 물건에 예술적 가치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공간의 모든 요소를 일정한 디자인으로 통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특히 창문, 문, 가구, 식기 세트 등을 모두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디자인했습니다. 이는 모든 요소를 통합하여 최상의 디자인 효과를 내고자 했던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총체예술’이었습니다.
안락의자 721번
비엔나 전신국을 위한 디자인 디자인: 오토 바그너 (1841–1918) 제작: 야코프 & 요제프 콘 1902년경
굽은 목재, 너도밤나무에 칠, 합판 레오폴트미술관
오스트리아의 건축가이자 이론가로 유명한 오토 바그너가 디자인한 의자입니다. 오토 바그너는 기능적이고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움까지 담을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했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자 콜로만 모저외 요제프 호프만 역시 오토 바그너의 제자였습니다. 이들은 스승의 철학을 따라 장식적이면서도 기능성 좋은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이 의자는 오토 바그너가 비엔나의 전신국 사무실을 위해 디자인한 것입니다. 팔걸이와 등받이를 하나의 나무로 만든게 보이시나요? 나무에 수증기를 쐬어 부드럽게 만든 후 원하는 모양으로 구부려 곡선을 표현한 것입니다
꽃장식 테이블, M436번
디자인: 요제프 호프만 (1870–1956) 제작: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05년경 철판에 아연 도금 후 칠 레오폴트미술관
하양고 깔끔한 꽃장식 테이블을 디자인한 사람은 비엔니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주도한 요제프 호프만입니다 요제프 호프만은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창립했고,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이 있는 디자인을 추구했습니다.
이 테이블이 어떤 무늬로 가득 차 있는지 보이시나요? 바로 정사각형입니다. 요제프 호프만은 '정사각 호프만'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정사각형이 가장 완전한 형태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서 있는 바닥, 주변의 여러 작품들에서도 정사각형이 많이 보이실 거에요 요제프 호프만은 아름다움과 기능이 조화로운 수공예의 가치를 강조한 영국의 예술공예운동에 영향을 받아 정사각형에 매료되었습니다.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구성 속에 아름다움을 표현한 호프만의 디자인은 이후 많은 디자이너와 건축가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많은 금속 공예품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다시 유행한 고전적인 공예 제작 방식을 따랐다. 바로 금속을 고온에서 녹이지 않고 실온에서 물리적인 힘을 가해 성형하거나 가공하는 방식인데, 재료 본연의 성질은 유지하면서도 모양을 변형할 수 있었다. 이 바구니 역시 실온에서 가공한 뒤 표면에 구멍을 뚫어 만든 것으로, 복잡하고 섬세한 기하학적 장식을 조화롭게 배치했다.
4부 강렬한 감정, 표현주의의 개척자들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불만이 많았던 에곤 실레는 1907년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난 뒤로 예술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클림트는 실레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았고, 그를 주변에 소개하고 후원을 받게 함으로써 독립적인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둔 실레는 동료들을 모아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신예술가그룹’을 결성했습니다. 개인의 감정을 색채와 형태로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한 신예술가그룹 화가들은 비엔나 예술계를 모더니즘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자유롭게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개척하며 비엔나 예술계에 세대교체의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과장된 꽃과 장식적 배경
에곤 실레 (1890–1918) 1908년 캔버스에 유화, 금색과 은색 안료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가 구스타프 클림트를 처음 만났던 1907년, 실레는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의 학생이었습니다. 클림트는 단번에 에곤 실레의 재능을 알아보았죠. 그가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도록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게 소개해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스승이자 멘토와 같은 존재가 된 것이죠. 마침 에곤실레는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지쳐 있었습니다. 결국 에곤 실레는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료 예술가들을 모아서 신예술가그룹'을 만들었어요. 신예술가그룹은 비록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인물의 감정을 미술로 나타내는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면서, 비엔나 예술계에 세다 교체를 알렸습니다.
이것은 10년 전, 구스타프 클림트가 비엔나 분리파를 만들었을 때를 상기시켜 주네요.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 평행 이론일까요? 주황색 꽃으로 장식된 보라색 식물은 정사각형의 화폭에 그려졌습니다. 식물의 배경은 금색과 은색 안료로 장식되어있어 화려합니다. 클림트의 영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에곤 실레의 화풍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화
1910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구스타프 클림트는 에곤 실레가 자신만의 예술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스승이었다. 당시 클림트와 실레의 특별한 관계를 눈여겨본 사람들은 실레에게 ‘은색의 클림트’, ‘충실한 추종자’와 같은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섬세하게 그려진 하얀색 국화는 비엔나 분리파가 지향한 장식 미술의 영향을 보여 준다. 공간감 없는 검은색 배경과 대조를 이루는 국화의 구성에서 19세기 유럽에서 크게 유행한 자포니즘과 일본 목판화의 특징이 엿보인다.
소년과 큐피드
안톤 콜리히 (1886–1950)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한 소년이 벽에 기대 서 있습니다. 사실 소년이라고 하기엔 어른에 가까운 건장한 신체와 큰 발을 가지고 있는데요. 어딘가 부끄럽고 어색한 모습입니다. 소년의 옆에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사랑의 신으로 나오는 큐피드가 긴 창을 들고 있습니다. 즉, 육체적 변화를 겪으며 사랑을 알게되는, 그야말로 성장 중인 소년을 표현했네요 이 작품을 그린 안톤 콜리히는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서 에곤 실레와 만났고, 신예술가그룹으로 활동했습니다.
콜리히와 신예술가그룹 예술가들은 1911년 작품을 출품했고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겐 클럽은 젊은 예술가들이 새롭게 추구하기 시작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지지하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전시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여성의 초상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 (1887–1973) 1914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머리가 헝클어진 여인이 무심한 듯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흰 블라우스에 값비싼 진주 목걸이를 한 이 여인은 부유한 후원자로 추정된다. 인물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며 감정을 담아냈다. 이 작품을 그린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는 배우이자 극작가였지만, 1910년대 초반 파리에서 미술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야수파를 비롯한 최신 예술 동향을 접한 뒤로 화가로 전향했다. 귀터슬로는 신예술가 그룹에서 에곤 실레, 안톤 파이슈타우어 같은 예술가들과 함께 활동했다.
푸른 옷을 입은 소녀
로빈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1890–1969) 1913/14년경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한 소녀가 허름한 벽 앞에 앉아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양팔을 맞잡은 자세는 고민에 빠져 있는 소녀의 복잡한 심경을 보여줍니다. 어두운 표정과 눈 주변이 붉어져 있는 것을 보니, 금방이라도 운 것 같습니다.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있으니, 소녀의 슬픈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을 그린 로빈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에곤 실레와 함께 신예술가그룹을 만드는 데 함께했습니다. 이렇게 인물의 감정을 차갑게 가라앉은 색채로 그린 것은 20세기 초 나타난 표현주의적 경향입니다. 함께 전시된 신예술가그룹 작가들의 작품을 한번 둘러보세요. 인물화를 그릴 때 그 인물의 감정을 표현해내고자 했습니다.
조용한 여성 (화가 어머니의 초상)
안톤 콜리히 (1886–1950) 1909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안톤 콜리히는 1911년 친분이 있던 예술가 단체 하겐 클럽의 전시장에서 열린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 아홉 점을 출품했다. 하겐 클럽은 젊은 예술가들이 새롭게 추구하던 표현주의 예술을 지지하고 그들의 혁신적인 작품을 전시했다. 이 전시회로 신예술가 그룹은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콜리히가 당시 출품했던 아홉 점 중 하나인 이 작품은 어머니의 초상화다. 어두운 옷을 입은 화가 어머니의 모습이 밝게 빛나는 배경에서 돋보이며 실루엣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조명이 가끔씩 작품 감상을 방해한다. 얼굴 자세히 감상 하세요.
오스카 코코슈카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표현주의 경향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던 오스카 코코슈카는 1900년대 비엔나 예술가들의 초상화가이자 작가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클림트의 초청으로 참여한 ‘비엔나 예술 전람회’(1908)에서 코코슈카는 ‘야수 중의 야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거칠고 과감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코코슈카는 인물화에서 단순한 외형 묘사를 넘어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했습니다. 특히 폭발하는 듯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로 1차 세계대전으로 불안해진 인간의 심리를 묘사했습니다. 미술뿐 아니라 연극, 문학 등 장르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실험으로 대중의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를 이끈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소녀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05/06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가 비엔나 예술공예학교의 학생 시절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옷을 입지 않은 어린 소녀가 벽에 기대어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 다양한 갈색을 조화롭게 사용했으며, 코코슈카 특유의 표현주의 화풍이 드러나기 이전 전통 화법을 보여 준다.
목화솜 따는 소녀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08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요제프 호프만의 제안으로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의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직선적이고 단순한 윤곽선, 음영이 없는 색면의 사용, 두꺼운 서체 등은 비엔나 분리파가 만든 포스터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 준다. 이 포스터는 루돌프 칼바흐가 디자인한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의 또 다른 포스터와 매우 비슷한 양식이다. 코코슈카와 칼바흐는 비슷한 시기에 비엔나 예술공예학교에서 공부했으므로 동료로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피에타
연극 <살인자, 여성들의 희망>을 위한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09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공포영화와 같은 이 충격적인 그림은 오스카 코코슈카가 직접 극본을 쓴 연극'살인자, 여성들의 희망'의 홍보 포스터입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이런 포스터를 그린 걸까요? 이 연극은 남자와 여자의 파괴적인 사랑과 갈등을 주제로 합니다. 강렬하고 파괴적으로 과장된 포스터는 남녀 관계의 고통스러움과 혼란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스카 코코슈카는 이번 전시가 주목하는 '6명의 꿈꾸는 계술가들'중 네 번째로 만나볼 인물입니다. 그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교류하며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작업하기도 했지만, 곧 자신의 색깔을 찾아 표현주의적 경향을 드러내는 작품을 하게 됩니다. 코코슈카는 클림트의 초청으로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에서 데뷔했고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내면의 심리를 파고드는 독특한 표현법이 돋보이는 인물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극 문학 등 장르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실험으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지평을 넓힌 개척자였습니다
"얼굴 인식" 강연을 위한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1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방금 전에 보신 파괴적인 사랑과 갈등을 그린 연극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예상하셨겠지만 정말 끔찍했습니다. 급기야 오스카 코코슈카에게는 '문제아'라는 별명도 붙었어요. 그리고 몇 년 후 코코슈카는 강연에서 얼굴이 단순히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영혼을 담아내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어요. 전통적인 초상화는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만 코슈카는 변화무쌍한 감정과 영혼을 포착해 그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이 작품은 그 강연의 홍보 포스터입니다. 이런 코코슈카의 생각은 강연을 듣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불쾌감을 주었습니다. 영혼을 그림으로 그린다니, 심령술사가 할 법한 이야기로 들렸던 것 같아요. 포스터의 남자는 코코슈카 자신을 그린 것입니다. 얼굴로 영혼을 그려낸다고 했으니, 한번 볼까요? 자글자글한 주름과 움뚝 팬 눈으로 그려진 코코슈카의 얼굴은 고통 받는 영혼 그 자체 같네요. 코코슈카는 자신이 비엔나 예술계에서 느낀 고립감을 이렇게 자화상으로 표현했습니다.
양쪽에서 본 화가의 자화상
취리히 볼프스베르크에서 열린 코코슈카 전시회를 위한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23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는 1923년 가을, 취리히의 갤러리 볼프스베르크에서 열린 자신의 단독 전시회 포스터로 같은 해에 그린 자화상을 활용했다. 왼손에 붓을 들고 관람자를 쳐다보는 그림 속 인물은 예술가이자 개인전을 개최하는 주인공인 코코슈카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이 개인전은 코코슈카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넘어 국제적인 예술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코코슈카 작품느낌 너무 좋다.
헤르만 슈바르츠발트 II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6년 캔버스에 유화 브로에르 자선 재단
이 작품의 주인공 헤르만 슈바르츠발트는 아내와 함꼐 오스트리아의 젊은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들 부부의 아파트는 비엔나 건축가 아돌프 로스가 디자인했고, 오스카 코코슈카나 에곤 실레 등 표현주의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이들을 재정적으로도 후원하고 작품을 발표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스카 코코슈카는 헤르만의 초상화를 2번 그렸습니다.이 작품을 보시면 헤르만이 입은 옷과 뒷배경이 거의 비슷한 색으로 그려져 헤르만의 얼굴과 손에 시선이 집중됩니다. 얼굴의 주름과 혈관, 과장된 손가락과 손의 크기는 헤르만의 성격과 내면을 표현하고자 한 코코슈카의 독특한 기법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헤르만의 성격이 어때 보이시나요?
빅토어 리터 폰 바우어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4년 캔버스에 유화 브로에르 자선 재단
1914년 무렵 오스카 코코슈카는 넓은 붓을 이용해 물감을 두껍고 대담하게 칠했다. 이 작품에서는 어두운 녹청색 배경에 짙은 녹색 양복을 입고 있어 그림 속 주인공의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코코슈카는 날카로운 선으로 얼굴 표정을 그렸으며, 얼굴과 마찬가지로 손도 돋보이게 표현했다. 산업가이자 예술 후원자였던 폰 바우어는 혁신적인 건축가 아돌프 로스와 친분이 있었다. 당시 코코슈카의 후견인이던 로스가 자연스럽게 폰 바우어에게 코코슈카를 소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화상
막스 오펜하이머 (1885–1954)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슷한 색감의 뒷배경으로 얼굴과 손을 강조한 것은 앞서 보았던 코코슈카의 인물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작품은 막스 오펜하이머의 자화상입니다.오펜하이머와 코코슈카는 비슷한 시기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으며, 동료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림 속 오펜하이머는 미간을 찡그린 의심 많은 눈빛으로 우리의 시선을 살짝 피하고 있네요. 길게 왜곡되고 칼라비틀어진 것 같은 오펜하이머의 손은 마치 고통스러운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자화상은 오펜하이머가 주요 전시회에 모두 출품했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오펜하이머는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독일과 스위스에서도 활동하며 인물화로 새로운 예술적 경향을 탐구했습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2관에는 사진과 같이 앉아서 휴식과 함께 작품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대략 여기까지 한 시간 반이 조금 덜 걸렸는데요.
휴식하면서 다음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에너지를 모아보는 것도...
리하르트 게르스틀
리하르트 게르스틀은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보다 훨씬 앞서서 표현주의의 길을 개척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웠지만 전통적인 화법을 거의 구사하지 않았고, 거칠고 자유로운 붓놀림과 과감한 색채로 인물을 표현했습니다. 독자적으로 활동한 게르스틀은 시대에 앞선 예술 양식을 선보였습니다. 게르스틀은 20세기 초 현대 음악의 창시자인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깊이 교류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음악가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예술적 실험과 도전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게르스틀이 후기에 그린 초상화들은 세부 묘사 없이 인물의 형태만 남긴 추상화에 가까웠습니다. 그의 실험적인 작품들은 당시에는 예술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새롭고 독창적인 화법으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문을 연 선구자였습니다.
스마라그다 베르크
리하르트 게르스틀 (1883–1908) 1906/07년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섞지 않고 점을 찍어 표현하는 점묘법을 활용했는데, 도란색과 보라색이 주로 사용됐습니다. 게르스틀이 그린 이 여인은 피아니스트 스마라그다 베르크로, 20세기 초 표현주의 음악가로 유명한 알반 베르크의 여동생입니다.
알반 베르크는 리하르트 게르스틀과 함께 어울렸던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친구들 중 하나입니다. 아르놀트쇤베르크는 12음기법이라는 새로운 작곡 방식을 만드는 등현대 음악의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게르스틀은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던 음악가들과어울리며 예술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잔잔한 인물화는 게르스틀의 초기 양식을 보여줍니다
반신 누드의 자화상
리하르트 게르스틀 (1883–1908) 1902/04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침착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남자의 머리 주변은 밝은 색으로 그려져 마치 후광이 빛나는 것 같습니다. 손과 같은 신체의 다른 부분은 비교적 간단하게 그려졌지만, 얼굴만큼은 깊은 인상을 남길 만큼 강렬합니다. 남자의 시선은 우리를 향하는 것 같지만, 우리 너머의 더 먼 곳을 응시하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림 속 이 남자는 리하르트 게르스틀입니다. 그는 현재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표현주의자이지만,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보다 앞섭니다 그는 1908년, 25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게르스틀은 비엔나 분리파와 같은 단체에 속하지 않았지만 거칠고 자유로운 붓놀림과 과감한 색채로 자신만의 표현방식을 찾아나갔습니다. 그의 후기작들은 세부 묘사 없이 형상만을 남겨 추상화에 가까웠을 정도였습니다.
게르스틀은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시대를 앞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고 평가됩니다
5부. 선의 파격, 젊은 천재 화가의 예술 세계
20세의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확립한 에곤 실레는 1900년 비엔나의 표현주의 선구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의 예술 인생은 짧았지만 인간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독창성은 모더니즘 예술의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됩니다. 특히 에곤 실레는 자아 정체성, 고독, 욕망 등 심리적이고 실존적인 주제를 자신만의 선과 색으로 담아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혼자라는 두려움과 고독감, 한없이 불안한 마음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내면의 고통과 갈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에 표현했습니다. 이제 누구보다 솔직하게 인간을 탐구하고 그려냈던 예술가, 에곤 실레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의 가장 대표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아마도 유일하게 긴 줄을 서야만 작품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패널에 유화 물감과 불투명한 물감 레오폴트미술관
6명의 꿈꾸는 예술가들' 중 마지막으로 만나볼 인물은 바로 에곤 실레입니다. 그는 '인간'에 대해 가장 솔직하게 접근한 예술가입니다. 에곤 실레는 죽음에 대한 공포,고독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과 같은 인간의 감정을 자신만의 선과 색으로 표현했는데요, 이제부터 그가 그려낸 작품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에곤 실레는 20세기 초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그 어떤 화가보다도 자신의 얼굴과 몸, 그리고 성격에 대해 깊이 탐구했습니다. 그가 남긴 100점이 넘는 자화상과 4천점이 넘는 밑그림에서 그가 얼마나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자화상에서 그는 깔끔한 흰색을 배경으로 검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실레의 옆에는 꽈리 열매가 강렬한 붉은 색으로 그려져 좌우의 균형과 조화로움을 유지합니다. 에곤 실레는 어깨를 비틀고 우리는 살짝 내려다보고 있네요. 그의 전성기에 그려진 만큼, 예술가로서의 자신감이 눈빛으로 드러납니다. 끊어질 듯 섬세하게 이어지는 선의 표현은 그만의 독창적인 특징입니다. 그의 예민한 성격과 예술가로서의 완벽주의도 잘 드러납니다
소녀의 초상
에곤 실레 (1890–1918) 1906년 종이에 검은 분필과 목탄 레오폴트미술관
1906년, 열여섯 살의 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고의 미술 학교인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러나 엄격하고 보수적인 체제와 교수법에 반발해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둔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던 해에 그린 이 작품은 그가 드로잉에 얼마나 뛰어난 재능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긴 머리를 한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1907년 캔버스에 유화 E. 와 H. H. 컬렉션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는 에곤 실레의 자화상이다. 강한 빛을 받아 밝게 표현된 왼쪽 얼굴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빛은 실레의 이마, 뺨, 턱으로 쏟아지며 얼굴의 특징을 매우 섬세하고 정확하게 드러낸다. 다양한 채도의 갈색과 보라색으로 칠해진 머리카락은 개성 있고 생동감이 넘친다. 이 자화상은 실레 자신을 깊이 있게 표현하면서도 내면의 강렬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에곤 실레
철도회사 역장이었던 에곤 실레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랐지만, 실레는 두 살 때부터 색연필과 종이를 잡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실레는 삼촌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삼촌의 도움으로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실망했고, 평생 스승으로 믿고 따랐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원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합니다.
실레는 클림트의 초청으로 참여한 전시회에서 유럽 거장들의 작품 세계를 접했습니다. 초기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지만 곧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인물을 표현하는 실레의 독특한 선과 뒤틀린 몸은 곧 그의 화풍으로 자리 잡았고 비엔나 예술계에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존재에 대한 고민을 자신만의 선과 색채로 풀어낸 방식은 에곤 실레를 세기 전환기의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스스로를 보는 이 II (죽음과 인간)
에곤 실레 (1890–1918)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 자신을 경영 잃어버리고야 말 것 같은 '정체성의 위기'를 깊이 탐구했습니다. 그는 정말, 불안하고 나약한 사람이었을까요? 그림 속 인물은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다른 나'의 유령 같은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속 주인공은 원래 나눠질 수 없는 자아가 분리되어 불안정한 상태에 있습니다. 창백하게 표현된 유령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유령이 주인공의 어깨를 감싸고 있어, 공포에 떨고 있는 것 같아요. 실레는 어두운 색깔과 날카로운 선으로 주인공이 느끼는 고통과 불안감을 생생하게 표현했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아래에서 올라온 매우 크게 그려진 손인데요, 처음에는 주인공의 손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이 손은 주인공의 것도, 유령의 것도 아닙니다. 게곤 실레에게 손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술가에게 손은 가장 기본적인 표현의 도구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더없어서는 안 될 '나 자신, 그 자체'입니다. 정체성의 위기와 죽음을 앞둔 공포, 에곤 실레는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던 걸까요? 죽음으로써 예술가의 삶이 끝나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요?
계시
에곤 실레 (1890–1918)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거의 남기지 않았지만, 이 작품에 대해서는 편지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어요. 그만큼 애정이 컸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편지의 내용을 읽어 드릴께요. 작품에 담긴 의도를 찬찬히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위대한 인물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이 작품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림은 스스로 빛을 발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의 빛을 평생 소비하며 살아간다. 빛이 모두 소진되면 그들은 더 이상 빛나지 못하게 된다. 뒤돌아선 사람은 위대한 인물에 매혹되었다. 그는 눈을 뜨지 않고도 세상을 보는 위대한 존재들에게 무릎을 끓고 경의를 표하고 있다. 위대한 존재가 발하는 빛은 다양하고 신비로운 색으로 표현됐다. 무릎을 끓은 작은 사람은 크게 빛나는 위대한 존재와 합쳐져 하나가 되고 있다. 이것이 내가 그린 그림 <계시>에 대한 설명이다.
예술가라는 ‘자아 정체성’의 위기
에곤 실레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레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뒤틀린 몸과 해골 같은 얼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은 인간의 죽음, 예술가라는 정체성이 끝나버리는 순간에 대한 불안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실레는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겼을 정도로 자신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자기 몸을 거울에 비춰 보며 다양한 자세와 구도를 연구했습니다. 실레의 자화상은 자신의 겉모습을 그린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술가라는 정체성을 탐구하기 위한 도구였으며, 에곤 실레만의 독특한 화법을 보여주는 주제였습니다.
뒤틀린 자세의 누드 자화상
장식이 있는 가운을 입은 누드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1909년 종이에 연필과 색분필 레오폴트미술관
한쪽으로 몸을 돌려 정확히 관람자를 바라보는 자화상이다. 실레의 작품에서 보이는 독특한 선의 표현은 인물의 연약함과 강렬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몸을 옆으로 돌린 채 어깨 너머로 정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긴장감이 감돈다. 실레가 걸친 빨간 장식 가운이 팔에서 흘러내려 벗은 몸의 일부만을 가리고 있다. 배경을 비워 인물에게만 집중하게 만든 구도로 인해 실레의 독창적인 화풍과 강렬한 인체 표현이 더욱 돋보인다.
에곤실레를 위한 마지막 공간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 마지막 공간인 5부 공간은 에곤실레를 위한 공간 입니다. 이번 전시회를 주관하는 레오폴트미술관이 에곤 실레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5부에서 1~4부까지 아쉬웠던 부분이 한 번에 해결됩니다.
남성의 반신 누드 뒷모습
에곤 실레 (1890–1918) 1910년 종이에 검은 분필과 불투명 수채 레오폴트미술관
1910년 무렵 에곤 실레는 누드와 자화상을 중심으로 작업했고 훨씬 성숙한 표현주의 화법을 선보였다. 실레는 자화상을 그릴 때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 가며 자세를 연구했다. 이 반신 누드의 남성 역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빠르고 강한 선으로 그린 남성의 깡마른 몸은 과장된 비례와 비틀린 자세로 실레 특유의 인체 표현을 보여 준다. 빨간색, 파란색, 보라색으로 옅게 칠해진 몸과 굽은 손의 색감은 과장된 표현을 강조한다.
시인
에곤 실레 (1890–1918)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밑그림 없이 빠른 붓질로 그린 이 작품에서 에곤 실레는 자신을 뒤틀린 자세를 한 시인으로 표현했다. 어색할 정도로 심하게 왼쪽으로 꺾여 있는 실레의 머리는 뒤쪽 흰색 공간에 둘러싸여 있다. 눈썹을 치켜뜬 의심에 찬 눈초리는 옆을 향하고 있다. 창백해 보이는 몸에 검은색 윗옷만을 걸친 실레는 어두운 배경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오른쪽 손목을 살짝 잡고 있는 왼손 아래로, 배꼽과 성기를 붉은색으로 그렸다.
어머니와 아이, 모성에 대한 갈망
1904년 새해 전날, 그의 아버지가 매독으로 사망한 후, 당시 14세였던 에곤 실레는 가정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실레의 어머니는 그가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정착하기를 바랐지만, 실레는 예술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실레는 어머니와 많은 갈등을 겪었고, 따뜻한 정서적 교감을 경험하지 못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실레는 어머니와 복잡한 관계를 형성했고, 동시에 여동생 게르트루드와의 친밀한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실레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와의 불안정한 관계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결합한 것입니다. 죽음은 실레의 예술 세계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재작업: 프리츠 보트루바 (1907–1975)
디자인: 1917년경, 재제작: 1965년 인조석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가 자기 얼굴을 조각한 매우 독특하고 유일한 자화상이다.
실레는 숱이 많은 머리를 뒤로 빗어 넘겼고, 고개를 살짝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하다. 조각에 관심이 많았던 실레는 오귀스트 로댕 같은 조각가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1917년 처음 만든 이 자화상 조각에 대한 실레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작품은 1965년 주조한 일곱 점의 청동 조각 가운데 하나다.
어머니와 두 아이
에곤 실레 (1890–1918) 1915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의 부모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15살 때 사망했고, 어머니는 미술을 배우고 싶은 실레를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에게 따뜻한 애정을 느껴보지 못한 실레는 불안한 관계에 있는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품에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피에타'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온몸을 녹색 천으로 감싼 어머니가 두 아이를 안고 있어, 에곤 실레가 '피에타'의 구도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외 아들의 얼굴은 죽은 듯 해골처럼 창백하게 그려졌고, 원작의 피에타'의 구도에 존재하지 않는 어린 아이가 공중에 떠 있습니다.이 어린 아이는 색색의 줄무늬 옷을 입고 죽은 듯한 어머니와 다른 아이를 절망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잘 지내고 싶었던 에곤 실레의 복잡한 감정들이 작품 곳곳에 표현돼 있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아이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패널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작은 크기의 화폭에 그려진 이 작품은 성화인 성모자상을 연상시킨다. 공간을 알아볼 수 없는 어두운 배경 앞에 어머니와 아이가 두꺼운 붓질로 그려져 있다. 두 사람의 머리는 서로 이어져 있는 듯하다. 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점잖은 표정으로 아이를 보고 있으나, 아이는 반짝이는 눈을 크게 뜨고 관람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이의 손은 어머니와 아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상징한다.
애도하는 여성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패널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어두운 천으로 머리를 감싼 여인의 얼굴과 창백한 피부는 마치 해골을 연상시킨다. 여인의 머리 뒤로 또 다른 인물의 얼굴이 살짝 드러난다. 눈썹을 치켜뜨고 입을 꼭 다문 채 관람자를 바라보는 또 다른 인물은 실레가 자신을 표현하던 방식과 비슷하다. 실레는 인물화에서 종종 두 개의 얼굴이나 다른 신체 부위를 사용해 인물 내면의 갈등, 분열된 정체성과 같은 어두운 감정을 드러냈다. 이러한 표현은 인간 심리를 깊이 탐구한 실레가 이중적인 감정이나 복잡한 내면을 다루던 방법이었다.
천을 두른 여성의 뒷모습
<개종 II>의 부분 에곤 실레 (1890–1918) 191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이 작품의 원작인 <개종 Ⅱ>에는 가운데서 설교하는 인물을 열두 사람이 둘러싸고 있는 장면이 그려졌지만, 현재는 사라져 일부분만 남아 있다. 종교적 상징을 담은 <개종 II>는 인간 내면의 변화를 주제로 하여 영적 각성이나 내적 갈등을 표현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어깨에 천을 두른 여성의 비틀거리는 듯한 뒷모습에서 고독과 불안함이 느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 나무 (겨울나무)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캔버스에 연필과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바람에 휩쓸린 앙상한 나무가 하늘로 뻗어 있습니다. 꼭 나뭇가지가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잘 보면 나무의 기둥부분이 하늘과 같은 색으로 그려져 있습니다.마치 기둥을 잃은 나뭇가지가 바람이 몰아치는 하늘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듯합니다.고립된 외로움과 동시에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강렬한 생명력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전시회에 출품됐을 때, 한 미술사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의 죽어가는 자연이 가지는 특별한 분위기의 마법과 같다. 에곤 실레는 잎이 없는 앙상한 나못가지로 생명을 그렸다' 이렇듯 에곤 실레는 풍경화 속 자연을 인간이 느꼈을 법한 감정을 넣어 의인화하여 표현했습니다. 자서전과 같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실과 고립을 그린 검은 풍경화
에곤 실레는 마치 사람을 그리듯 도시와 자연 풍경에 감정을 담아냈습니다. 풍경은 예술가의 내면 심리와 감정을 나타내는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기묘하게 뒤틀리고 어두운 도시나 강변 풍경을 그린 작품들에서 우리는 실레의 고뇌와 시대적 불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실레는 인간의 상실감과 고립, 정서적 불안감을 검은 풍경화로 그렸습니다. 특히 자신이 보았던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유롭게 다시 조합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블타바강 가의 크루마우 (작은 마을 IV)
에곤 실레 (1890–1918) 1914년 캔버스에 유화, 검은 분필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시선으로 크루마우의 슐로스베르크 언덕 건너편 마을 풍경을 그렸다. 마을 집들을 노란색, 흰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으로 표현했는데, 실레가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그린 건물들에서는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강물과 지붕은 대체로 어두워 실레가 도시 풍경에서 반복적으로 보여 준 고독과 소외감이 묻어난다.
작은마을 III
에곤 실레 (1890–1918) 1913년 캔버스에 유화,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색색의 집들이 빼곡하게 늘어선 곳 아래로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강물과 길, 집의 지붕이 모두 어두운 색으로 그려져 전반적으로 암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에곤 실레는 기묘하게 뒤틀린 검은 도시 속에 자신의 생각과 고민을 담아냈습니다. 그는 창의적이지 못한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안에서 고립된 자신이 느낀 불안감을 검은 도시 풍경화로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체코의 체스키 크룸로프인 남부 보헤미아 지역의 중세 마을을 그린 것입니다. 실레는 이 지역에 살면서 여러 점의 도시 풍경화를 그렸지만, 마을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여러 곳에서 본 도시의 모습을 자유롭게 재조합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도시에서 머물며 느낀 소외감을 생명력을 잃은 죽은 도시처럼 검은색으로 그려낸 실레만의 표현법이 돋보입니다.
클림트와 실레의 누드 드로잉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는 각각 4,000장에 달하는 드로잉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중 많은 부분이 누드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누드를 표현한 방식과 목적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클림트는 누드 드로잉에서 여성의 몸에 담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습니다.
그의 드로잉은 섬세한 선과 세밀한 묘사가 특징인데 부드러운 곡선으로 여성의 매력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실레의 드로잉은 현실적이고 과감합니다. 그는 왜곡된 인체와 뒤틀린 자세를 날카로운 선으로 표현해 인간의 고독과 불안, 그 속에서 움트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도발적인 드로잉은 곧 실레 그림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에서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공간 중 하나...
오른쪽에서 본 여성의 상반신 누드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916년경 일본 종이에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4천장에 달하는 드로잉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많은 작품이 누드일 정도였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흔히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의 중심어 성적 욕망이 있고, 이로 인해 정신적 갈등이 일어난다고 분석했습니다. 클림트와 실레는 인간의 본능을 예술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에로티시즘에 대한 접근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클림트의 드로잉을 보시면, 독특한 코, 도톰한 아랫입술 우울한 분위기의 눈 등 섬세한 얼굴 표현이 돋보입니다. 클림트는 여성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그려냈습니다. 그는 여성의 매력을 표현하면서도 장식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아름답고 환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죠. 클림트가 보여주는 드로잉은 섬세하면서 절제된 표현이 특징입니다
왼쪽에서 본, 다리를 올리고 있는 여성의 반신 누드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917년 일본 종이에 인도 잉크 레오폴트미술관
클림트는 여인이 침대에 푹 파묻힌 느낌을 주기 위해 길고 날씬한 비율을 강조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정리된 윤곽선 대신 불규칙하게 겹친 선들을 사용하여 불안한 느낌을 준다. 거칠게 떨리는 선은 익숙하지 않은 펜과 잉크로 그렸기 때문이지만, 클림트의 후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특히 이 작품은 형태를 간략하게 암시하듯 그리면서 그 안에 담긴 감정을 드러낸 클림트 말년의 경향을 잘 보여 준다.
클림트의 누드 스케치를 감상했다면, 반대편 공간은 에곤 실레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같은 듯 전혀 다른...
팔이 올라간 여성의 누드
에곤 실레 (1890–1918) 1910년 종이에 검은 분필 레오폴트미술관
이 그림은 여성의 머리, 팔, 몸통을 본 대로 빠르게 스케치한 듯하지만, 양팔의 평행선이 방해받지 않도록 턱 부분을 생략하는 등 실레가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곳 위주로 그려졌다. 실레의 초기 작품들은 장식적인 표현을 추구했으나, 이 시기에는 몸의 구조에 집중했다. 팔과 몸통의 윤곽선이 해부학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팔을 들어 올린 몸의 안정적인 구조에 중점을 두고 표현했다.
올라간 속옷을 입고 누워 있는 여성의 누드
에곤 실레 (1890–1918) 1915년 종이에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이 작품에서 실레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와 선으로 인체를 표현했다. 이러한 방식을 시도한 시기는 짧았지만 실레는 독특한 양식을 보여 준다. 이 작품에서는 여인의 말려 올라간 속옷을 아무렇게나 낙서하듯 그렸다. 모델의 머리는 소용돌이 같은 선으로, 얼굴은 반원 등 간략한 선으로 그려 마치 인형을 보는 듯하다.
이 그림을 그리던 1915년 무렵, 실레는 개성 있는 얼굴 대신 개인의 특징을 생략한 기하학적 형태로 인물을 표현했다. 실레의 특징이던 ‘말하는 듯한 눈’도 텅 빈 구멍처럼 묘사했다.
파란 스타킹을 신고 앞으로 몸을 숙인 누드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종이에 연필과 불투명 수채 레오폴트미술관
이 작품을 보면, 척추와 근육이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마른 여성이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있습니다. 몸을 표현한 섬세한 선과 부분적으로 칠해진 색은 이 여성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매우 힘들어 보이지만, 섬세한 구도로 안정적인 자세를 만들어낸 것이 신기하네요. 그만큼 이 여인이 느끼고 있는 고통과 고뇌를 표현하기 위한 실레의 고민이 느껴집니다.
회색 망토를 두르고 무릎을 꿇은 여성 (발리 노이칠)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종이에 검은 분필, 수채, 불투명 수채 레오폴트미술관
이 여인은 에곤 실레의 연인이었던 발리 노이칠입니다. 그녀는 에곤 실레의 모델이었고 그의 많은 작품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실레의 작품에 나오는 붉은 머리의 여성은 대부분 발리를 모델로 한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수줍은 듯 당찬 얼굴의 발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과 회색 가운의 주름이 세밀하게 표현됐고, 특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 발이 강조되어 안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실레와 발리는 생활고를 겪으며 여러 지역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실레는 1914년 정착한 곳에서 만난 중산층 집안의 여성과 결혼을 결심합니다. 결국 발리는 에곤 실레를 떠나게 됩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의 마지막 공간입니다.
에곤실레의 작품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의 에로티시즘 작품이 빠질 수 없습니다. 그만의 독특한 누드 작품을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불안함에서 안정감으로, 달라진 누드
에곤 실레는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특히 경력 초기에 생활고에 시달리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칠과 연인 관계였으며, 그녀는 주변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실레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안정적으로 정착하기를 원했던 실레는 결국 발리와 결별하고, 1915년 이웃으로 만난 중산층 집안의 딸 에디트 하름스를 만나 결혼 했습니다. 에디트는 따뜻하고 헌신적인 성품으로 실레에게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에곤 실레는 누드에서 주로 마르고 긴장된 모습으로 내면의 불안함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후기에 실레가 그린 인물들은 대체로 풍만하고 여유로운 모습입니다. 아내 에디트를 만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실레의 감정이 반영된 걸까요? 인물의 모습은 변화되었지만, 생명력을 강조하고 심리적 주제들을 탐구한 그의 예술 세계는 한결같아 보입니다.
누워 있는 여성
에곤 실레 (1890–1918) 1917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에게 누드는 단순한 육체의 묘사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인 욕망과 고독을 대하는 내면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안정된 정착 생활을 원했던 에곤 실레는 1915년 중산층 가정의 딸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했습니다.
에디트는 따뜻하고 헌신적인 성격이었고, 그것은 오랜 시간 실레가 원했던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예민하고 불안정했던 실레의 예술가적 성향과 달리 유복한 환경과 온화함을 가졌던 에디트의 성격은 실레에게 큰 안정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바로 실레의 아내, 에디트입니다. 양팔을 위로 올려 머리를 받친 팔의 자세와 넓게 벌린 다리가 가로로 긴 작품에서 대칭을 이룹니다. 실레는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있는 그대로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실레의 후기 작품에서는 이전의 깡마른 모습과 다른 풍만한 여성의 누드가 그려졌습니다. 결혼 이후 심리적으로 안정된 실레가 임신한 에디트를 보며 느낀 감정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요?
안타깝게도 1918년 유럽을 덮쳤던 스페인 독감으로 아내 에디트는 아들을 임신한 상태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3일 후, 에곤 실레도 세상을 떠납니다
서 있는 세 여성 (부분)
에곤 실레 (1890–1918) 1918년 (미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에곤 실레가 생을 마감하자 미완성으로 남게 된 작품이다. 세 여성은 모두 다른 표정과 자세를 하고 있다. 옆으로 몸을 돌린 가장 왼쪽의 여성은 무언가 이미 체념한 표정이다. 가운데 여성은 눈을 크게 뜨고 침착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이 여성에게 기댄 오른쪽 여성은 긴장을 풀려는 듯 눈을 감고 있다. 이 작품은 실레가 말년에 보였던 새로운 회화 양식을 잘 보여 준다.
에필로그/ 예술에는 자유를
전통의 벽을 넘어 새로운 양식에 도전하며 예술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해 왔습니다. 그 역사 속에서 각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이끈 선구자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났던 ‘꿈꾸는 예술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비엔나 분리파가 오스트리아 예술에 심은 ‘도전과 실험’이라는 나무는 에곤 실레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자유’라는 열매를 선물했습니다.
그들의 도전과 실험은 비엔나 예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끌었고, 자유를 꿈꿨던 예술가들은 ‘비엔나 1900년’의 선구자가 됐습니다. 전통의 틀을 깨고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했던 이들의 시대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선사합니다.
오늘 소개한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는 얼리버드 티켓팅 이후 너무나 기다리던 전시회 였는데요. 에곤 실레의 다양한 여러 원작들을 만나본 부분은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클림트는 약간 사기당한 느낌이 드네요. 제가 아는 클림트의 작품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작품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별도의 주차장은 운영하고 있지 않습니다. 매장앞에 있는 노상 유료 공영주차장 이용하셔야 합니다. 주차요금 지원하지 않고요. 송송면사무소 앞 주차장 주차요금은 10분에 1,000원 입니다. 한 시간에 6,000원 공영주차장으로 다둥이 친환경차, 국가유공자 50% 할인적용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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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예술의전당에서 오픈한 ‘빛의 거장 카라바조와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회 관람후기입니다. 레오나르도다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이탈리아 3대화가로 손꼽히는 카라바조의 작품과 동시대를 살았던 거장들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만 아쉬운 부분도 상당한 전시회입니다. 오늘은 카라바조 전시회 관람후기와 도슨트, 오디오가이드, 아트샵 등 전시회관련 모든 정보 공유합니다.
| 빛의 거장 카라바조와 바로크의 얼굴들 & 반고흐 전시회
이번 겨울 예술의 전당에서는 두 개의 대형 전시회가 열리고 있거나 준비중에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카라바조 전시회와 현재 전시회 준비중인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시회인데요. 두 전시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전시회입니다.
전시회는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 2층에서 ~ 2025.03.27.(목) 까지 열릴 예정입니다.
19시까지 전시회가 진행되며 입장 마감은 18:00시 입니다. 한 시간만 더늦게 종료하면 평일에도 방문할 수 있는데... 카라바조가 우리나라에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작가가 아니어서 그런지 전시회 초반인데 이 아주 많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입소문 나야 하는 전시회로 생각됩니다.
| 6개의 섹션 – 관람 시간은 최소 2시간 이상
이번 전시회는 카라바조 작품 10점을 포함해서 동시대 작가의 작품 70여점이 선보입니다. 총 6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당히 여유있게 작품 배치를 해서 편안한 감상이 가능합니다. 각각의 작품에 많은 이야기와 감상포인트가 있어 최소 2시간의 시간은 생각하셔야 합니다.
주요 작품만 감상해도 두 시간 가까이 걸리네요. 모든 작품을 꼼꼼하게 감상하신다면, 3시간은 생각하세요.
| 도슨트 및 오디오 가이드
| 유료 도슨트 15,000원 / 1일 4회 진행
이번 전시회는 오디오가이드와 유료 도슨트로 진행됩니다. 빛의 거장 카라바조와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회 도슨트는 오전 10시와 11시 30분, 16시 17시 30분 총 4회 진행됩니다. 도슨트 시간은 약 50분이 소요되며, 무료가 아닌 유료로 진행됩니다. 가격은 15,000원
| 오디오가이드 3,000원 - 필수
카라바조 전시회 오디오 가이드는 현장에서 오디오가이드 기기대여 또는 H.Point 앱을 통해 이용이 가능합니다. 두 가지 모두 3,000원에 대여 가능한데요. 이어폰 챙기고 앱으로 청취하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이번 오디오가이드는 25개로 제공되는데, 지금까지 들어본 오디오가이드 중에서 내용 충실도가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또한 미알못인 저는 이번 전시회에 전시된 작가 대부분을 모르기에 더욱 더 필요하네요.
| 카라바조 전시회 티켓 할인
정상요금은 성인 기준 22,000원 인데요. 저는 두 달 전에 슈퍼얼리버드 티켓팅으로 55% 할인된 가격인 9,900원에 관람하고 왔습니다. 아쉽게도 현재는 별도 할인 프로모션은 없네요. 아마도 전시회 중후반이 지나야 할인 티켓이 나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빛의 거장 카라바조와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회 소개합니다.
첫 공간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 아닌 어두운 방안에 창에서 빛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 PROLOGUE
창문에서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을 느껴보세요. 그 빛이 닿는 순간, 강한 그림자를 만들어 내며, 빛과 어둠이 빛는 드라마틱한 공간이 됩니다. 여러분이 서 계신 이 곳은 카라바조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성 마태오의 소명> 속 모티프에서 영감받아 구현한 공간입니다.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상징적으로 쓰이는 ' 빛'과어둠'을 통한 강렬한 명암 대비 효과, 즉. '테네브리즘'을 사용하여 마치 연극 무대의 한 장면처럼 보이게 한 카라바조의 작품 세계를 직접 몸으로 경험하신 여러분은 이제 카라바조의 세계관에 더 깊이 빠질 준비를 제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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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카라바조의 예술적 뿌리를 찾아서
이번 전시회 첫 섹션은 후기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화풍으로부터 더 나아가고자 변화를 꾀하던 화가들을 만나며, 카라바조 작품 세계에 영감을 준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성 바오로의 회심
루드비코 카라치. 1587
이번 빛의 거장 카라바조와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회 첫 작품은 카라바조와 동시대 활동하며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 안니발레 카라치의 사촌 형, 루드비코 카라치가 그린 '성 바오로의 회심'입니다. 이 작품의 원작은 볼로냐 국립 회화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작품은 유대인을 핍박하던 사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순간을 담고 있는데요, 유대교회당에서 기독교인을 체포할 수 있는 허가를 받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던 사울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에 눈이 멀어 땅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메시아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이후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도하는 일에 헌신하는 삶을 삽니다.
이 작품에서는 16세기 이탈리아 북부 거장들의 고전주의와 이탈리아 남부 베네치아 색채주의에서 발견되는 절제된 빛 표현이 잘 나타납니다. 또한, 우아하면서도 밝은 그림을 그리는 루드비코 카라치의 전형적인 작업 방식을 그대로 드러내는데요, 사울이 입고 있는 옷과 말의 풍성한 꼬리 묘사 등 섬세한 표현과 풍부한 색채의 질감, 화면을 가득 메우는 역동성은 카라바조에게 영향을 주었고, 훗날 카라바조가 '성 바오로의 낙마'를 그릴 때이 작품을 참고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프란체스코 바사노. 1586
프란체스코 바사노는 베네치아 색채주의의 영향을 받아 따뜻한 색감과 풍부한 붓질로 섬세한 표현을 자랑하는 화가입니다. 시골 야외에 펼쳐진 풍경 아래 농민과 사냥꾼, 목동, 어부 등 소박하지만 품위 있는 도시민의 일상을 즐겨 그렸는데요. 구름 낀 하늘 아래 언덕이 펼쳐져 있고, 벽난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요리 준비에 분주한 농장 마당을 배경으로 바사노는 인물화와 풍경화가 결합된 내러티브를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두터운 물감 층, 인물의 섬세한 묘사, 따뜻한 색조의 사용과 명암을 강조하는 방식 등 그의 전형적인 작업 스타일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루카의 복음서 10장 38절에 기록된 베다니아의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의 집을 방문한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분주하게 손님 접대를 준비하는 마르타가 일손을 돕지 않는 동생 마리아를 향한 불만을 표출하자 예수께서 그녀를 꾸짖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이렇듯, 작품은 각자 역할과 책임에 대한 교훈을 전달합니다. 이는 북유럽 미술에서 유래한 기법의 일환으로, 시골과 도시의 일상을 담은 장면을 통해 복음서의 이야기, 속담, 도덕적 교훈을 담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인데요, 이러한 사실적인 묘사 기법은 롬바르디아에서 활동하던 젊은 카라바조에게도 알려지면서 그가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 2. 카라바조와 거장들의 작업실
강렬한 느낌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번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빛의 거장 카라바조와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회' 는 70여점의 작품을 6개의 섹션으로 구분하고 각 섹션별로 상당이 여유있게 작품 감상이 가능하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고 편하게 감상했다는...
성 체칠리아
안티베두토 그라마티카 1620.
안티베두토 그라마티카는 카라바조의 양식을 따랐던 화가입니다.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강렬한 명암 대비와 사실적인 인물 묘사는 그라마티카의 인물화에서도 자주 활용되었습니다.
그라마티카는 음악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주요작으로 평가받는 '성 체칠리아'는 음악의 수호성인 체칠리아가 오르간 건반 앞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라마티카는 고전적이고 차분한 모습과 성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음악의 상징물로서 오르간이나 악보를 함께 그려 넣었습니다. 또한 터번으로 머리를 감싸 올려 노래를 읊조리는 듯한 입 모양이 더욱 돋보이게 표현한 점이 눈에 됩니다.
앞서 만났던 시모네 페테르차노의 경우처럼, 이 시기의 회화는 종교적 장면을 보다 현실감 있고 감정적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작품 역시 작품 속 성녀의 표정과 몸짓를 보다 극적으로 묘사하면서 그녀의 내면적 경건함과 순수한 신앙심을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성전 봉헌
시모네 페테르차노.1588.
카라바조의 스승이었던 시모네 페테르차노의 제단화 '예수의 성전 봉헌'입니다. 작품은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아기 예수를 성전에 처음으로 봉헌하고 있는 순간을 그린 것인데요, 제의를 입은 사제는 성모 마리아의 팔에 안긴 아이를 받으려 하고 있고, 이 장면을 요셉과 다른 이들이 곁에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화면의 하단에는 제물로 받쳐질 비둘기 두 마리를 들고 있는 젊은 여성과 한 소년이 서 있습니다.
신선하고 다채로운 색감과 빛을 받은 인물의 뚜렷한 윤곽이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엄숙함과 경건함이 전반적으로 밝은 분위기 속에 펼쳐지고 있는데요, 스승 티치아노의 혁신적인 색채 사용과 붓질의 질감, 베네치아 색채주의의 영향을 받은 페테르차노는 이 작품에서 파울로 베로네세의 고전적 건축미와 파리 보르도네의 온화한 인물 묘사를 능숙하게 융합하였습니다. 단순한 구성을 취한 이면에는 카를로 보로메오 추기경이 밀라노 공국에서 주도한 반종교개혁의 엄격한 교리에 부응해야 했던 시대적 요구가 깔려 있습니다. 그 결과, 작품은 고요하고 상징적이며, 시대를 초월하는 품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매너리즘적 우아함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당시 종교 의식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탁월함을 보여줍니다. 특히 인물들의 생동감 넘치는 묘사와 성스러운 분위기를 현실감 있게 담아내어 종교적인 감동을 강조하는데요, 이와 같은 특징은 페테르차노가 추구했던 현실적 회화의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으며, 이후 카라바조가 자신의 스타일을 형성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애도
주세페 체사리(카발리에르 다르피노). 1610
당시 화가라면 한 번 이상은 그려봤을 소재의 작품. 느낌이 묘해서...
|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빛의 거장 카라바조와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회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입니다.
작품에 대한 설명이 너무 작고 작은 글씨로 부착되어 있어, 사실상 읽어보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거의 코가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가야 보이네요.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히 불편과 불많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디오 가이드는 필수가 되었네요.
| 3. 정물화의 변모
카라바조의 초기작인 '과일바구니'를 시작으로 정물화는 하나의 장르'로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종교화나 초상화에서 배경으로만 사용되던 정물을 독립적인 주제로 다룬 것은 당시에 매우 혁신적인 방식이었으며, 이로 인해 카라바조는 오늘날 정물화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
카라바조.1595
작품은, 곱슬머리 소년이 도마뱀에게 손가락을 물려 깜짝 놀란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년은 놀라움과 아픔에 몸을 뒤로 젖히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회화와는 달리, 카라바조만의 독창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순간적 감정과 반응을 사실적으로 포착해 관객이 그순간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듭니다. 단순한 초상화나 장면을 그린 것 이상의 접근법으로 일상의 순간에 내재된 감정적인 드라마를 부각시키고 있죠. 또한, 카라바조는 어두운 밑바탕 위에 음영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물감 소모를 줄이면서도 깊이 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빛을 활용하는 방식도 인상깊은데요, 유리병에 비친 창문 밖 밝은 풍경과 어두운 실내로 들어오는 강렬한 빛은 순간의 긴박함과 감정의 고조를 끌어올리는 조명 효과 역할을 합니다. 한편,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과 꽃들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붉은 체리는 사랑과 다산의 기쁨을, 장미 줄기의 가시는 사랑의 고통을, 특히 도마뱀은 유한한 인생과 덧없음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의 다른 두 가지 버전은 피렌체의 로베르토 롱기 미술사 연구재단과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세 작품을 비교해 보면, 작품의 구도는 비슷하지만, 도마뱀이나 소년의 볼과 입술의 붉은 정도, 체리의 색 등 디테일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이 작품의 경우, 소년의 눈 아래 눈물이 맺혀 있지만, 다른 두 버전에서는 눈물이 거의 보이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래는 작년 영국내셔널갤러리 특별전에서 만난 카라바조의 같은 듯 다른 작품
아니 확실히 다르다!
배가 있는 정물화
페데 갈라치아. 1605
페데 갈라치아는 미니어처 화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정물화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작가입니다. 여성 화가였던 탓에 교회나 공공예술 작품의 공식적인 의뢰는 적은 편이었으나 그럼에도 지성인들, 예술가들과의 관계가 활발했던 그녀는 밀라노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 및 스페인 귀족들과 교류하며 활동했습니다. 정작 그녀가 두각을 보인 것은 인물화나 종교화가 아닌 자연의 사물들을 그리는 것이었는데요, 카라바조의 '과일바구니'에 깊이 매료된 그녀의 정물화는 자신만의 정물화 특징을 지닙니다.
과일 껍질을 벗기는 소년
카라바조. 1595
카라바조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작품은 정물화와 인물화를 결합한 대표적인 예로, 조심스럽게 과일 껍질을 벗기는 단순한 일상적 행동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된 작품입니다. 사색에 잠긴 듯한 표정의 소년 주위로 빛과 어둠의 대조가 감정의 깊이를 더해 줍니다.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과 같이 왼쪽에서 대각선으로 흐르는 강렬한 빛과 그림자의 극적인 대비는 키아로스쿠로의 초기 사례를 보여줍니다.
또한 이 작품은 카라바조가 이후 발전시켜 나갈 자연주의적 화풍을 엿볼 수 있는 주요 초기작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당시 전통적인 이상화된 그림과 달리 일상적인 인물의 감정을 포착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과일과 소년의 모습이 이후 그가 이끌어낼 정물화 장르의 발전에 기여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입니다.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과 마찬가지로 과일은 생명, 유한함, 혹은 인간의 덧없음을 상징합니다.
어린 바쿠스에게 와인을 주는 실레노스
술의 신 바커스는 실레노스(현자이자 물의 요정)에게 포도주를 양조하는 법을 배웠다고 신화에서 그러는데...
이번 빛의 거장 카라바조와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회에서 느김 좋았던 그림 중 한점
| 4. 온건한 고전주의
고전주의 미술(Classicism)은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유럽 미술에서 나타난 주요한 예술 사조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과 문화에서 영향을 받아 정제된 아름다움과 이상적인 비례, 균형, 조화, 이성적 표현을 강조한 특징을 지닙니다. 고전주의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의 이상을 계승하면서도, 바로크와 로코코 같은 화려하고 감성적인 스타일에 대한 반발로 발전하였습니다.
성 카를로 보로메오
카를로 사라체니. 1612~1615
카를로 사라체니(Carlo Saraceni, 1579–1620)는 이탈리아의 바르크 예술가이자 초기 바로크 화가로, 특히 로마에서 활동한 화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바르크 미술 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강렬한 명암 대비와 사실적 표현을 특징으로 했습니다.
사라체니는 카라바지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나, 그의 작품에는 카라바조와는 다른 섬세함과 감성적인 면이 강조된 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카라바조의 작품들이 종종 강렬한 드라마와 충격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었다면, 사라체니는 조금 더 정제된 감정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로마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카라바조와 비슷한 방식으로 감정을 강하게 전달하면서도, 더 우아한 기법과 디테일을 보였습니다.
황홀경의 성 프란체스코
귀도레니. 1625
귀도 레니(Guido Reni, 1575–1642)는 이탈리아의 바로크 시대 화가로, 특히 로마와 볼로냐에서 활동한 중요한 예술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바로크 미술의 대표적인 스타일 중 하나로, 우아함과 감성적인 표현, 그리고 세밀한 기법을 강조하며, 카라바조의 극적인 명암 대비와는 대조적으로 보다 부드럽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습니다.
다친 탄크레디를 발견한 에르미니아
구에르치노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인 토르콰토 타소의 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속 중요한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에르미니아와 바프리노가 전투에서 부상당해 쓰러져 있는 탄크레디를 발견하고 그를 돌보는 장면을 그린 이 작품은, 등장인물의 생동감 았는 포즈와 그들의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며, 바로크 특유의 극적인 사실주의를 잘 보여줍니다.
에르미니아, 탄크레디, 바프리노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보이는데요,구에르치노는 타소의 서사시가 가진 장엄한 내러티브를 화폭에 담아 등장인물들의 감정과 서사적인 긴장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특히 에르미니아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작품의 비극적인 분위기를 더욱 부각시키며, 인물들의 감정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을 포착해 보는 이를 매료시킵니다. 여기에 더해, 자연의 요소인 구름, 안개, 식물들이 인물의 감정과 어우러지며 자연과 인간 감정의 조화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가족과 아기 성 세례자 요함
안니발레 카라치. 1595
우선, 섬세하게 그려진 이 작은 크기의 우아한 '성가족과 아기 성 세례자 요함'은 안나빌레 카라치가 로마 활동 시기에 몬탈토 추기경을 위해 제작한 것입니다. 라파엘로의 '참나무의 성모'를 재해석한 작품으로서 양식적인 우아함, 라파엘로와 코레지오를 연상케 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가족들 간의 일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고전적인 분위기로 연출하는 가운데, 성스러우나 친밀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담고 있습니다.
| 5. 카라바조의 동료와 대립자들
시기와 질투가 서로를 발전시키기도 하지만, 대부분 파멸로 끝나는...
묘하게도 이번 섹션에 전시된 작품들의 내용들도 그러하다.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
토마소 살리니.1620.
발리오네와 마찬가지로 토마소 살리니 역시 카라바조와 갈등을 빛은 인물입니다. 전통적인 이상화된 미적 기준을 따르던 살리니에게 카라바조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적 접근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특히 카라바조가 성경 속 인물을 현실적이고 거칠게 묘사한 것에 대해 살리니는 큰 반감을 가지고, 카라바조와 대립한 작가들과 그를 향한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는데요
이번 전시에 만날 수 있는 토마소 살리니의 작품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재판 과정 중 참혹했던 마지막 단계의 모습을 묘사한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를 법정 안뜰로 호송한 로마의 병시들이 다른 사람들을 불러모은 뒤 예수에게 왕족들에게만 허락된 자주색 옷을 입혀 그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운 다음, 지팡이를 손에 쥐게 하고 "유대인의 왕이시어, 만세!" 라며 조롱했습니다.
작품을 가까이서 살펴보면, 폐쇄적이고 어두운 감옥을 배경으로 잔인한 고문자와 반쯤 발가벗겨진 고통받는 메시아 신체 일부에만 반사된 빛이 실내를 밝히고 있습니다. 고문자의 냉담한 분위기와 체념한 듯한 예수의 표정이 침묵 속 가해자와 희생자 사이의 불편한 감정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얼굴과 옷주름의 사실적인 묘사와, 키아로스쿠로가 잘 드러나는 빛과 어둠의 명암 대조 등을 통해 그가 카라바조 화품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손과 데릴라
조반니 발리오네. 1625
조반니 발리오네(Giovanni Bellini, 1430년경 – 1516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으로, 주로 베네치아파의 중요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베네치아 미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가 남긴 작품들은 예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특히 그의 작품은 빛과 색에 대한 독창적인 접근법, 섬세한 감정 표현, 그리고 인물 묘사에서 높은 수준의 기술을 보여줍니다.
초기에는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아 그의 화풍을 따르기도 했으나, 카라바조의 비난과 조롱이 두 사람의 관계를 완전히 갈라놓았지요. 결국 발리오네는 카라바조와 젠틸레스키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발리오네는 비평가로서도 활동하며 그의 저서에 카라바조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단순한 예술적 경쟁을 넘어 당시 미술계에서 카라바조의 다혈질적인 성격과 혁신적인 천재성이 전통 화가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반니 발리오네의 작품 '삼손과 데릴라'는 발리오네의 도상학은 구약성서에서 유래한 여성 미덕의 본보기나 교훈을 주는 우화를 그렸는데요, 사사기 16장 19절에 등장하는 삼손과 데릴라의 이야기는 1620년대와 30년대, 특히 이탈리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작품은 무적의 영웅 삼손이 연인 데랄라에게 배신당해 힘의 원천인 머리카락을 잃는 유명한 이야기를 통해 육체의 유혹에 굴복하는 위험을 경고하는 작품입니다.
모욕당하는 그리스도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1605
바로크 회화 예술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여성 화가인 아르떼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아버지입니다. 두 부녀는 모두 카라바조의 사실주의적 표현과 극적인 명암법을 따르는 카라바조 화파로 분류되며, 그의 스타일을 발전시킨 중요 인물로 손꼽힙니다. 특히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는 카라바조와 어울리며 뒷골목 건달들처럼 함께 어울려 다니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예수의 수난의 세가지 순간 중 모욕당하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요, 이 상황은 마르코의 복음서 15장 16절에서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 즉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운 후. '유대인이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경의를 표했다. 그들은 갈대로 그의 머리를 내리치고 침을 뱉으며 무릎끓어 절하였다. 희롱을 마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힌 뒤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다."
작품은 견고한 구성적 바탕으로 통일된 색채 팔레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섬세하게 묘사된 풍경과 치밀하게 처리된 표면이 돋보이며,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듯한 장면의 고요한 분위기는 그리스도의 침묵 속에서 절제된 아름다움을 자아냅니다. 과장된 수사나 불필요한 장식 없이 명료하고 담백하게 이미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 토마스의 의심
카라바조. 1601-1602
작품은 사실주의와 강렬한 명암 대비가 돋보이는 카라바조의 대표작 중 하나로 요한복음 20장 24-29절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가 실제로 토마스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그의 손가락을 상처에 대어 보게 하는 순간을 그린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이 장면을 극도로 현실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성 토마스가 예수의 옆구리에 깊이 손가락을 넣고 그의 상처를 직접 확인하자 놀라움과 의심의 감정을 동시에 내비칩니다. 종교화의 성스러움에 풍속화의 사실주의를 도입한 카라바조의 대담한 화풍이 마치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생생하게 표현되었고, 강렬한 명암 대비로 예수의 신성한 존재감과 인간적인 상처가 강렬하게 대비됩니다.
이 그림은 예수 부활 이후의 장면을 그린 작품으로 카라바조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많이 복제되고 모방된 것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17세기에 이미 20개 가량의 복제본이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요, 이 시리즈의 원형이 되는 작품은 독일 포츠담에 위치한 산수치 궁전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1922년 재발견된 우피치 미술관 소장본은 1666년 카를로 데 메디치 추기경의 유품 목록에 "성 토마스가 그리스도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는 장면이 묘사된 네 명의 인물이 있는 그림"이라는 설명과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피치미술관 소장본은 원형으로 추정되는 포츠담의 작품과 크기가 같고, 회화의 예술적 품질이 매우 높아 카라바조 양식으로 제작된 뛰어난 복제본이라 평가되고 있습니다. 특히 빛과 인체의 해부학적 표현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며, 포츠담 작품과 매우 유사하지만, 그리스도의 머리카락 표현 같이 몇 가지 작은 차이점 또한 존재합니다.
이어서 예술의 전당 '빛의 거장 카라바조와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회' 마지막 이자 가장 넓은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 6. 카라바조의 유산과 카라바조주의자글
만약 카라바조가 조금만 더 바른생활?을 하고 장수하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면,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보다 더 유명하고 뛰어난 작품을 남겼을까?
결국 자기관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마지막 섹션에서는 현대 회화의 길을 개척한 카라바조의 영향력은 로마와 이탈리아를 벗어나 전 유럽으로 확대되며 글로벌 현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테오도르 롬바우츠, 페드로 누네스 델 발레, 마티아 프레티, 루카 조르다노, 지아키노 아세레토 등 젊은 카라바조주의자들이 로마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번 섹션은 카라바조의 영향력과 그가 남긴 예술적 유산을 조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체포
카라바조. 1602.
로마에서 카라바조의 후원자인 마테이 가문의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카라바조는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그리스도의체포>와 <묵상하는 성 프란체스코>를 그리게 되는데요, 우피치미술관의 소장품 <그리스도의 체포>를 살펴보면, 이 작품은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유다의 배신으로 본디오 빌라도의 로마 병사들로부터 체포되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두운 배경 위로 병사들의 붉은 망토와 그들이 입고 있는 튜닉과 바지에서 보여지는 세 가지 붉은 톤이 눈길을 사로잡는데요, 플랑드르 바탕처리된 캔버스에 철과 납, 망간을 섞은 벽돌색과 주홍색을 기반으로 한 컬러 팔레트와 윤곽을 이루는 엠버 계열의 갈색 안료의 강한 색채 대비가 인물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아스팔트와 석탄을 사용해한 얇은 색조를 덧입히는 베일링 기법을 통해 배경의 흙과 갈색 그을음과 자연스럽게 섞이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망토 부분에는 오래된 세척제가 용해되면서 생긴 청금석이 유리화된 흔적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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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왼쪽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인물은 성 요한 복음사가입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서 등불을 들고 체포 장면을 바라보는 인물이 성서에 등장하는 말쿠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인물은 카라바조의 자화상으로 추정됩니다. 최근 복원 작업을 통해 덧칠한 부분이 제거되면서 이 자화상의 증거가 다시 드러났습니다.
무엇보다도 작품은 카라바조의 극적이고 독창적인 스타일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는 고요하면서도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반면, 예수를 배신하는 유다는 강조되어 있고, 주변 병사들은 긴장감과 폭력성을 드러냅니다. 카라바조는 이 작품을 통해 배신, 고뇌, 인간의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묵상하는 성 프란체스코
카라바조. 1603
이 작품은 프란체스코회 성인들의 전통적 도상학을 따르고 있습니다. 가령, 성인이 기도와 묵상을 즐겨 했던 동굴의 바위를 배경으로 설정하고, 화면 앞쪽에 성인을 배치하고, 그의 머리위에는 성스러움을 상징하는 후광을 그려 넣었습니다. 성인은 에수의 처형을 상징하는 나무 십자가 옆에 무릎을 끓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성인이 손에 든 해골을 응시하는 모습은 카라바조만의 독창적인 도상적 발명으로, 해골은 죽음을 상징하며 "메멘토 모리" 즉,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라는 라틴어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의 고독한 형상은 신상한 빛에 휩싸여 마치 은둔지의 어둠속에서 떠오르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갈색 계열로 단순화된 색조는 프란체스코의 얼굴, 해골, 그리고 바위 위에 놓인 십자가를 비추는 강렬한 빛과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상징물들은 성 프란체스코의 삶과 가르침을 전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란체스코회 주제의 그림들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특히 인기를 끌었는데요, 당시 유럽을 휩쓴 포르테스탄트 종교개혁 운동과 가톨릭 반종교개혁 간 갈등과 연관 지어져, 신앙을 강조하고 교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으로서 사용되었습니다.
빛의 거장 카라바조와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회 마지막 섹션공간의 배치
마치 유럽의 미술관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작품 하나하나 방해받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성 로렌초와 성 프란체스코가 있는 예수 탄생
파울로 제라치, 1627-1628
파울로 제라치는 화려한 색감과 대규모의 인물 배치로 유명한 16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카라바조의 화풍을 계승한 화가 중 한 명입니다. <성 로렌초와 성 프란체스코가 있는 에수 탄생>은 제라치가 카라바조의 동명의 작품을 복제한 후 제작한 작품으로 '성탄'을 주제로 아기 예수가 마구간에서 태어나는 순간을 그린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 원본은 1969년 팔레르모의 성 로렌초 기도실에서 발생한 도난사건 이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번 빛의 거장 카라바조와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회에 전시된 이작품은 전문용어로 짝퉁이라고 한다.
카라바조의 화풍을 계승한 대표 작가인 제라치는 이 작품에 강한 명암 대비 기법인 카라바조의 테네브리즘을 통해 어둠속에서 인물들을 뚜렷하게 부각시킵니다. 특히 빛이 예수에게 집중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 신성한 느낌을 강조하고, 주변 인물들은 그 빛에 의해 부드럽게 드러나며, 작품의 중심에 예수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와 성모, 요셉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이 둘러싸고 있는 역동적인 인물 배치가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데요.
특히 가난과 겸손, 자연과의 조화를 상징하는 성 프란체스코와 초기 기독교 순교자로서 희생과 신앙을 상징하는 성 로렌초를 함께 배치하여, 예수의 신성과 인간성을 강조합니다. 무엇보다도 직품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제라치 특유의 색감과 더불어 시각적으로 풍부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전시장 마지막 부분 지친 관람객을 위한 의자가 배치되어 있는데. 모조품 앞에 설치된 부분은...
성 세바스티아노
카라바조. 1606
성 세바스티아노는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순교자입니다. 많은 화가들이 그를 주제로 작품을 남겼는데요, 카라바조는 이 작품 성 세바스티아노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 즉 순교의 순간을 빛과 명암을 대비를 활용해 강렬하게 포착했습니다. 정면으로 떨어지는 강한 빛으로 성 세바스티아노가 자신이 순교 당할 것임을 깨닫는 순간을 마치 사진처럼 생생하게 담아 냈습니다.
작품은두명의 부하가 그의 손과 발을 나무에 묶고 있는 가운데, 그의 몸에 첫 번째 화살이 꽃히는 순간을 묘사합니다. 이때 성인은 화살을 향해 고개를 떨구고 있죠. 얼굴은 고통과 놀라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심하게 일그러졌습니다. 드라마틱한 빛을 마치 조명처럼 사용하여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저는 이번에 전시된 카라바조 작품 중에서 가장 느낌이 좋았던 두 점 중 한 작품...
여기서 우리는 카라바조가 이 처형 장면에 처형인을 등장시키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처형인이 화면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카라바조가 관객인 '우리'에게 그 처형인의 자리를 넘겨 주었기 때문이지요. 카라바조 작품의 특징은, 마치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한 분위기와 감정을 전달하는 것인데, 마치 무대연출을 위해 작품의 구도와 조명을 세팅한 것처럼, 관객인 우리를 성 세바스티아노가 묶여 있는 공간으로 끌어 들이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관객이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작품의 일부로 직접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지요. 성 세바스티아노가 고통받게 하는 가해자이자 작품에서 보이지 않는 등장인물인 처형인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아브라함과 세 천사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654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 예술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여성 화가입니다.또한, 우리가 앞서 만났던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딸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카라바조의 극단적인 명암 대비와 사실적인 인물 묘사를 이어받아, 극적인 구성과 강렬한 감정 표현을 작품에 녹여내며, 17세기 당시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굳혔습니다.
그녀는 주로 성경 이야기나 고대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녀가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에서 작업실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며 일련의 작품 제작 시스템을 갖춘 공방으로서 입지를 다져가던 무렵, 그녀의 작업실에는 재능 있는 젊은 작가들이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그 중 한명인 오노프리오 팔룸보와 협력하여 '아브라함과 세 천사'를 제작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구약성서 창세기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아브라함이 세 명의 천사를 환대하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젠틸레스키의 감정적이고 역동적인 인물 표현과 팔룸보의 세밀한 배경 묘사가 잘 어우러 지는데요, 천사들의 신성한 모습과 아브라함의 경건한 자세가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루트를 연주하는 자화상
테오도르 룸바우츠. 1625 - 1630
플랑드르 출신의 테오도르 룸바우츠는 자칭 카라바조의 추종자라고밝힐 정도로 카라바조 화풍을 계승한 대표적인 카라바제스키, 즉 카라바조주의자입니다. 특히 카라바조의 명암 대비 기법과 극적인 조명 활용, 시실적인 인물 표현에 많은 영향을 받은 롬바우츠는 인물의 감정과 사건의 드라마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일상의 장면을 주로 그렸는데요, 카라바조의 테네브리즘과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을 결합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확립했습니다.
전시에 소개하는 '루트를 연주하는 자화상'은 그가 가장 많이 다룬 주제 중 하나이자 17세기 플랑드르 지역에서 유행하던 음악을 테마로 그린 작품입니다. 이 시기 네덜란드 회화에서 흔히 나타나듯, 아이러니와 패러디는 더 깊은 의미를 숨기면서도 관객을 매료시켰습니다.
작품에서는 악기를 조율하고 있는 자신을 거친 군인 병사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데, 조율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 같지 않다는 것을 그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악기의 줄 하나하나와풍부한 광택을 지닌 울림판, 그리고 줄을 튕기며 연주하고 있는 손을 정밀하게 묘사하며 놀라운 사실감을 통해 운율감을 전달합니다.
조롱 당하는 예수
마티아스 스톰 (Matthias Stom)**은 17세기 네덜란드의 바로크 화가로, 특히 종교화와 초상화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입니다. 그의 작품은 어두운 배경과 강한 빛의 대비를 특징으로 하며, 이는 바로크 미술의 특성을 잘 반영합니다. 마티아스 스톰은 카라바지오의 영향을 받은 카라바지오파 화가 중 한 명으로, 사실감 넘치는 인물 묘사와 드라마틱한 빛과 그림자의 사용으로 유명합니다.
마티아스 스톰은 카라바지오의 영향을 받아 강렬한 자연주의적 미술을 그렸으며,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특히, 그의 빛과 그림자 사용은 그 시대의 미술에서 중요한 발전을 나타냅니다. 그는 비교적 작은 경력과 활동 범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이 그 후 바로크 화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많은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특히 카라바지오파 화가로서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요게 카라바조 작품이라고?
기도하는 성 성 예로니모
익명의 촛불화 거장
1960년, 연구를 통해 일련의 작품들을 하나로 모아 소위 '익명의 촛불화 거장'으로 불리는 북유럽 출신의 화가의 존재를 찾아냈습니다. 인공적인 빛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으면서도 비일상적 소재들을 반복적으로 작품에 활용했던 이 익명의 작가는 시적이면서도 아주 어두운 경향을 띄며 등장인물들 곁에 정물이 함께 놓이기도 하는 작품들을 주로 그렸습니다.
성 예로니모는 교회의 신부이자 문법, 수사학, 철학에 조예가 깊었던 학자였습니다. 칼키스에서 은둔자로 3년간 지내며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연구하던 그는 전갈이나 야생동물과 함께 지내며 성서를 읽고 기도하고 가슴을 돌로 치는 행동을 하며 참회의 삶을 살았습니다.
작품은 금욕적인 성 예로니모의 연구실, 왼쪽에 쌓인 책더미 위로 놓인 단 하나의 촛불로 밝히는 신비로운 장면을 보여줍니다. 매우 유연하고도 밀도 있는 물감 층이 돋보이는 가운데 십자가 앞에서 손 사이로 두개골을 꼭 쥐고 기도하고 있는 성 예로니모의 늙은 몸을 비추는 부드러운 빛에 따라 그림자도 따라 뚜렷해집니다. 예로니모의 손에 들려 있는 해골은 덧없음을 상징하는 네덜란드 정물화의 바니타스의 주요 상징을 떠올리게 합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카라바조. 1606
이 작품은 1606년경 보르게세 추기경의 의뢰로 카라바조가 제작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보르게세 미술관의 소장 기록에 따르면 카라바조는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을 두 점 그리는데, 하나는 현재 보르게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다른 하나가 이번 전시에 소개하는 개인 소장 작품입니다. 두 버전은 스타일 면에서 뚜렸한 차이를 보이는데요, 두 작품 모두 같은 주제와 구도, 동일한 구성을 지녔지만, 완성도 면에서는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이 더 뛰어납니다. 보르게세 작품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이지요.
한편, 이 작품에 수정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다윗의 오른쪽 눈이 이전 스케치를 덮고 그려졌다는 점, 목선의 윤곽이 여러 번 수정된 점, 그리고 본래의 도안보다 커진 코의 형태 등이 카라바조가 다윗의 머리 방향을 처음에는 다르게 설정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다윗이 잘린 머리를 들고 있는 왼손에서도 초기에는 손가락 전체가 다른 방식으로 그려졌으며, 손목 역시 수정된 흔적이 보입니다. 원래 손이 더 오른쪽에 있었고, 다른 각도로 돌려져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왼쪽 팔뚝에도 어두운 곡선 형태의 수정 흔적이 나타나는데, 이는 골리앗의 머리카락이 더풍성하게 그려졌음을 보여주죠. 즉, 처음에는 골리앗의 머리가 더 크게 묘사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골리앗의 입 역시 눈에 띄게 수정되었는데, 초기에는 입이 더 크게 표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카라바조를 연구하는 이들은 피가 흐르는 골리앗의 잘린 머리가 카라바조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은 단순한 회화적 표현을 넘어, 작가 자신이 이미지에 내면적 투영을 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젊은 시절 자신이 지은 죄, 특히 다윗의 겸손함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교만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자각하고 늙고 목이 잘린 골리앗에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킨 자기 고백의 일환으로 이 작품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카라바조 작품은 도록이나 인터넷에서 본 것보다. 실 작품으로 본 느낌이 더 별로... 약간 실망의 그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이 뽑는사람
카라바조. 1608
작품에서는 12-14세기 의학서의 삽화에서 찾아볼 수 있을 만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이는 16세기 초 플랑드르 화가들이 묘사한 치과 치료 장면을 재해석한 것인데요, 어두운 벽을 배경으로 8명의 인물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고, 화면의 중앙에는 갈색 머리에 콧수염이 있는 치과의사가 펜치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습니다.
환자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고, 입에서는 피가 흘러내립니다. 환자의 표정은 고통과 불안감을 느끼게 하며, 치과의사의 태도는 전문적이지만 동시에 냉정한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렇듯 카라바조는 인물 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하여, 환자의 고통과 치과의사의 집중력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이들의 생동감 넘치는 몸짓과 표정, 현실감 있게 그려진 치과의사의 손에 들린 도구, 구경꾼들이 모여 있는 화면의 배치, 극적인 조명의 사용 등이, 보는 우리로 하여금 작품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며 현장의 긴박함과 불편함,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감정에 공감하게 합니다.
| 연표와 멀티미디어 공간
빛의 거장 카라바조와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회 작품 전시가 끝나고 전시장 마지막은 작가의 연표와 이번 전시회에서 만나보지 못한 카라바조의 다른 작품들이 멀티미디어로 재생되고 있습니다.
1571년 출생 1610년 사망 40살을 넘기지 못하고 다이 하심
참고로 미켈란젤로는 88세에 사망
카라바조의 다양한 도록들이 전시되어 있고. 양초는 어떤 의미인지는 잘...
물론 진짜 양초는 아니다. 불나면 어쩌려고...
그리고 벽면에서 카라바조의 작품들이 디지털로 재생되고 있다.
이중에서도 카라바조의 메두사는 진품을 꼭 보고 싶다는...
| 아트샵과 도록
이번 카라바조 전시회 도록은 55,000원. 느낌에는 도록 가격은 살인적인 물가 상승률보다도 더 오르는 것 같다.
다소 아쉬운 부분은 이번 '빛의 거장 카라바조와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회 아트샵에서 만날 수 있는 기념품은 구성이 다소 아쉽네요. 확 느낌이 오는 그런 기념품이 없다는...
12월 날 잡아서 하루 예술의 전당 데이트 추천
2주 후인 11월 30일에는 카라바조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반 고흐 전시회도 열립니다. 오전에는 카라바조 전시회 보고 맛점 하고 오후에는 고흐 전시회 보는 것도 하루 데이트 코스로 좋을것 같네요.
TGI프라이데이스는 1992년 국내 상륙했고 베니건스, 씨즐러, 마르쉐, LA팜스, 플래닛 헐리우드, 데니스 등 정말로 여러 패밀리 레스토랑들과 경쟁하고 있었는데요. 최근 대부분이 브랜드가 국내에서 철수 하고 몇 곳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신기하게 지하철 2호선 잠실역 근처에는 잠실롯데백화점 잠실점, 잠실롯데백화점, 골드캐슬점까지 무려 세 곳이나 있는데요. 오늘은 TGIF 롯데캐슬 잠실점 중심으로 3곳 장단점을 알아봅니다.
| 잠실 TGIF 위치 및 장단점
1, TGIF 롯데캐슬 잠실점 주차 및 위치 : 가장 추천
T.G.I프라이데이스 롯데캐슬 잠실점은 지하철 2호선 8번 출구와 연결되어 있는 잠실 롯데캐슬 골드 2층에 위치해 있습니다. 롯데캐슬 잠실점 주차는 건물 지하 주차장을 이용하면 되는데요. 주말에도 주차 대기 없고, 향상 주차장에 여유가 있습니다. 입차부터 주차까지 5분 전후면 끝...
TGIF 잠실 롯데캐슬 주차장입구, 한 번도 주차에 어려움을 겪은적 없다는...
2, TGIF 롯데백화점 잠실점 주차 및 위치 : 주차 혼잡
T.G.I 프라이데이스 롯데백화점 잠실점은 잠실 롯데백화점 11층 식강가에 위치해 있습니다. 시설은 다소 올드하지만 식사에 큰 어려움은 없네요. 다만 두 가지 큰 단점이 있는데요.
| 주차와 혼잡은 큰 단점
하나는 바로 주차입니다. 특히 주말에는 잠실 롯데백화점 주차에는 30분 이상 소요되는 경우가 빈번한데요. 주차장 진입도 어렵고 진입후에도 주차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또한 주차후에 지하 주차장에서 11층 FGIF까지 올라가는 것도 편하지는 않습니다. 백화점 쇼핑 일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TGIF 방문이 주 목적이라면 이곳 잠실 롯데백화점 TGIF 추천 드리지 않습니다. 주차 위치에 따라서는 한참 걸어야 하는...
3, TGIF 롯데월드점 : 혜택 없음
T.G.I 프라이데이스 롯데월드점은 잠실 롯데월드 입구쪽에 위치해 있는데요. 우선 롯데월드 입장하지 않는다면 이용이 불가합니다. 또한 신용카드할인이나 통신사할인 등 TGI프라이데이스 혜택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꼭 TGIF를 방문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심지어 식전 브래드도 안 줌...
잠실에서 가장 추천드리는 TGIF 지점인 롯데캐슬 잠실점 소개합니다.
위치는 캐슬플라자 잠실 2층에 위치해 있고요 영업시간은 11:30 ~21:00 까지 운영합니다. 라스트오더는 20:00. 휴일은 없습니다.
실내는 여유 있고 깔끔합니다. 또한, 창밖으로 잠실롯데백화점과 롯데월드몰, 타워의 경치를 보면서 식사할 수 있는데요. 특히 연말연시에는 백화점과 타워 건물 사이니지 등을 통해 상당히 멋있는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식사의 또다른 재미를 주네요.
TGIF 메뉴 확인 및 주문은 테이블에 있는 태블릿을 통해 확인과 주문이 가능합니다. 결제는 나가시면서...
| 식전 브레드 & 시나몬 버터
항상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와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한동안 식전빵이 나오지 않다가 작년 부터 다시 식전브레드와 시나몬 버터가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역시 식전빵은 아웃백이 짱인 듯...
시그니처 글레이즈드 립세트 3인 주문
저희는 4명이 방문 했는데요. 우선 3인 세트메뉴와 단품메뉴 주문했습니다. 참로고 TGIF 세트메뉴는 신용카드 할인이나 통신사 할인, 엠클럽 쿠폰 등의 프로모션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 탄산음료
세트 메뉴는 탄산음료가 기본입니다. TGIF 탄산음료 가격은 4,400원인데, 다른 음료를 주문하면 차액이 청구 됩니다. 딸기라임에이드, 트로피칼러너, 레몬에이드를 주문했는데요. 에이드는 1,100원 추가 트로피칼러너는 3,100원 추가요금이 청구됩니다.
바나나, 파인애플, 피나콜라다 믹스된 트로피칼러너 가격은 7,500원 맛은 있지만 가격은 쎄네요.
| 오늘의 스프
스프는 별도 선택없이 오늘의 스프 3종이 나오네요.
| 콥샐러드
TGIF 샐러드는 치킨 시저 샐러드, 하베스트 망고 치킨샐러드, 케이준 프라이드 치킨 샐러드, 콥 샐러드 4종이 있는데요. 3인 세트메뉴에서는 이중 샐러드 하나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제품 가격차이에 따른 금액 차감은 없습니다.)
콥 샐러드는 다양한 재료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미국 스타일의 샐러드로 1937년 미국 LA 헐리우드의 한 레스토랑에서 늦은 밤 남은 재료들을 활용하여 만들어진 것이 시작이라고 하는데요. 소스와 함께 다양한 식감을 맛볼 수 있어 제가 좋하는 메뉴 중 하니입니다.
| 시그니처 글레이즈드 립
강한 바베큐 소스로 만든 바베큐 폭립입니다. 사진은 2인 메뉴인데요. 소스와 캐첩 그리고 코온슬로가 나옵니다.
감자튀김이 같이 나오네요. 감자튀김은 기름기기 좀 있지만 맛있게 잘 먹었다는...
TGIF 시그니처 글레이즈드 립 폭립은 크기는 커 보이지만 고기가 많이 붙어 있지는 않았네요. 다소 아쉬운 부분...
느끼느끼 하다보니 피클 부탁 드립니다. 기본으로 나오지는 않는데요. 요청하면 친절하게 많이 주시네요.
참고로 TGI프라이데이스 만족도 조사 이벤트에 참여하면 아메리카노 한잔 무료로 받을 수 있습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모두 가능합니다.
| 빠네 크림 파스타
TGIF 3인세트메뉴에는 파스타 또는 라이스 중 하나 선택이 가능합니다. 저희는 빠네크림 파스타 주문했습니다. 고소한 크림소스와 파마산 치즈가 얹어진 빠네크림 파스타.
맛있게 잘 먹었는데, 빵은 다소 뻣뻣함이 강했고 크림소스 양이 다소 아쉬운...
| 케이준 치킨 슈림프 파스타
세트메뉴를 먹다 보니 TGIF 할인 또는 추가 프로모션을 받지 못하네요. 약간 억울하기도 하고 4인이 먹기에 부족해서 메뉴 하나 추가합니다. 추가로 김치 아보 필라프를 먹으려고 했다가 가격인 19,000원 대여서 프로모션 조건에 맞지 않아 주문한 메뉴 케이준 치킨 슈림프 파스타 가격은 22,900원. 약간 맵다고 했는데 맵지 않아요.
| 시그니처 글레이즈드 치킨
요녀석은 TGIF 맴버 가입하고 웰컴 바우처로 받은 시그니처 글레이즈드 치킨입니다. 세트메뉴와 주류 제외하고 단품 식사로 20,000원 이상 주문해야 가능한 메뉴인데요. 여기에 볶음밥 하나 추가합니다. (+500원)
기대 보다 잠실 TGIF 롯데캐슬점에서 맛있게 먹었던 메뉴입니다.
| TGIF 주차 및 할인
TGIF 할인은 SKT T맴버스나 롯데카드 할인이 가능한데. 세트메뉴 적용제외여서 큰 혜택은 없습니다. 잠실 TGI 프라이데이스 무료주차는 아래와 같이 이용금액에 따라 캐슬플라자 무료 주차가 가능합니다.
오늘은 송파구 잠실역 근처에 있는 3곳의 TGIF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목적에 따라 방문하는 곳이 다르겠지만, 주차나 편의성을 고려하면 골드캐슬에 있는 TGIF를 추천 드립니다.
주차장과 공간이 여유있어 작업하기 좋은 둔촌동 카페인 카페닛시 방문후기 입니다. 카페닛시 메뉴 및 가격, 시설, 단점, 주차장, 주차요금 공유합니다. 물론 가족과 함께 방문한 내돈내산 후기!
| 카페닛시 위치 및 주차
둔촌동 대형카페 카페닛시는 지하철 9호선 중앙보훈병원역 근처에 위치해 있습니다. 두기둥교회와 같은 출입문과 공간을 사용하는 독특한 구조인데요. 주차장도 여유있고 사실상 주차요금 제한도 없습니다. (이 부분은 글 하단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 카페닛시 영업시간 및 부정기 휴무일은 확인필요
영업시간은 10시부터 22시 까지 운영합니다. 라스트 오더는 21시 30분입니다. 카페닛시 휴무일은 매주 일요일 입니다. 두기둥교회와 주차장과 건물 일부를 같이 사용하다 보니 일요일에는 영업하지 않는 것 같네요. 또한, 교회 행사 등으로 부정기 적으로 영업일에 휴무하는 경우가 있으니 방문전에 카페닛시 블로그 등 확인하시고 방문 하세요.
카페닛시는 건물 2층에 위치해 있는데요. 엘리베이터가 있어 몸이 불편하신 분들도 출입이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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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단위 or 작업 or 스터디 카페
강동구 대형카페 둔촌동 카페닛시 실내는 상당히 넓고 쾌적합니다. 4인용 테이블 약 20여개, 8인용 테이블도 네다섯개가 있는데요. 테이블 간격도 여유있고, 의자도 비교적 편하네요. 약간 둔촌동 외진곳에 있는 카페여서 그런지 손님들도 많지 않아 여유있게 시간 보낼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넓고 여유있다. 그렇지만...
| 놀이방이 있는 카페
카페 구석에 놀이방이 있어 아이와 함께 가족단위로 방문하거나 노트북이나 태블릿을 가지고 작업 하시는 분들도 보입니다. 일부 테이블에는 전원과 usb 단자가 준비되어 있네요. 다만 주말 늦은 오후가 되니 놀이방에서 노는 아이들이 많아지네요. 개방된 놀이방이다 보니 소음이 상당합니다. 둔촌동 카페 스터디 목적으로 카페닛시 방문은 추천 드리지 않습니다.
| 카페닛시 메뉴 및 가격
둔촌동 대형카페 카페닛시 메뉴판입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2,500원이라는 매우 저렴한 가격이네요. 밤라떼나 토피넛라떼 등 라떼 메뉴도 4,000원 전후가격입니다. 이 외에도 에이드, 스무디 등의 메뉴도 5천원 미만 가격이네요.
케이크나 피칸타르트, 조각케이크 및 빵류는 5천원 전후 가격으로 큰 부담없이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카페닛시 인기빵류와 커피 세트메뉴가 있는데요. 서울 강동송파 카페 가격을 고려하면 상당히 착한 가격을 보여줍니다. 정말로 해당 메뉴 주문하고 두 세시간 앉아 있기 민망한...
주문은 이렇게 카운터 옆 포스기 이용하시면 됩니다. 카페닛시 주차는 주문시 차량번호 말씀하시면 되는데요. 이 부분은 글 아래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변수가 좀 있네요)
주문하고 진동벨 받고 착석~
| 밤라떼, 크림치즈갈릭브레드
크림치즈갈릭브레드는 아이스아메리카노와 세트로 주문 했습니다. 세트 가격은 6,600원 입니다. 서울에서 갈릭브레드 단품만으로도 6천원이 넘을 것 같은데, 아아가 포함된 가격입니다.
크림치즈갈릭브레드 맛은 딱 이름과 같네요. 달달한 빵은 역시 아아와 함께 먹어야 궁합이 맞는 것 같습니다.
밤라떼도 역시 이름과 동일한 맛을 보입니다. 고소하고 달달한... 커피 싫어하시는 분들에게 추천 드리는 메뉴!
| 아이스아메리카노와 크로와상 입니다.
둔촌동 카페 카페닛시 아이스아메리카노 가격은 2,500원, 크로아상은 3,600원 입니다. 혜자스러운 가격!!! 참고로 에이스크레커는 보너스 아니고요. 500원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베이커리 전문점은 아니지만 빵 맛은 맛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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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차장 및 주차요금
둔촌동 카페 '카페닛시' 주차장은 아래 사진과 같이 상당히 여유가 있습니다. 다만 카페닛시 이용시 2시간 무료주차 지원됩니다. 이후 시간 초과시에는 30분에 2,000원, 한 시간에 4,000원 추가 주차요금이 부과됩니다. 주차처리는 음료 결제시에 차량번호 말씀하시면 됩니다.
| 둔촌동 카페 '카페닛시' 총평
- 둔촌동에서는 가성비 좋은 대형 카페 - 놀이방이 있어 아이와 함께 방문하는 분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 이곳에서 조용히 여유를 즐기기에는 다소 시끄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