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 전시회는 사진촬영 가능하지만, 동영상 촬영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도슨트나 오디오가이드는 없지만, QR코드 인식통한 모바일 리플렛으로 작품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확인이 가능합니다.
| 4개의 섹션, 300여 작품
이번 전시회는 4개의 섹션으로 국가지정문화유산 20건 포함 300여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시회 관람에 필요한 시간은 최소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됩니다. 제가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 예약이 있어 딱 한 시간만 관람했는데, 뒷부분 작품 감상에 시간이 다소 부족했네요.
전시장 입구에는 한 점의 고려청자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청자 어룡모양 주자 (靑磁魚龍形注子)
- 국보 (National Treasure)
- 높이 (Height) : 24.4cm
- 시기 : 고려 12세기
물고기와 용이 결합된 상상의 동물 어룡魚龍을 형상화한 주자입니다. 꼬리를 치켜 올려 전체적으로 U자 형태이며 몸체는 부풀어 터질 듯합니다. 눈동자와 이빨에는 안료를 찍어 생동감을 더했습니다. 신령스러운 존재로 인식된 ‘어룡’이라는 소재와 주자에 표현된 화려한 조형성과 위엄은 왕실과 상류층의 권위를 보여줍니다.
| 제1부 그릇에 형상을 더하여
Part 1 Giving Figural Form to Pottery
흙으로 특정한 형상을 빛는 상형 행위는 역사가 오래되어 이미 신석기시대에 토기 들과 함께 사람이나 동물을 투박한 솜씨로 빚어낸 토우가 등장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무엇인가를 본떠 만든 토제품의 이른 사례 로는 3~6세기 신라와 가야 무덤에서 발견된 상형토기와 토우장식 토기가 눈에 됩니다. 주로 부장품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토기에 표현된 다양한 형상은 죽은 이를 위한 바람 이나 장송 의례와 관련된 의미를 담고 있습 니다. 상형토기와 토우장식 토기가 내세의 그릇이라면 고려 상형청자는 실생활에서 사용한 현세의 그릇입니다. 이 상형 토기와 토우장식 토기를 만드는 데 사용된 다양한 기법이 훗날 고려 상형청자 제작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말 탄 사람모양 뿔잔 (騎馬人物形角杯)
- 국보 (National Treasure)
- 높이 (Height) : 23.2cm
- 시기 : 가야 5세기
- 소장처 : 국립경주박물관
말을 타고 있는 무사를 형상화하였습니다. 무사, 말을 감싼 비늘갑옷, 말 엉덩이 위의 뿔잔 등을 서로 붙여 완성하였습니다.
고려 상형청자 중에도 이와 같이 각 부분을 따로 만들어 결합한 예가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제작기법은 서로 통합니다. 고려 상형청자 제작의 배경으로 그 전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토기의 조형적 전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새모양 토기 (鳥形土器)
- 시기 : 신라 3~5세기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삼국시대 상형토기 중 이른 시기의 새모양 토기입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조弁辰條에 “큰 새의 깃털로 죽은 이가 날아오를 수 있도록 했다”라는 내용이 있어 무덤에 새모양 토기를 묻은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3세기 후반 경주 지역의 덧널무덤에서 나온 새모양 토기는 액체를 넣고 따르는 구멍이 있어 제사용기로 추정됩니다. 큰 볏이 달리고 부리가 넓은 새모양이 유행하였고, 부엉이모양 토기도 있었습니다.
| 제 2부 제작에서 향유까지
고려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한 중국의 청자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수준 높은 청자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11~12세기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주변 국가로부터 다양한 문화적 영향과 자극을 받았습니다. 고려 장인들은 외부의 영향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창의적으로 변용하면서 고려 상형청자만의 독자적 세계를 완성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온전한 모습으로 전하는 상형청자도 중요하지만, 가마터에서 출토되는 상형청자 조각들은 장인의 무수한 실험과 도전 과정을 보여줍니다. 바닷길에서 출수된 상형청자는 가마터에서 수도 개경을 비롯한 소비처로 운송되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개경 이외 지역에서 발견된 상형청자는 다양한 사용자를 둘러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청자 꽃모양 완 (靑磁花形碗)
- 높이 (Height) : 7.4cm
- 시기 : 고려 12세기
꽃잎 5개로 이루어진 촉규蜀葵모양을 본떴습니다. 나선형으로 꽃잎을 양각하고 중심에는 꽃술대를 조각해 붙였습니다. 꽃잎 안쪽 가장자리에는 촉규 넝쿨무늬가 장식되었습니다. 비슷한 형태가 금속기로도 전해져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푸른색의 유약을 덮어 은은하고 영롱한 미감으로 완성한 것은 상형청자만의 특징입니다.
청자 주자와 승반 / 청자 귀룡모양 주자
고려 12세기
액체를 담았다가 따르는 기능을 하는 이 주자는 모두 둥근 형태입니다. 왼쪽은 장식이 없는 그릇 본연의 형태이지만 오른쪽 상형청자는 용머리에 거북의 몸체를 결합한 상상의 동물인 귀룡베모양입니다. 기능은 같은 그릇이지만 상형청자가 시각적으로 한층 풍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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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공간에는 상형청자와 함께 청백자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청자 사자모양 향로 (靑磁獅子形香爐)
- 국보 (National Treasure)
- 높이 (Height) : 21.2cm
- 시기 : 고려
사자는 불교의 가르침을 수호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고 산예狻猊라고도 합니다. 고려청자 절정기를 대표하는 비색과 세련된 조형으로 고려 상형청자의 높은 기술력과 뛰어난 조형미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송宋의 사신 서긍徐兢(1091~1153)이 정교하고 빼어나다고 평한 고려 왕실의 ‘산예출향狻猊出香’ 즉, 사자모양 향로가 바로 이 향로와 같은 종류였을 것입니다.
청자 참외모양 병 (靑磁瓜形甁)
- 국보 (National Treasure)
- 높이 (Height) : 22.8cm
- 시기 : 고려 12세기
가장 널리 알려진 고려 왕실의 상형청자로 비색청자의 대표작입니다. 인종仁宗(재위 1122~1146)의 무덤인 장릉長陵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고려는 비색翡色 유약과 날씬한 형태가 조화를 이루는 작품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금대金代 벽화나 고려불화를 참고할 때 이러한 병은 꽃병으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청백자 물병 및 주차, 병 참외모양 병등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국제도시 개경과 상형자기
상형청자가 화려하게 꽃핀 고려의 수도 개경은 외국과 교류가 활발했던 국제도시 였습니다. 중국 송*(960~1279)의 정요, 여요품, 경덕진요 옆에서 만들어진 자기가 수입되어 왕실과 상류층을 중심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고려 상형청자의 탁월함과 독자성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있습니다.고려의 사자모양 향로를 보고 감탄한 내용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고려 상류층에 스며든 향, 차, 술을 즐기는 문화, 문인 취향, 그리고 더 좋은 것을 갖고 감상하려는 고려 사람들의 바람도 상형 청자를 만드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넘어온 자기들... 원형이 유지되고 있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청자 연꽃모양 향로 조각과 향로뚜껑 조각
중국 북송시대 유물로 소개되어 있다.
| 제3부 생명력 넘치는 형상들
상형청자에서는 다양한 동물과 식물의 특징을 잘 포착해 실감 나게 표현한 형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됩니다. 이러한 소재를 표현한 방식은 대상이 되는 형태 전체를 본떠 만드는 것과 소재의 특징적 부분을 그릇에 적용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떠한 방식이든 하나의 조각 작품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러한 형상은 고려청자만의 비색과 투명한 유약을 더함으로써 한층 더 생명력 넘치는 모습으로 재탄생합니다.
고려 상형청자의 소재는 고려 사람들이 주변에서 실제로 보거나 상상했던형상으로, 크게 동물과 식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때로는 권위와 지위의상징으로, 때로는 항상 곁에 두고 싶은 자연을 대신하는 벗으로 고려 사람들의삶에 자리 잡았습니다
청자 철와 퇴화무늬 두꺼비모양 벼루와 청자 사자모양 향로
고려 12세기 작품으로 두 점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익살스러운 모양이 내 눈길을 끄는...
아래는 청자 사자모양 연적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 전시장 중앙부분에 위치한 공간에 배치된 한 점의 청자가 보입니다.
해당 주자는 리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으로 기억하고 봤던것 같은데요. 이번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 전시회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놀러온 것 같네요.
| 청자 양각·동화 연꽃무늬 조롱박모양 주자 (靑磁陽刻·銅畫蓮花文瓢形注子)
- 국보 (National Treasure)
- 높이 (Height) : 32.5cm
- 시기 : 고려 13세기
아래쪽 몸체와 위쪽 뚜껑은 연꽃모양이고, 그 사이 움푹한 곳에 연꽃 줄기를 들고 있는 동자모양 장식이 있습니다. 손잡이 위의 개구리는 뚜껑에 달린 작은 벌레를 응시하는 듯합니다. 동화銅畫기법으로 그린 붉은 무늬가 청자의 색과 대비되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룹니다. 1257년(고종高宗 44) 사망한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항崔沆의 무덤에서 나왔다고 하여 당시 권력자들의 취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다소 급 높은 상형청자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 ( 靑磁透刻七寶文香爐)
- 국보 (National Treasure)
- 높이 (Height) : 15.3cm
2021년 이건희 회장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작품이라 한다.
고려 상형청자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대표작입니다. 공 모양 뚜껑은 칠보무늬를 맞새김하고 원과 원이 겹쳐진 부분은 상감과 퇴화 기법으로 화려함을 더했습니다. 몸체에는 틀로 찍어낸 꽃잎을 붙였습니다. 상형과 함께 음각과 양각, 투각, 퇴화, 상감, 첩화 등 다양한 기법이 조화를 이루어 무르익은 고려 상형청자의 기술과 조형미를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토끼모양의 다리 장식이 생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상상의 동물
상형청자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은 용, 어룡, 커룡, 기린, 사자입니다. 이들은 예부터 상서롭고 신성한 동물로 여겨진 서수입니다. 이러한 형상은 왕실이나 귀족의 권위와 지위를 상징합니다. 상상의 동물은 향로에서 가장 많이 보이며, 연적과 베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형청자는 왕실 의례와 같이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거나 일상생활에서 상류층의 지위를 돋보이게 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청자 귀룡모양 주자 (靑磁龜龍形注子)
- 국보 (National Treasure)
- 높이 (Height) : 17.3cm
- 시기 : 고려 12세기
물을 담고 따르는 주자입니다. 용의 머리에 거북 몸을 결합한 상상의 동물인 귀룡이 연꽃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귀룡은 고개를 들고 입을 벌려 포효하는 듯합니다. 세밀하게 음각한 비늘과 뿔, 발톱이 맑고 투명한 비색 유약 아래로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눈과 손잡이에는 철 안료로 점을 찍어 생동감을 더했습니다.
청자 용모양 향로 (靑磁龍形香爐)
- 높이 (Height) : 22.7cm
- 시기 : 고려 12~13세기
상상의 동물인 용은 고려에서 왕실의 권위를 나타냈습니다. 이 향로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의 역동적인 모습을 포착하여 향로 뚜껑을 장식하였습니다. 머리를 치켜들고 몸을 비틀어 한쪽 앞발로 보배 구슬을 쥔 자세는 용에 응축된 힘을 잘 보여줍니다. 이 용 형상은 중국 허난성 청량사淸凉寺 여요 汝窯에서 출토된 용 장식 조각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 고려와 북송의 문화교류를 알려줍니다.
청자 베개인데, 작품 소개가 기억나지 않는다.
품안의 자연
앞에서는 상상의 동물을 모티프로 제작한 청자가 전시되었다면, 지금부터는 자연속 식물과 동물을 소재로 작업한 고려 상형청자가 선보입니다.
| 청자 석류모양 주자 ( 靑磁石榴形注子)
- 높이 (Height) : 18.3cm
- 시기 : 고려 12~13세기
고려 문인들은 석류를 옥 이슬방울이나 선인仙人의 음료로 부르는 등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 주자는 석류 열매 네 개의 형태를 합쳐서 만들었습니다. 맨 위의 입수구는 석류 꼭지를 크게 벌려 액체를 넣기 쉽게 만들었고, 옆쪽 주구는 석류 잎을 돌돌 만 형태입니다. 열매, 잎, 가지 등 석류의 모든 요소를 집약하여 독보적인 조형성을 창출했습니다.
청자 물고기 연적과 청자 물고기 모양 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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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순모양, 호리병모양 등 자연에서 가저온 상형청자들을 만나볼 수 있는 공간...
다소 변색되었더나 파손된 작품들이 여기에 모여 있고...
여기는 국립중앙박물관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 전시회에서 조금 더 고급진 청자들이..
| 청자 죽순모양 주자 (靑磁竹筍形注子)
- 보물 (Treasure)
- 시기 : 고려 12세기
주자에 죽순의 요소를 덧씌우듯 결합하였습니다. 액체를 넣고 따르는 기능을 고려하여 아래쪽을 풍만하게 만들었습니다. 주자에 담긴 액체를 따뜻하게 데우기 위해 주자의 바닥을 보온용 그릇인 승반 위에 올린 예도 있습니다. 한편, 죽순모양 주자의 은은한 푸른빛 유색은 죽순을 푸른 옥에 비유했던 문인 이곡李穀(1298~1351) 쓴 시,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기능성과 형태미를 모두 충족시킨 이 주자들은 고려 상형청자가 도달한 높은 수준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제4부 신앙으로 화장된 세상
Part 4 Into the Other World 고려시대에 청사는 실용과 예술의 범주를 넘어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거나 신앙적 바람을 표현하는 영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러한 화장성은 표현 매체로서 청자가 지닌 위력과 고려 사람들의 창의성을 잘 보여줍니다. 도교와 불교는 고려 사람들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이들의 삶에서 청자가 애호되었고 청자 제작 기술이 뛰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려 사람들의 종교 문화에 청자가 포함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교와 불교 의례에 사용되는 기물이 청자로 만들어졌고, 종교적 소재를 담은 청자 그릇도 제작되었습니다. 니아가 기존에 주로 다른 재료로 만들던 불상도 청자 기술을 적용해 만들었습니다. 종교적 용도로 만틀어진 싱형청자는 공예와는 또 다른 차원의 시각적 경험과 의미를 줍니다
청자 나한상 조각들
전북 고창 절터에서 출토된 작품들이라고 하는데. 뭔형이 너무나도 궁금하다.
청자 사람모양 주자 ( 靑磁人物形注子)
- 국보 (National Treasure)
- 높이 (Height) : 28cm
- 시기 : 고려 13세기
도교의 인물이 새를 타고 무언가를 바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주자입니다. 이 인물이 손에 든 그릇 구멍에 액체를 넣고 앞쪽의 새 입으로 따르는 구조입니다. 새는 풍선처럼 부푼 몸과 머리 위의 볏 그리고 긴 꼬리가 특징입니다. 이 새를 봉황鳳凰 또는 난鸞새로 보기도 합니다.
청자 나한상 (靑磁羅漢像)
- 높이 (Height) : 22.3cm
- 시기 : 고려 13세기
바위 위에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비스듬히 앉아 있는 나한상입니다. 팔을 옷소매에 집어넣고 경상經床에 기댄 자세를 하였습니다. 주름진 얼굴에 진지한 표정, 정면을 응시하는 눈매에서 수행자의 면모가 느껴집니다. 이 상의 출토지가 강화도인 점으로 미루어, 고려 조정이 몽골의 침략에 맞서 강화로 수도를 옮겼던 1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보살, 나한, 여래상 등 불교와 도교의 청자들...
보살, 나한상 등 청자 불상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절이나 암자를 개보수하면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원형이 보전되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 소개하는 국립중앙박물관 겨울 전시회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 는 내년인 2025년 3월 3일까지 선보일 예정입니다.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아이들과 함께 방문해 보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이번 전시회 관람시간은 최소 2시간 이상 고려하셔야 합니다. 우선 관람객이 많아서 주요 작품에는 대기가 필요하고요. 좋아하는 작품들이 많다 보니 저는 2시간30분 정도 소요 되었네요.
[프롤로그] 비엔나에 분 자유의 바람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비엔나를 유럽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도시 확장 계획을 단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비엔나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꼽히는 유명한 건축물들이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과거 예술 양식의 모방과 재현에 그쳤습니다. 기대와 실망 속에 논란의 중심이 된 대도시 비엔나에는 각종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였고, 토론의 장이 펼쳐졌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이때 새로 지어진 건물에 벽화를 그리면서 크게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전통 양식을 그대로 따르는 일은 클림트의 뜻과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예술의 길을 탐구했고,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특별한 예술 운동을 시작합니다. 클림트는 새로운 도전을 꿈꾸던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클림트와 동료들이 만든 비엔나 분리파의 활동으로 이제 비엔나에 ‘자유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에곤 실레 (1890–1918) / 1918년, 종이에 석판화 / 개인 소장
비엔나 분리파는 '시대에는 시대에 맞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을 모토로 1897년 창립되었습니다. 초대 회장에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선출됐어요. 당시 비엔나 예술가들이 가장 믿고 따랐던 클림트는 많은 전시회를 열면서 그들이 추구한 '새로운 예술'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1902년에는 베토벤에 경의를 표하는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비엔나 분리파는 전통을 깬 혁신의 상징이었던 베토벤을 존경했습니다.18세기 음악적 형식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던 때, 베토벤은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나 감정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음악적 구성을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전시회의 포스터는 알프레드 롤러가 그렸습니다. 그는 포스터 역시 하나의 예술 분야로, 관심 없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포스터에는 수수께끼 같은 상징이 많습니다. 빛나는 물체를 들고 몸을 굽힌 여성은 어둠에서 빛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마치 비엔나의 새로운 빛이 되고 싶었던 비엔나 분리파의 꿈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흔히 구스타프 클림트를 ‘황금의 화가’라고 알고 있지만, 예술가로서 그를 설명하는 한 단어를 꼽는다면 그건 바로 ‘혁신’입니다. 초기에 클림트는 주로 전통 양식으로 작업했고, 황제로부터 상도 받으며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곧 인간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주제에 주목했고, 유럽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인상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비엔나의 방식으로 수용한 ***아르누보 등 다양한 예술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클림트는 외국 작품을 소개하고 활발한 전시 활동을 하면서 오스트리아 예술을 모더니즘의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젊은 예술가들이 실험적인 예술을 할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혁신’을 향한 그의 열망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시장 모습과 클림트의 사진, 정말로 옛날에 클림트 도록에서 이 사진을 보고 클림트에 대한 환상이 깨진적이 있었다는... 조금은 그의 작품과 비슷한 느낌을 상상하고 있었던 시절...
국립극장의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86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수도 비엔나를 대도시로 탈바꿈시킨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비엔나를 둘러싼 성벽이 철거된 자리에 생긴 커다란 대로에 오스트리아의 정치경제, 문화, 예술을 위한 수많은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비엔나로 여행을 간다면 방문해야 하는 대표적인 명소들이죠. 구스타프 클림트는 바로 이 시기, 새로 만들어진 건물을 장식하기 위한 예술가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이 작품은 클림트가 국립극장의 실내 장식을 위해 그린 습작입니다. 바로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연회 장면인데요, 중앙에는 디오니소스의 조각상이 있고, 양쪽으로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왼쪽 여인은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지팡이를 들었고, 오른쪽 여인은 월계수 관을 들고 있습니다. 디오니소스 연회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돈 연극의 기원으로 생각되었기에, 클림트는 국립극장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이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초상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하나 지역의 소녀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83년경 패널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작품에 제작 시기가 쓰여 있지 않지만, 구스타프 클림트가 학생이던 시절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체코 모라비아에 있는 하나 지역에서 온 소녀를 그렸다. 소녀는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있는데, 이는 하나 지역 풍습을 따른 것이다. 옷과 배경을 모두 옅은 회색으로 칠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얼굴이 더욱 두드러진다. 살짝 옆을 보는 소녀의 눈길은 그녀가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노인의 옆모습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96년경 카드보드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트라운 백작’이라는 제목으로도 전해지는 까닭에 주문받은 초상화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림 속 인물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옆얼굴만 보여 주는 구도 역시 평범하게 주문받아 제작한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클림트는 얼굴의 특징을 명확하게 드러내면서도 윤곽선을 부드럽게 처리했다. 배경을 단색으로 칠해서 노인의 옆얼굴에 더욱 눈길이 머문다. 클림트가 인물화에서 새로운 구도와 효과를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모자를 쓴 여인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97/98년 캔버스에 유화 클림트재단
작품 속 여성은 당시 비엔나에 유행하던 패션과 장신구를 보여 준다. 목을 감싼 칼라와 챙이 넓은 모자를 모두 검은색으로 칠해 여인의 얼굴이 더욱 돋보인다. 19세기 말 유럽에서는 불편한 코르셋이나 지나친 장식에서 벗어나 실용적이고 편안한 의복을 강조하는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비엔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디자이너였던 에밀리 플뢰게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예술적 동반자로서 깊은 관계를 유지했고, 그녀의 패션은 클림트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풀 속 여인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98년경 캔버스에 유화 클림트재단
세련된 모자를 쓰고 풍성한 소매가 돋보이는 블라우스를 입은 초상화 속 여인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두터운 물감으로 그려낸 수풀과 여인의 블라우스 소매는 손으로 만지지 않아도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구스타프 클림트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예술을 오스트리아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과정에서 프랑스의 인상주의와 같은 화풍이 오스트리아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클림트도 초기에는 전통적인 화풍으로 그렸지만, 점점 인물화에서 여러 가지 구도나 표현법을 실험했습니다. 1890년대 후반에는비엔나 중.상류층 여성들의 초상화가로 자리 잡으면서, 이 작품처럼 완성도 높은 인상주의 화풍의 인물화틀 그렸습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대표작품이기도 한데요. 작품 사이즈도 A4 용지정도 크리로 작고, 제가 기대한 것보다는 다소 소박한 크림트의 인물화 입니다.
클림트를 기대하고 방문했다면 실망할 전시회
뒤에도 클림트의 그림은 계속되지만 기대했던 황금빛의 클림트 그림은 이번 전시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번 전시회 제목인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뒤에 클림트는 빠져야.
1부. 비엔나 분리파, 변화의 시작
19세기 말 비엔나에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변화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예술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기득권과 맞서는 젊은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된 구스타프 클림트는 동료들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하여 과거의 관습과 예술 양식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의 초대 회장이 된 클림트는 활발하게 전시를 열어 작품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는 교류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회화뿐 아니라 공예, 삽화, 책 표지와 우표 디자인 등 일상의 여러 분야로 예술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그들의 예술 철학과 외국의 예술 동향을 알리는 잡지인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도 발행했습니다. 여러 예술 장르를 합쳐 하나로 완성된 아름다움을 구현한다는 ‘총체예술’의 개념은 비엔나 분리파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영원하지 않았던 클림트의 분리파
비엔나 분리파는 크게 두 개의 단체가 결합된 형태였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7인회’와 더 전통적인 양식을 고수했던 ‘하겐 클럽’입니다. 두 단체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졌기에 분열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1905년 비엔나 분리파 회원들의 작품 판매처로 7인회와 친분이 있는 갤러리를 활용하는 방안을 두고 형평에 어긋난다며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요인은 풍경화를 주로 그리며 순수미술을 중요시한 하겐 클럽과 예술과 공예의 통합을 지향한 7인회의 서로 다른 성향으로 인한 충돌이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결국 분열로 이어졌고, 클림트와 콜로만 모저, 요제프 호프만을 비롯한 예술가들은 비엔나 분리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비엔나 분리파는 이후에도 존속하며 젊은 예술가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습니다.
제14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알프레드 롤러 (1864–1935) 1902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는 '시대에는 시대에 맞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을 모토로 1897년 창립되었습니다. 초대 회장에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선출됐어요. 당시 비엔나 예술가들이 가장 믿고 따랐던 클림트는 많은 전시회를 열면서 그들이 추구한 '새로운 예술'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1902년에는 베토벤에 경의를 표하는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비엔나 분리파는 전통을 깬 혁신의 상징이었던 베토벤을 존경했습니다.18세기 음악적 형식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던 때, 베토벤은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나 감정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음악적 구성을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전시회의 포스터는 알프레드 롤러가 그렸습니다. 그는 포스터 역시 하나의 예술 분야로, 관심 없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포스터에는 수수께끼 같은 상징이 많습니다. 빛나는 물체를 들고 몸을 굽힌 여성은 어둠에서 빛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 포스터
루돌프 칼바흐 (1883–1932) 1908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 안에는 구스타프 클림트처럼 다양한 예술장르를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회화와 같은 순수미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1905년 클림트와 뜻을 함께한 예술가들이 비엔나 분리파를 탈퇴했습니다. 클림트가 비엔나 분리파에 속했던 시기를 '빛나는 7년'이라고 부릅니다. 무려 23번의 전시회를 열면서 유럽의 예술가들과 왕성하게 교류를 했고,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변혁의 움직임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클림트는 비엔나 분리파를 탈퇴한 후 '클림트 그룹'을 만들어 더 급진적인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지금 보고 계시는 전시회 포스터는 클림트 그룹이 개최한 '비엔나 예술전람회'입니다.이 전시에서 만나게 될 '꿈꾸는 예술가들'이 총출동했습니다. 콜로만 모저와 요제프 호프만은 디자인과 장식 예술 분야를 담당했고,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도 출품했습니다 이 전시는 오스트리아 예술계가 모더니즘으로 전환하는 시작점으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좀 더 자유롭게 자신만의 예술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겠죠?
제40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에른스트 에크 (1879–1941) 1912년 종이에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는 클림트와 동료들이 떠난 뒤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열어 다양한 예술가의 작품을 오스트리아에 소개했다. 또한 젊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제40회 전시회에서는 포스터라는 장르가 독립된 예술 분야임을 강조했다. 비엔나 분리파는 서체와 그래픽 디자인이 조화를 이룬 다양한 포스터를 전시했다. 에른스트 에크는 흰색과 검은색만으로 강렬하고 순수한 디자인의 포스터를 만들었다.
제14회 전시회장에서 촬영한 비엔나 분리파 회원들
모리츠 네어 (1859–1945) 1902년 사진 비엔나 이마그노 사진 기록 보관소 (크리스티안 브란트슈테터 수집)
혁신의 상징, 베토벤을 위한 전시회
비엔나 분리파는 1902년 ‘베토벤에 대한 경의’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 전시관인 *제체시온의 중앙 전시실에는 독일 조각가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조각상이 놓였습니다. 베토벤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곳곳에 전시되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중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일부를 인간의 고통과 투쟁,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여정으로 묘사한 <베토벤 프리즈>를 전시실의 세 벽면에 그렸습니다.
전시회 개막식에는 비엔나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지휘 아래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일부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 전시회의 전체 디자인은 비엔나 분리파의 요제프 호프만이 맡았습니다. 새롭고 대담한 전시회였다는 좋은 평가도 있었지만, 급진적인 시도를 어려워하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엔나 분리파는 이 전시회에 회화, 조각, 음악, 디자인 등 전시의 모든 요소가 하나로 어우러져 특별한 감상을 선사하는 ‘총체예술’의 이상을 구현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가 만든 잡지
비엔나 분리파는 미술과 문학을 아우르는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이라는 잡지를 발간했습니다. 이 잡지는 1898년부터 1903년까지 간행되면서 외국의 예술 동향을 알리고 새로운 예술을 보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이 잡지는 비엔나 분리파의 초기 역사를 가장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예술가들이 돌아가며 디자인을 담당한 까닭에 누가 맡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양식의 잡지가 발간되었습니다. 이 또한 특정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예술을 지향했던 비엔나 분리파만의 특징이었습니다. 『성스러운 봄』은 단순한 잡지가 아니라 문학과 그림, 표지 디자인을 결합하여 비엔나 분리파가 추구했던 ‘총체예술’을 구현한 또 하나의 매체였습니다.
성스러운 봄 1호
1898년 1월 발간 오스트리아 예술가연합 활판 인쇄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는 6년 동안 '성스러운 봄'이라는 잡지를 발간했어요. 이 잡지는 유럽 예술의 동향을 파악하고 그들이 보여주려고 한 새로운 예술이 무엇인지 알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정사각형 판형으로 만들어진 '성스러운 봄'의 첫 번째 호입니다. 표지를 보시면 나무의 뿌리가 화분을 뚫고 자라나 있고, 풍성한 나무에 열매처럼 매달린 세개의 문장이 있습니다. 이는 예술의 중요한 요소인 건축회화, 조각을 상징합니다. 마치 새롭게 뿌리내리는 비엔나 분리파와 성스러운 봄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성스러운 봄'은 매번 다른 예술가가 편집장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나올 때마다 각자의 색을 담은 제각각의 디자인이 돋보입니다. 라틴어로 쓰인 잡지 제목 '베르사크룸'은 '성스러운 봄'이라는 의미로, 비엔나 분리파가 전통에서 벗어나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스러운봄 5/6, 9월, 10월호
오스트리아 황제 즉위 60주년 기념우표를 위한 디자인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기마상, 60헬러 콜로만 모저 (1868–1918)
1908년 카드보드에 연필(23), 종이에 연필(24-26), 불투명 수채 오스트리아 포스트 AG
콜로만 모저는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재위 1848-1916)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디자인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98년 열린 제1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의 개막식에 참석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고 비엔나가 유럽 예술의 중심지임을 강조하기 위해 비엔나 분리파를 지지했다. 모저는 기하학적인 무늬로 우표의 테두리를 각각 다르게 디자인했다. 예술이 삶의 모든 부분에 스며들어야 한다는 모저의 예술적 지향을 잘 보여 주는 작업이다.
벨베데레 궁전
카를 몰 (1861–1945) 1909년경 종이에 다색 목판화 레오폴트미술관
19세기 후반 비엔나에서는 목판화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비엔나 분리파의 창립 회원이었던 카를 몰 역시 비엔나 풍경을 담은 판화를 많이 만들었다. 이 판화는 벨베데레 궁전 정원의 겨울 풍경을 담고 있다. 왼쪽에 보이는 조각상에서 쭉 뻗은 정원 길을 따라 벨베데레 궁전으로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몰은 빛의 반사와 섬세한 색감을 세련되게 활용하여 겨울 분위기를 표현했다.
2부 새로운 시각, 달라진 오스트리아의 풍경
비엔나 분리파의 대다수 회원은 유럽으로, 일부는 아시아 지역까지 여행하며 새로운 예술을 접하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전시회를 열어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어떤 예술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오스트리아를 그린 풍경화가 나타났습니다.
전통 양식을 따르던 보수적인 아카데미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탐탁치 않아 했고, 당시 유럽에 퍼져 나갔던 예술적 자극에 대한 수용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비엔나 분리파는 새로운 시도와 자극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모방이 아닌 그들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들의 예술 철학과 도전은 이후 비엔나 예술계가 모더니즘으로 나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큰 포플러 나무 11 (다가오는 폭풍)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902/0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를 이끈 구스타프 클림트는 예술가들이 유럽의 다양한 미술을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오스트리아 밖으로 나가서 보고 배우라고 지시했습니다. 또한 유럽의 예술가들을 초청해 전시회를 열어 소통의 장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유럽에서 유행하던 인상주의나 상징주의가 비엔나에 알려졌고, 오스트리아의 예술가들은 이전과 다른 풍경화들을 그리게 됩니다..
클림트의 풍경화에서 거대한 포플러나무는 작품의 오른편을 가득 채우고 있죠. 나무를 잘 보시면 여러 가지 색 물감을 찍어서 반짝이는 효과를 냈습니다.어떤 평론가는 이것을 '마치 송어의 비늘 같다'고 말했어요. 멀리 펼쳐진 들판 너머로 하늘이 크게 그려져 있는데, 바람이 소용돌이치듯이 불고 먹구름이 져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쏟아질 것 같네요. 하늘을 극적이고 생생하게 그렸던 화가가 한 명 떠오르지 않나요?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클림트도 유럽에서 유행했던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당시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정사각형 화폭을 선택한 것도 참 클림트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숫가의 남녀
에른스트 슈퇴어 (1860–1917) 1897/190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그림 속 남녀는 호숫가 난간에 기댄 채 서로의 시선을 피해 먼 곳을 바라 보고 있다. 비엔나 분리파의 창립 회원인 에른스트 슈퇴어는 이 작품에서 여러 빛깔의 색들을 섞지 않고 점을 찍어서 표현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파란색과 연보라색 점들이 왠지 우울하고 쓸쓸한 감정을 자아낸다. 슈퇴어는 주로 희미한 저녁 빛을 표현해 서정적인 장면을 연출했고,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을 담아내고자 했다.
넓게 펼쳐진 들판과 언덕을 표현한 이 그림은 레오폴트 블라우엔슈타이너의 초기 작품이다. 높이 쌓아 올린 옥수수 짚을 여러 곳에 배치해 화면을 구성했고, 가까운 곳과 먼 곳의 풍경을 조화롭게 표현했다. 당시 흔했던 황토색 옥수수 짚을 소재로 수확 이후 여름날 풍경을 묘사했다. 일본 목판화와 인상주의 회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구도와 색을 실험적으로 사용하고 그 결과를 작품에 충실히 반영했다.
피아노를 치는 레오폴트 치하체크
에곤 실레 (1890–1918) 1907년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에곤 실레는 열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매독으로 죽자 삼촌인 레오폴트 치하체크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이 작품은 실레의 삼촌이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그렸다. 실레는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 밝은 부분과 그림자가 있는 어두운 부분을 구분하여 명암의 대비를 살렸다.
가로로 긴 화폭 역시 극적인 구도를 만들어 준다. 붓질의 방향이 모두 빛이 들어오는 오른쪽 아래를 향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치는 손으로 눈길이 간다. 실레는 삼촌의 손을 번지도록 표현하여 피아노를 치는 율동감을 살렸다.
실비아 콜러 (화가의 딸)
브론치아 콜러-피넬 (1863–1934) 1926년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브론치아 콜러-피넬은 구스타프 클림트, 요제프 호프만 등 비엔나 분리파 예술가들과 매우 가깝게 교류했다. 그녀의 집은 비엔나의 화가, 과학자, 음악가, 철학자들이 모여 교류하는 장소였다. 그녀는 특히 인물화와 정물화에서 독특한 색채와 구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화가로 활발히 활동하면서도 에곤 실레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브론치아의 딸 실비아는 자신감 넘치는 자세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으며, 사랑과 헌신의 상징인 분홍 카네이션을 들고 있다.
교류와 후원, 비엔나의 카페 문화
카페는 화가, 소설가, 음악가, 건축가, 정치인 등 주요 인사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정보를 주고받는 장소였습니다. 카페 문화는 당시 비엔나 예술계의 중심이었으며, 예술의 장르를 넘나들며 서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기 비엔나 예술가들은 활발한 예술 후원에 힘입어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 나갔습니다. 카페는 후원자와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탐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의 재력가들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술가들은 감사의 의미로 후원자의 드로잉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굽은 목재로 만든 의자, 255번
카페 뮤지엄을 위한 디자인 디자인: 아돌프 로스 (1870–1933) 제작: 야코프 & 요제프 콘 1898년경
굽은 목재, 너도밤나무에 검붉은 칠, 나무로 엮은 좌석 레오폴트미술관
여러분은 카페에 가면 무엇을 하시나요? 공부나 일을 위해 혹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가시나요? 19세기 말 비엔나에서는 이런 카페 문화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예술, 철학, 문학, 음악의 중심지 비엔나에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였던 가장 중요한 장소가 바로 카페였어요. 그 중에서도 최고의 명소로 꼽히는 곳이 바로 카페 뮤지엄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계시는 의자는 1899년 카페 뮤지엄이 문을 열었을 때 놓여 있었던 것이에요. 이때 만들어진 카페 의자는 단순한 디자인에 대량 생산이 가능한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이 의자를 디자인한 아돌프 로스는 장식이 없는 단순한 디자인으로 기능성을 살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막상 카페 뮤지엄이 문을 열었을 때는 엄청난 논란이 있었다고 해요. 화려한 장식을 기대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의 디자인이 너무 무미건조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아돌프 로스의 실용성과 기능성을 강조한 디자인은 이후 모더니즘 건축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이자 드로잉 작가로, 코코슈카는 다양한 매체와 기법을 사용했으며, 수많은 전시회와 작품을 통해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가 남긴 예술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파울 셰어바르트
작품집 『사람의 얼굴』에 수록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6년
출판사: 데어 슈투름, 베를린 종이에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가 그린 독일의 소설가이자 건축 이론가 파울 셰어바르트의 초상화다. 그는 표현주의 잡지 『데어 슈투름』에 많은 글을 기고했다. 특히 건축에 유리를 사용하여 인간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유리 건축 이론’을 제시해 주목받았다. 코코슈카는 다양한 굵기로 선의 강약을 조절하여 셰어바르트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헤르바르트 발덴
작품집 『사람의 얼굴』에 수록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6년
출판사: 데어 슈투름, 베를린 종이에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가 그린 독일의 미술 비평가 헤르바르트 발덴의 초상화다. 발덴은 표현주의와 같은 새로운 예술의 흐름을 지지했다. 그는 베를린에 출판사와 갤러리를 열어 새로운 예술 운동을 지원하고 이를 세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발덴이 1910년 창간한 잡지 『데어 슈투름(Der Sturm)』은 표현주의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중요한 출판물이었다. 오스카 코코슈카 역시 이 잡지에 여러 점의 삽화를 그렸다.
콜로만 모저
콜로만 모저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만든 예술가입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에서 조각, 유리 등 다양한 방면의 디자이너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주도하며 가구, 벽지, 도자, 직물,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도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모저의 디자인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부드러운 곡선과 자연스러움이 특징입니다. 또한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양식으로 세련되고 현대적인 디자인을 추구했습니다. 디자인 공방을 떠난 이후로는 빛과 색을 연구한 회화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했던 콜로만 모저는 비엔나 예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끈 만능 예술가였습니다.
산맥
콜로만 모저 (1868–1918) 191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이 그림을 그린 콜로만 모저는 이번 전시에서 주목하는 6명의 꿈꾸는 예술가들' 중 한 명입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로 활동하면서 많은 전시회를 디자인하고 기획했어요.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주도하면서는 공예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죠. 공방을 나온 이후에는 회화 작업도 남겼으니, 그야말로 장르의 경계 없이 만능으로 활동했던 예술가네요
콜로만 모저는 지금 보고 계시는 것과 같은 풍경화를 많이 그렸는데요,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여러 산을 그렸지만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어요. 노랗게 표현돈 하늘 아래로 몇 개의 선을 그려서 산맥을 구분하고, 열은 따란색과 어두운 색을 대비시켜서 구분했어요. 이런 단순한 구성과 색 대비는 일본 목판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우키요에 라고 부르는 일본 목판화가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간결하고 단순한 구성이 선명하고 풍부한 색감은 전통적인 원근법과 사실적 표현어 익숙했던 유럽 사람들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일본 미술이 비엔나에서 새로운 표현을 탐구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빛과 색의 마법, 모저의 꽃 그림
마리골드 콜로만 모저 (1868–1918) 1909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이끈 콜로만 모저는 다양한 재질의 공예품을 만들고 그래픽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 수공예와 장인 정신을 내걸었던 공방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자, 경영 방식에 대한 의견 충돌이 생겼고 결국 모저는 1907년 디자인 공방을 떠났다. 그 뒤로 모저는 회화를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특히 하루 또는 계절에 따라 빛과 색이 달라지는 장면을 담은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이후에는 강렬한 색채를 띠는 정물과 꽃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동굴 속의 비너스
콜로만 모저 (1868–1918) 1914년경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동굴의 둥근 공간에서 비너스가 베일을 쓰고 나오는 장면을 그렸다. 비너스의 몸은 밝은 부분에서는 노란색을, 어두운 부분에서는 옅은 보라색을 띤다. 모저는 비너스뿐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베일, 바위, 꽃다발 등에 흔히 쓰지 않는 색을 혼합해 사용했다. 그는 독특한 색채 대비와 상징으로 고전적 주제인 그리스·로마 신화를 새롭게 재해석했다. 1914년 무렵 모저 화풍의 변화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하겐 클럽과 알빈 에거-리엔츠
비엔나 분리파의 예술가들 중 일부는 하겐 클럽에 속했습니다. 이들은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공예보다 회화와 같은 순수 미술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사실적으로 자연을 묘사하면서도 차분하고 정돈된 분위기로 오스트리아의 풍경이나 풍속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알빈 에거-리엔츠는 1900년까지 하겐 클럽에 소속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농민, 노동자 등 서민의 삶을 담은 풍경을 많이 그렸습니다. 극단적으로 감정을 표출했던 표현주의 작가들과 달리 무게감 있고 따뜻한 정서로 오스트리아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깊은 숲 (<아베>를 위한 습작)
알빈 에거-리엔츠 (1868–1926) 1895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희미한 빛이 어린 울창한 숲속에 침엽수가 높이 뻗어 있다. 햇빛이 스며들고는 있지만 땅에 닿지 못하기에 차가움이 느껴진다. 빠르고 자유로운 붓질로 나무 아래 우거진 덤불을 표현했다.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뾰족하게 갈라진 나뭇가지다. 앞쪽에는 밝은 색을, 뒤쪽으로 갈수록 어두운 색을 두껍게 칠해 깊이감을 주면서 햇빛이 스며드는 느낌을 나타냈다. 이 작품은 1809년 베르기젤 전투 이후 티롤 민병대가 기도하는 장면을 묘사한 <베르기젤 전투 이후의 아베 마리아>의 배경을 위한 습작이다.
이상하게 이 그림도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장에서 마음을 흔들었던 작품 중 하나.
점심 식사 (<수프> 두 번째 그림)
알빈 에거-리엔츠 (1868–1926) 1910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의 한 축을 이루었던 그룹은 회화나드로잉이 공예보다 수준이 높다고 생각한 하겐 클럽사람들이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탈퇴한 후에도, 이들은 계속 전시회를 열고 활동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생활상이나 풍경을 차분하고 따뜻한정서로 다뤘던 알빈 에거-리엔츠라는 화가가 그러한 부류에속합니다.
사람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분위기는 침착하고 평온하며, 사람들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합니다.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어 따뜻한 분위기가 전해집니다.에거-리엔츠는 농부들의 일상을 무게감 있게 그렸는데요, 같은 주제로만 무려 25점이나 되는 그림을 남겼다고 합니요. 그만큼 이런 주제에 대해서 깊이 탐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실에서 2실로 2부에서 3부로
전시장 중간에 있는 공간에서는 이번 전시회관련 멀티미지디어 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과 에곤실레 작품을 대형 현수막으로 출력한 포토월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3부. 일상을 예술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탄생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동료들은 공예도 예술과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하며,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예술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에서는 회화, 공예, 조각, 포스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였고, 예술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대중에게 알렸습니다. 1903년 콜로만 모저와 요제프 호프만은 일상의 물건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설립했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초기 디자인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유행한 장식 미술과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곡선 형태가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곧 기능성과 미학의 조화를 강조한 영국 *예술공예운동의 영향으로 기하학적 단순함을 중시하는 디자인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들의 철학은 이후 기능주의를 추구하며 설립된 예술학교 **바우하우스를 비롯해 여러 방면의 디자이너와 건축가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판된 이 책의 제목은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03-1928’이다. 공방과 관련된 많은 사진 자료를 포함하고 있으며, 글은 여러 가지 언어로 쓰여졌다. 이 책의 제작에는 세 명의 예술가가 참여했는데 그 중 마틸데 플뢰글의 경우 책에 수록될 사진 자료와 글을 선정했고 전반적인 디자인을 담당했다. 책에는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활동한 주요 예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공방의 역사와 성과를 담았다.
연하장 엽서
디자인: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 (1893–1971) 제작: 비엔나 디자인 공방
연대 모름 카드보드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는 새해, 부활절,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날을 위한 엽서도 디자인을 했습니다. 여기, 붉은 옷을 입은 광대가 꽃다발에 둘러싸인 돼지를 들고 있는 장면이 보이시나요? 우리나라에서도 돼지꿈을 꾸면 그날은 복권을 사야한다는 말이 있죠.
전통적으로 돼지는 복을 상징하는데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에서도 돼지는 행운을 나타내는 동물이라고 해요. 특히 새해 연하장에 시용될 때는 풍요로움과 부유함을 나타내는 동물로 쓰여서, 새해에 행운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엽서 위에 쓰인 것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문구입니다. 그러니까 이 엽서는 새해 연하장이에요. 광대는 새해를 갖이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어요.
하얀색 바탕에 동글동글한 장식이 들어간 주황색 줄무늬 디자인이 너무 매력적이에요. 총 16점으로 이루어진 이 도자기 식기 세트는 여러 예술가들의 협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선 식기 세트의 모양은 콜로만 모저가 디자인을 했고, 주황색 장식은 콜로만 모저의 제자였던 유타 지카가 맡았습니다. 그리고 도자기 제작은 도자기 공방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비엔나 도자기 제작소'에서 만들었습니다.
1부에서 설명했던 '총체예술`기억하시나요? 베토벤 전시회처럼 회화, 조각, 음악, 디자인 등 예술의 여러 요소들이 어우러져 관람객에게 특별한 감상을 선사한다는 개념인데요, 일상과 예술을 통합하고, 이를 위해 모든 예술가들이 힘을 합치는 것, 이것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이 추구했던 '총체예술'의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06년 도예가이자 조각가인 미하엘 포볼니는 그래픽 디자이너 베르톨트 뢰플러와 함께 ‘비엔나 도예 공방’을 설립했다. 이들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미학과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함께 협력하기도 했다. 정수리 부분을 깎은 수도승 특유의 머리와 깡마른 얼굴, 움푹 들어간 눈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머리와 얼굴을 감싼 검은색 두건이 얼굴을 돋보이게 한다. 포볼니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표현하고자 했다. 수도승은 언젠가 맞이할 죽음을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잠긴 듯하다.
손가방
디자인: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1893–1971) 제작: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29년 천 에른스트 플로일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활동한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는 섬유, 금속, 도자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디자이너로 두각을 드러냈다. 리카르츠-슈트라우스는 독특한 기하학적 무늬와 밝고 대조적인 색채의 조합으로 장식미술과 일상 용품을 결합했고, 1920년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이끌었다. 이 가방은 일상생활에서 가볍게 들기 좋은 크기로 만들어졌다. 다양한 색의 동그라미 장식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형태로 표현했다.
가죽 공방의 성과, 세련된 디자인
디자인: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1893–1971) 마틸데 플뢰글 (1893–1958)
제작: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29년 염색한 가죽 에른스트 플로일
1912년 디자이너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는 열아홉 살 이른 나이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첫 작품을 만들었다. 1920년대에는 꽃 등 식물무늬를 활용해 직물을 만들던 당대 예술가들과 달리 기하학적 구성과 대담한 색채로 눈에 띄는 독특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크리스털 식기 세트, 메테오르 100번
네 개의 와인잔 디자인: 콜로만 모저 (1868–1918)
제작: 마이어스 네페 (바칼로비츠 & 죄네 의뢰) 1899년 주조 유리 레오폴트미술관
콜로만 모저는 일상과 예술을 통합하는 철학을 실천한 디자이너였다. 모저는 다양한 모양과 색을 활용한 유리 공예품을 섬세하게 디자인했다. 이 작품들 역시 모저가 디자인하고, ‘바칼로비츠 & 죄네’ 회사가 보헤미아의 유리 공방 ‘마이어스 네페’에 제작을 의뢰해 만들었다. 기하학적 무늬를 잘 살린 모저 특유의 디자인을 보여 준다. 특히 유리를 성형할 때 만든 동그란 무늬가 마치 물 밖으로 떠오르는 공기 방울을 보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만든 다양한 작품들로 가득한 공간에 오셨습니다. 1903년 설립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은 일상적인 용품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철학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전시된 공예품들은 당시 일상에서 쓰이던 것들입니다.요즘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로 참 예쁘고 멋지죠? 몇 개는 집에 갖다 놓고 싶을 정도인데요?
콜로만 모저는 비엔나 디자인 공방 설립을 주도하면서 디자이너로서 영역을 넓히기 시작합니다. 특히 공방은 디자이너, 제작사 그리고 판매사 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모저는 공 모양의 꽃병에 강렬한 색채로 식물무늬|에서 영감을 받은 독특한 디자인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디자인은 비엔나에서 활동하던 도자기 및 유리 공방에서 꽃병으로 제작됐고,'바칼로비츠와 쇠네' 회사에서 판매했습니다. 이렇게 예술가와 제작사 간의 분업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수준 높은 공예품들을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요제프 호프만
요제프 호프만은 기능주의 미학을 강조한 오스트리아 건축가 오토 바그너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에서 개최한 많은 전시회를 디자인했는데, 초기에는 장식 미술에 바탕을 둔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영국 예술공예운동이 추구하는 간결하고 단순한 디자인에 매료되었고, ‘정사각 호프만’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기하학적인 디자인에 빠져듭니다.
요제프 호프만은 일상생활 속 물건에 예술적 가치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공간의 모든 요소를 일정한 디자인으로 통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특히 창문, 문, 가구, 식기 세트 등을 모두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디자인했습니다. 이는 모든 요소를 통합하여 최상의 디자인 효과를 내고자 했던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총체예술’이었습니다.
안락의자 721번
비엔나 전신국을 위한 디자인 디자인: 오토 바그너 (1841–1918) 제작: 야코프 & 요제프 콘 1902년경
굽은 목재, 너도밤나무에 칠, 합판 레오폴트미술관
오스트리아의 건축가이자 이론가로 유명한 오토 바그너가 디자인한 의자입니다. 오토 바그너는 기능적이고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움까지 담을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했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자 콜로만 모저외 요제프 호프만 역시 오토 바그너의 제자였습니다. 이들은 스승의 철학을 따라 장식적이면서도 기능성 좋은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이 의자는 오토 바그너가 비엔나의 전신국 사무실을 위해 디자인한 것입니다. 팔걸이와 등받이를 하나의 나무로 만든게 보이시나요? 나무에 수증기를 쐬어 부드럽게 만든 후 원하는 모양으로 구부려 곡선을 표현한 것입니다
꽃장식 테이블, M436번
디자인: 요제프 호프만 (1870–1956) 제작: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05년경 철판에 아연 도금 후 칠 레오폴트미술관
하양고 깔끔한 꽃장식 테이블을 디자인한 사람은 비엔니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주도한 요제프 호프만입니다 요제프 호프만은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창립했고,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이 있는 디자인을 추구했습니다.
이 테이블이 어떤 무늬로 가득 차 있는지 보이시나요? 바로 정사각형입니다. 요제프 호프만은 '정사각 호프만'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정사각형이 가장 완전한 형태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서 있는 바닥, 주변의 여러 작품들에서도 정사각형이 많이 보이실 거에요 요제프 호프만은 아름다움과 기능이 조화로운 수공예의 가치를 강조한 영국의 예술공예운동에 영향을 받아 정사각형에 매료되었습니다.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구성 속에 아름다움을 표현한 호프만의 디자인은 이후 많은 디자이너와 건축가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많은 금속 공예품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다시 유행한 고전적인 공예 제작 방식을 따랐다. 바로 금속을 고온에서 녹이지 않고 실온에서 물리적인 힘을 가해 성형하거나 가공하는 방식인데, 재료 본연의 성질은 유지하면서도 모양을 변형할 수 있었다. 이 바구니 역시 실온에서 가공한 뒤 표면에 구멍을 뚫어 만든 것으로, 복잡하고 섬세한 기하학적 장식을 조화롭게 배치했다.
4부 강렬한 감정, 표현주의의 개척자들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불만이 많았던 에곤 실레는 1907년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난 뒤로 예술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클림트는 실레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았고, 그를 주변에 소개하고 후원을 받게 함으로써 독립적인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둔 실레는 동료들을 모아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신예술가그룹’을 결성했습니다. 개인의 감정을 색채와 형태로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한 신예술가그룹 화가들은 비엔나 예술계를 모더니즘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자유롭게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개척하며 비엔나 예술계에 세대교체의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과장된 꽃과 장식적 배경
에곤 실레 (1890–1918) 1908년 캔버스에 유화, 금색과 은색 안료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가 구스타프 클림트를 처음 만났던 1907년, 실레는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의 학생이었습니다. 클림트는 단번에 에곤 실레의 재능을 알아보았죠. 그가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도록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게 소개해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스승이자 멘토와 같은 존재가 된 것이죠. 마침 에곤실레는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지쳐 있었습니다. 결국 에곤 실레는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료 예술가들을 모아서 신예술가그룹'을 만들었어요. 신예술가그룹은 비록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인물의 감정을 미술로 나타내는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면서, 비엔나 예술계에 세다 교체를 알렸습니다.
이것은 10년 전, 구스타프 클림트가 비엔나 분리파를 만들었을 때를 상기시켜 주네요.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 평행 이론일까요? 주황색 꽃으로 장식된 보라색 식물은 정사각형의 화폭에 그려졌습니다. 식물의 배경은 금색과 은색 안료로 장식되어있어 화려합니다. 클림트의 영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에곤 실레의 화풍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화
1910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구스타프 클림트는 에곤 실레가 자신만의 예술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스승이었다. 당시 클림트와 실레의 특별한 관계를 눈여겨본 사람들은 실레에게 ‘은색의 클림트’, ‘충실한 추종자’와 같은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섬세하게 그려진 하얀색 국화는 비엔나 분리파가 지향한 장식 미술의 영향을 보여 준다. 공간감 없는 검은색 배경과 대조를 이루는 국화의 구성에서 19세기 유럽에서 크게 유행한 자포니즘과 일본 목판화의 특징이 엿보인다.
소년과 큐피드
안톤 콜리히 (1886–1950)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한 소년이 벽에 기대 서 있습니다. 사실 소년이라고 하기엔 어른에 가까운 건장한 신체와 큰 발을 가지고 있는데요. 어딘가 부끄럽고 어색한 모습입니다. 소년의 옆에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사랑의 신으로 나오는 큐피드가 긴 창을 들고 있습니다. 즉, 육체적 변화를 겪으며 사랑을 알게되는, 그야말로 성장 중인 소년을 표현했네요 이 작품을 그린 안톤 콜리히는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서 에곤 실레와 만났고, 신예술가그룹으로 활동했습니다.
콜리히와 신예술가그룹 예술가들은 1911년 작품을 출품했고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겐 클럽은 젊은 예술가들이 새롭게 추구하기 시작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지지하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전시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여성의 초상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 (1887–1973) 1914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머리가 헝클어진 여인이 무심한 듯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흰 블라우스에 값비싼 진주 목걸이를 한 이 여인은 부유한 후원자로 추정된다. 인물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며 감정을 담아냈다. 이 작품을 그린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는 배우이자 극작가였지만, 1910년대 초반 파리에서 미술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야수파를 비롯한 최신 예술 동향을 접한 뒤로 화가로 전향했다. 귀터슬로는 신예술가 그룹에서 에곤 실레, 안톤 파이슈타우어 같은 예술가들과 함께 활동했다.
푸른 옷을 입은 소녀
로빈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1890–1969) 1913/14년경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한 소녀가 허름한 벽 앞에 앉아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양팔을 맞잡은 자세는 고민에 빠져 있는 소녀의 복잡한 심경을 보여줍니다. 어두운 표정과 눈 주변이 붉어져 있는 것을 보니, 금방이라도 운 것 같습니다.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있으니, 소녀의 슬픈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을 그린 로빈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에곤 실레와 함께 신예술가그룹을 만드는 데 함께했습니다. 이렇게 인물의 감정을 차갑게 가라앉은 색채로 그린 것은 20세기 초 나타난 표현주의적 경향입니다. 함께 전시된 신예술가그룹 작가들의 작품을 한번 둘러보세요. 인물화를 그릴 때 그 인물의 감정을 표현해내고자 했습니다.
조용한 여성 (화가 어머니의 초상)
안톤 콜리히 (1886–1950) 1909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안톤 콜리히는 1911년 친분이 있던 예술가 단체 하겐 클럽의 전시장에서 열린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 아홉 점을 출품했다. 하겐 클럽은 젊은 예술가들이 새롭게 추구하던 표현주의 예술을 지지하고 그들의 혁신적인 작품을 전시했다. 이 전시회로 신예술가 그룹은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콜리히가 당시 출품했던 아홉 점 중 하나인 이 작품은 어머니의 초상화다. 어두운 옷을 입은 화가 어머니의 모습이 밝게 빛나는 배경에서 돋보이며 실루엣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조명이 가끔씩 작품 감상을 방해한다. 얼굴 자세히 감상 하세요.
오스카 코코슈카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표현주의 경향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던 오스카 코코슈카는 1900년대 비엔나 예술가들의 초상화가이자 작가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클림트의 초청으로 참여한 ‘비엔나 예술 전람회’(1908)에서 코코슈카는 ‘야수 중의 야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거칠고 과감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코코슈카는 인물화에서 단순한 외형 묘사를 넘어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했습니다. 특히 폭발하는 듯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로 1차 세계대전으로 불안해진 인간의 심리를 묘사했습니다. 미술뿐 아니라 연극, 문학 등 장르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실험으로 대중의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를 이끈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소녀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05/06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가 비엔나 예술공예학교의 학생 시절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옷을 입지 않은 어린 소녀가 벽에 기대어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 다양한 갈색을 조화롭게 사용했으며, 코코슈카 특유의 표현주의 화풍이 드러나기 이전 전통 화법을 보여 준다.
목화솜 따는 소녀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08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요제프 호프만의 제안으로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의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직선적이고 단순한 윤곽선, 음영이 없는 색면의 사용, 두꺼운 서체 등은 비엔나 분리파가 만든 포스터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 준다. 이 포스터는 루돌프 칼바흐가 디자인한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의 또 다른 포스터와 매우 비슷한 양식이다. 코코슈카와 칼바흐는 비슷한 시기에 비엔나 예술공예학교에서 공부했으므로 동료로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피에타
연극 <살인자, 여성들의 희망>을 위한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09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공포영화와 같은 이 충격적인 그림은 오스카 코코슈카가 직접 극본을 쓴 연극'살인자, 여성들의 희망'의 홍보 포스터입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이런 포스터를 그린 걸까요? 이 연극은 남자와 여자의 파괴적인 사랑과 갈등을 주제로 합니다. 강렬하고 파괴적으로 과장된 포스터는 남녀 관계의 고통스러움과 혼란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스카 코코슈카는 이번 전시가 주목하는 '6명의 꿈꾸는 계술가들'중 네 번째로 만나볼 인물입니다. 그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교류하며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작업하기도 했지만, 곧 자신의 색깔을 찾아 표현주의적 경향을 드러내는 작품을 하게 됩니다. 코코슈카는 클림트의 초청으로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에서 데뷔했고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내면의 심리를 파고드는 독특한 표현법이 돋보이는 인물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극 문학 등 장르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실험으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지평을 넓힌 개척자였습니다
"얼굴 인식" 강연을 위한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1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방금 전에 보신 파괴적인 사랑과 갈등을 그린 연극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예상하셨겠지만 정말 끔찍했습니다. 급기야 오스카 코코슈카에게는 '문제아'라는 별명도 붙었어요. 그리고 몇 년 후 코코슈카는 강연에서 얼굴이 단순히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영혼을 담아내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어요. 전통적인 초상화는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만 코슈카는 변화무쌍한 감정과 영혼을 포착해 그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이 작품은 그 강연의 홍보 포스터입니다. 이런 코코슈카의 생각은 강연을 듣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불쾌감을 주었습니다. 영혼을 그림으로 그린다니, 심령술사가 할 법한 이야기로 들렸던 것 같아요. 포스터의 남자는 코코슈카 자신을 그린 것입니다. 얼굴로 영혼을 그려낸다고 했으니, 한번 볼까요? 자글자글한 주름과 움뚝 팬 눈으로 그려진 코코슈카의 얼굴은 고통 받는 영혼 그 자체 같네요. 코코슈카는 자신이 비엔나 예술계에서 느낀 고립감을 이렇게 자화상으로 표현했습니다.
양쪽에서 본 화가의 자화상
취리히 볼프스베르크에서 열린 코코슈카 전시회를 위한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23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는 1923년 가을, 취리히의 갤러리 볼프스베르크에서 열린 자신의 단독 전시회 포스터로 같은 해에 그린 자화상을 활용했다. 왼손에 붓을 들고 관람자를 쳐다보는 그림 속 인물은 예술가이자 개인전을 개최하는 주인공인 코코슈카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이 개인전은 코코슈카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넘어 국제적인 예술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코코슈카 작품느낌 너무 좋다.
헤르만 슈바르츠발트 II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6년 캔버스에 유화 브로에르 자선 재단
이 작품의 주인공 헤르만 슈바르츠발트는 아내와 함꼐 오스트리아의 젊은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들 부부의 아파트는 비엔나 건축가 아돌프 로스가 디자인했고, 오스카 코코슈카나 에곤 실레 등 표현주의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이들을 재정적으로도 후원하고 작품을 발표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스카 코코슈카는 헤르만의 초상화를 2번 그렸습니다.이 작품을 보시면 헤르만이 입은 옷과 뒷배경이 거의 비슷한 색으로 그려져 헤르만의 얼굴과 손에 시선이 집중됩니다. 얼굴의 주름과 혈관, 과장된 손가락과 손의 크기는 헤르만의 성격과 내면을 표현하고자 한 코코슈카의 독특한 기법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헤르만의 성격이 어때 보이시나요?
빅토어 리터 폰 바우어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4년 캔버스에 유화 브로에르 자선 재단
1914년 무렵 오스카 코코슈카는 넓은 붓을 이용해 물감을 두껍고 대담하게 칠했다. 이 작품에서는 어두운 녹청색 배경에 짙은 녹색 양복을 입고 있어 그림 속 주인공의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코코슈카는 날카로운 선으로 얼굴 표정을 그렸으며, 얼굴과 마찬가지로 손도 돋보이게 표현했다. 산업가이자 예술 후원자였던 폰 바우어는 혁신적인 건축가 아돌프 로스와 친분이 있었다. 당시 코코슈카의 후견인이던 로스가 자연스럽게 폰 바우어에게 코코슈카를 소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화상
막스 오펜하이머 (1885–1954)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슷한 색감의 뒷배경으로 얼굴과 손을 강조한 것은 앞서 보았던 코코슈카의 인물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작품은 막스 오펜하이머의 자화상입니다.오펜하이머와 코코슈카는 비슷한 시기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으며, 동료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림 속 오펜하이머는 미간을 찡그린 의심 많은 눈빛으로 우리의 시선을 살짝 피하고 있네요. 길게 왜곡되고 칼라비틀어진 것 같은 오펜하이머의 손은 마치 고통스러운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자화상은 오펜하이머가 주요 전시회에 모두 출품했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오펜하이머는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독일과 스위스에서도 활동하며 인물화로 새로운 예술적 경향을 탐구했습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2관에는 사진과 같이 앉아서 휴식과 함께 작품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대략 여기까지 한 시간 반이 조금 덜 걸렸는데요.
휴식하면서 다음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에너지를 모아보는 것도...
리하르트 게르스틀
리하르트 게르스틀은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보다 훨씬 앞서서 표현주의의 길을 개척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웠지만 전통적인 화법을 거의 구사하지 않았고, 거칠고 자유로운 붓놀림과 과감한 색채로 인물을 표현했습니다. 독자적으로 활동한 게르스틀은 시대에 앞선 예술 양식을 선보였습니다. 게르스틀은 20세기 초 현대 음악의 창시자인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깊이 교류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음악가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예술적 실험과 도전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게르스틀이 후기에 그린 초상화들은 세부 묘사 없이 인물의 형태만 남긴 추상화에 가까웠습니다. 그의 실험적인 작품들은 당시에는 예술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새롭고 독창적인 화법으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문을 연 선구자였습니다.
스마라그다 베르크
리하르트 게르스틀 (1883–1908) 1906/07년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섞지 않고 점을 찍어 표현하는 점묘법을 활용했는데, 도란색과 보라색이 주로 사용됐습니다. 게르스틀이 그린 이 여인은 피아니스트 스마라그다 베르크로, 20세기 초 표현주의 음악가로 유명한 알반 베르크의 여동생입니다.
알반 베르크는 리하르트 게르스틀과 함께 어울렸던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친구들 중 하나입니다. 아르놀트쇤베르크는 12음기법이라는 새로운 작곡 방식을 만드는 등현대 음악의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게르스틀은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던 음악가들과어울리며 예술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잔잔한 인물화는 게르스틀의 초기 양식을 보여줍니다
반신 누드의 자화상
리하르트 게르스틀 (1883–1908) 1902/04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침착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남자의 머리 주변은 밝은 색으로 그려져 마치 후광이 빛나는 것 같습니다. 손과 같은 신체의 다른 부분은 비교적 간단하게 그려졌지만, 얼굴만큼은 깊은 인상을 남길 만큼 강렬합니다. 남자의 시선은 우리를 향하는 것 같지만, 우리 너머의 더 먼 곳을 응시하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림 속 이 남자는 리하르트 게르스틀입니다. 그는 현재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표현주의자이지만,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보다 앞섭니다 그는 1908년, 25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게르스틀은 비엔나 분리파와 같은 단체에 속하지 않았지만 거칠고 자유로운 붓놀림과 과감한 색채로 자신만의 표현방식을 찾아나갔습니다. 그의 후기작들은 세부 묘사 없이 형상만을 남겨 추상화에 가까웠을 정도였습니다.
게르스틀은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시대를 앞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고 평가됩니다
5부. 선의 파격, 젊은 천재 화가의 예술 세계
20세의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확립한 에곤 실레는 1900년 비엔나의 표현주의 선구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의 예술 인생은 짧았지만 인간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독창성은 모더니즘 예술의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됩니다. 특히 에곤 실레는 자아 정체성, 고독, 욕망 등 심리적이고 실존적인 주제를 자신만의 선과 색으로 담아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혼자라는 두려움과 고독감, 한없이 불안한 마음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내면의 고통과 갈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에 표현했습니다. 이제 누구보다 솔직하게 인간을 탐구하고 그려냈던 예술가, 에곤 실레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의 가장 대표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아마도 유일하게 긴 줄을 서야만 작품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패널에 유화 물감과 불투명한 물감 레오폴트미술관
6명의 꿈꾸는 예술가들' 중 마지막으로 만나볼 인물은 바로 에곤 실레입니다. 그는 '인간'에 대해 가장 솔직하게 접근한 예술가입니다. 에곤 실레는 죽음에 대한 공포,고독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과 같은 인간의 감정을 자신만의 선과 색으로 표현했는데요, 이제부터 그가 그려낸 작품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에곤 실레는 20세기 초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그 어떤 화가보다도 자신의 얼굴과 몸, 그리고 성격에 대해 깊이 탐구했습니다. 그가 남긴 100점이 넘는 자화상과 4천점이 넘는 밑그림에서 그가 얼마나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자화상에서 그는 깔끔한 흰색을 배경으로 검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실레의 옆에는 꽈리 열매가 강렬한 붉은 색으로 그려져 좌우의 균형과 조화로움을 유지합니다. 에곤 실레는 어깨를 비틀고 우리는 살짝 내려다보고 있네요. 그의 전성기에 그려진 만큼, 예술가로서의 자신감이 눈빛으로 드러납니다. 끊어질 듯 섬세하게 이어지는 선의 표현은 그만의 독창적인 특징입니다. 그의 예민한 성격과 예술가로서의 완벽주의도 잘 드러납니다
소녀의 초상
에곤 실레 (1890–1918) 1906년 종이에 검은 분필과 목탄 레오폴트미술관
1906년, 열여섯 살의 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고의 미술 학교인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러나 엄격하고 보수적인 체제와 교수법에 반발해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둔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던 해에 그린 이 작품은 그가 드로잉에 얼마나 뛰어난 재능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긴 머리를 한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1907년 캔버스에 유화 E. 와 H. H. 컬렉션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는 에곤 실레의 자화상이다. 강한 빛을 받아 밝게 표현된 왼쪽 얼굴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빛은 실레의 이마, 뺨, 턱으로 쏟아지며 얼굴의 특징을 매우 섬세하고 정확하게 드러낸다. 다양한 채도의 갈색과 보라색으로 칠해진 머리카락은 개성 있고 생동감이 넘친다. 이 자화상은 실레 자신을 깊이 있게 표현하면서도 내면의 강렬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에곤 실레
철도회사 역장이었던 에곤 실레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랐지만, 실레는 두 살 때부터 색연필과 종이를 잡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실레는 삼촌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삼촌의 도움으로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실망했고, 평생 스승으로 믿고 따랐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원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합니다.
실레는 클림트의 초청으로 참여한 전시회에서 유럽 거장들의 작품 세계를 접했습니다. 초기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지만 곧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인물을 표현하는 실레의 독특한 선과 뒤틀린 몸은 곧 그의 화풍으로 자리 잡았고 비엔나 예술계에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존재에 대한 고민을 자신만의 선과 색채로 풀어낸 방식은 에곤 실레를 세기 전환기의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스스로를 보는 이 II (죽음과 인간)
에곤 실레 (1890–1918)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 자신을 경영 잃어버리고야 말 것 같은 '정체성의 위기'를 깊이 탐구했습니다. 그는 정말, 불안하고 나약한 사람이었을까요? 그림 속 인물은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다른 나'의 유령 같은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속 주인공은 원래 나눠질 수 없는 자아가 분리되어 불안정한 상태에 있습니다. 창백하게 표현된 유령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유령이 주인공의 어깨를 감싸고 있어, 공포에 떨고 있는 것 같아요. 실레는 어두운 색깔과 날카로운 선으로 주인공이 느끼는 고통과 불안감을 생생하게 표현했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아래에서 올라온 매우 크게 그려진 손인데요, 처음에는 주인공의 손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이 손은 주인공의 것도, 유령의 것도 아닙니다. 게곤 실레에게 손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술가에게 손은 가장 기본적인 표현의 도구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더없어서는 안 될 '나 자신, 그 자체'입니다. 정체성의 위기와 죽음을 앞둔 공포, 에곤 실레는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던 걸까요? 죽음으로써 예술가의 삶이 끝나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요?
계시
에곤 실레 (1890–1918)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거의 남기지 않았지만, 이 작품에 대해서는 편지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어요. 그만큼 애정이 컸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편지의 내용을 읽어 드릴께요. 작품에 담긴 의도를 찬찬히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위대한 인물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이 작품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림은 스스로 빛을 발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의 빛을 평생 소비하며 살아간다. 빛이 모두 소진되면 그들은 더 이상 빛나지 못하게 된다. 뒤돌아선 사람은 위대한 인물에 매혹되었다. 그는 눈을 뜨지 않고도 세상을 보는 위대한 존재들에게 무릎을 끓고 경의를 표하고 있다. 위대한 존재가 발하는 빛은 다양하고 신비로운 색으로 표현됐다. 무릎을 끓은 작은 사람은 크게 빛나는 위대한 존재와 합쳐져 하나가 되고 있다. 이것이 내가 그린 그림 <계시>에 대한 설명이다.
예술가라는 ‘자아 정체성’의 위기
에곤 실레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레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뒤틀린 몸과 해골 같은 얼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은 인간의 죽음, 예술가라는 정체성이 끝나버리는 순간에 대한 불안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실레는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겼을 정도로 자신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자기 몸을 거울에 비춰 보며 다양한 자세와 구도를 연구했습니다. 실레의 자화상은 자신의 겉모습을 그린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술가라는 정체성을 탐구하기 위한 도구였으며, 에곤 실레만의 독특한 화법을 보여주는 주제였습니다.
뒤틀린 자세의 누드 자화상
장식이 있는 가운을 입은 누드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1909년 종이에 연필과 색분필 레오폴트미술관
한쪽으로 몸을 돌려 정확히 관람자를 바라보는 자화상이다. 실레의 작품에서 보이는 독특한 선의 표현은 인물의 연약함과 강렬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몸을 옆으로 돌린 채 어깨 너머로 정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긴장감이 감돈다. 실레가 걸친 빨간 장식 가운이 팔에서 흘러내려 벗은 몸의 일부만을 가리고 있다. 배경을 비워 인물에게만 집중하게 만든 구도로 인해 실레의 독창적인 화풍과 강렬한 인체 표현이 더욱 돋보인다.
에곤실레를 위한 마지막 공간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 마지막 공간인 5부 공간은 에곤실레를 위한 공간 입니다. 이번 전시회를 주관하는 레오폴트미술관이 에곤 실레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5부에서 1~4부까지 아쉬웠던 부분이 한 번에 해결됩니다.
남성의 반신 누드 뒷모습
에곤 실레 (1890–1918) 1910년 종이에 검은 분필과 불투명 수채 레오폴트미술관
1910년 무렵 에곤 실레는 누드와 자화상을 중심으로 작업했고 훨씬 성숙한 표현주의 화법을 선보였다. 실레는 자화상을 그릴 때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 가며 자세를 연구했다. 이 반신 누드의 남성 역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빠르고 강한 선으로 그린 남성의 깡마른 몸은 과장된 비례와 비틀린 자세로 실레 특유의 인체 표현을 보여 준다. 빨간색, 파란색, 보라색으로 옅게 칠해진 몸과 굽은 손의 색감은 과장된 표현을 강조한다.
시인
에곤 실레 (1890–1918)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밑그림 없이 빠른 붓질로 그린 이 작품에서 에곤 실레는 자신을 뒤틀린 자세를 한 시인으로 표현했다. 어색할 정도로 심하게 왼쪽으로 꺾여 있는 실레의 머리는 뒤쪽 흰색 공간에 둘러싸여 있다. 눈썹을 치켜뜬 의심에 찬 눈초리는 옆을 향하고 있다. 창백해 보이는 몸에 검은색 윗옷만을 걸친 실레는 어두운 배경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오른쪽 손목을 살짝 잡고 있는 왼손 아래로, 배꼽과 성기를 붉은색으로 그렸다.
어머니와 아이, 모성에 대한 갈망
1904년 새해 전날, 그의 아버지가 매독으로 사망한 후, 당시 14세였던 에곤 실레는 가정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실레의 어머니는 그가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정착하기를 바랐지만, 실레는 예술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실레는 어머니와 많은 갈등을 겪었고, 따뜻한 정서적 교감을 경험하지 못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실레는 어머니와 복잡한 관계를 형성했고, 동시에 여동생 게르트루드와의 친밀한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실레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와의 불안정한 관계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결합한 것입니다. 죽음은 실레의 예술 세계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재작업: 프리츠 보트루바 (1907–1975)
디자인: 1917년경, 재제작: 1965년 인조석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가 자기 얼굴을 조각한 매우 독특하고 유일한 자화상이다.
실레는 숱이 많은 머리를 뒤로 빗어 넘겼고, 고개를 살짝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하다. 조각에 관심이 많았던 실레는 오귀스트 로댕 같은 조각가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1917년 처음 만든 이 자화상 조각에 대한 실레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작품은 1965년 주조한 일곱 점의 청동 조각 가운데 하나다.
어머니와 두 아이
에곤 실레 (1890–1918) 1915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의 부모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15살 때 사망했고, 어머니는 미술을 배우고 싶은 실레를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에게 따뜻한 애정을 느껴보지 못한 실레는 불안한 관계에 있는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품에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피에타'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온몸을 녹색 천으로 감싼 어머니가 두 아이를 안고 있어, 에곤 실레가 '피에타'의 구도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외 아들의 얼굴은 죽은 듯 해골처럼 창백하게 그려졌고, 원작의 피에타'의 구도에 존재하지 않는 어린 아이가 공중에 떠 있습니다.이 어린 아이는 색색의 줄무늬 옷을 입고 죽은 듯한 어머니와 다른 아이를 절망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잘 지내고 싶었던 에곤 실레의 복잡한 감정들이 작품 곳곳에 표현돼 있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아이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패널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작은 크기의 화폭에 그려진 이 작품은 성화인 성모자상을 연상시킨다. 공간을 알아볼 수 없는 어두운 배경 앞에 어머니와 아이가 두꺼운 붓질로 그려져 있다. 두 사람의 머리는 서로 이어져 있는 듯하다. 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점잖은 표정으로 아이를 보고 있으나, 아이는 반짝이는 눈을 크게 뜨고 관람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이의 손은 어머니와 아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상징한다.
애도하는 여성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패널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어두운 천으로 머리를 감싼 여인의 얼굴과 창백한 피부는 마치 해골을 연상시킨다. 여인의 머리 뒤로 또 다른 인물의 얼굴이 살짝 드러난다. 눈썹을 치켜뜨고 입을 꼭 다문 채 관람자를 바라보는 또 다른 인물은 실레가 자신을 표현하던 방식과 비슷하다. 실레는 인물화에서 종종 두 개의 얼굴이나 다른 신체 부위를 사용해 인물 내면의 갈등, 분열된 정체성과 같은 어두운 감정을 드러냈다. 이러한 표현은 인간 심리를 깊이 탐구한 실레가 이중적인 감정이나 복잡한 내면을 다루던 방법이었다.
천을 두른 여성의 뒷모습
<개종 II>의 부분 에곤 실레 (1890–1918) 191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이 작품의 원작인 <개종 Ⅱ>에는 가운데서 설교하는 인물을 열두 사람이 둘러싸고 있는 장면이 그려졌지만, 현재는 사라져 일부분만 남아 있다. 종교적 상징을 담은 <개종 II>는 인간 내면의 변화를 주제로 하여 영적 각성이나 내적 갈등을 표현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어깨에 천을 두른 여성의 비틀거리는 듯한 뒷모습에서 고독과 불안함이 느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 나무 (겨울나무)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캔버스에 연필과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바람에 휩쓸린 앙상한 나무가 하늘로 뻗어 있습니다. 꼭 나뭇가지가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잘 보면 나무의 기둥부분이 하늘과 같은 색으로 그려져 있습니다.마치 기둥을 잃은 나뭇가지가 바람이 몰아치는 하늘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듯합니다.고립된 외로움과 동시에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강렬한 생명력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전시회에 출품됐을 때, 한 미술사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의 죽어가는 자연이 가지는 특별한 분위기의 마법과 같다. 에곤 실레는 잎이 없는 앙상한 나못가지로 생명을 그렸다' 이렇듯 에곤 실레는 풍경화 속 자연을 인간이 느꼈을 법한 감정을 넣어 의인화하여 표현했습니다. 자서전과 같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실과 고립을 그린 검은 풍경화
에곤 실레는 마치 사람을 그리듯 도시와 자연 풍경에 감정을 담아냈습니다. 풍경은 예술가의 내면 심리와 감정을 나타내는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기묘하게 뒤틀리고 어두운 도시나 강변 풍경을 그린 작품들에서 우리는 실레의 고뇌와 시대적 불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실레는 인간의 상실감과 고립, 정서적 불안감을 검은 풍경화로 그렸습니다. 특히 자신이 보았던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유롭게 다시 조합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블타바강 가의 크루마우 (작은 마을 IV)
에곤 실레 (1890–1918) 1914년 캔버스에 유화, 검은 분필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시선으로 크루마우의 슐로스베르크 언덕 건너편 마을 풍경을 그렸다. 마을 집들을 노란색, 흰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으로 표현했는데, 실레가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그린 건물들에서는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강물과 지붕은 대체로 어두워 실레가 도시 풍경에서 반복적으로 보여 준 고독과 소외감이 묻어난다.
작은마을 III
에곤 실레 (1890–1918) 1913년 캔버스에 유화,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색색의 집들이 빼곡하게 늘어선 곳 아래로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강물과 길, 집의 지붕이 모두 어두운 색으로 그려져 전반적으로 암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에곤 실레는 기묘하게 뒤틀린 검은 도시 속에 자신의 생각과 고민을 담아냈습니다. 그는 창의적이지 못한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안에서 고립된 자신이 느낀 불안감을 검은 도시 풍경화로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체코의 체스키 크룸로프인 남부 보헤미아 지역의 중세 마을을 그린 것입니다. 실레는 이 지역에 살면서 여러 점의 도시 풍경화를 그렸지만, 마을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여러 곳에서 본 도시의 모습을 자유롭게 재조합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도시에서 머물며 느낀 소외감을 생명력을 잃은 죽은 도시처럼 검은색으로 그려낸 실레만의 표현법이 돋보입니다.
클림트와 실레의 누드 드로잉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는 각각 4,000장에 달하는 드로잉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중 많은 부분이 누드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누드를 표현한 방식과 목적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클림트는 누드 드로잉에서 여성의 몸에 담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습니다.
그의 드로잉은 섬세한 선과 세밀한 묘사가 특징인데 부드러운 곡선으로 여성의 매력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실레의 드로잉은 현실적이고 과감합니다. 그는 왜곡된 인체와 뒤틀린 자세를 날카로운 선으로 표현해 인간의 고독과 불안, 그 속에서 움트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도발적인 드로잉은 곧 실레 그림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에서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공간 중 하나...
오른쪽에서 본 여성의 상반신 누드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916년경 일본 종이에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4천장에 달하는 드로잉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많은 작품이 누드일 정도였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흔히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의 중심어 성적 욕망이 있고, 이로 인해 정신적 갈등이 일어난다고 분석했습니다. 클림트와 실레는 인간의 본능을 예술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에로티시즘에 대한 접근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클림트의 드로잉을 보시면, 독특한 코, 도톰한 아랫입술 우울한 분위기의 눈 등 섬세한 얼굴 표현이 돋보입니다. 클림트는 여성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그려냈습니다. 그는 여성의 매력을 표현하면서도 장식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아름답고 환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죠. 클림트가 보여주는 드로잉은 섬세하면서 절제된 표현이 특징입니다
왼쪽에서 본, 다리를 올리고 있는 여성의 반신 누드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917년 일본 종이에 인도 잉크 레오폴트미술관
클림트는 여인이 침대에 푹 파묻힌 느낌을 주기 위해 길고 날씬한 비율을 강조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정리된 윤곽선 대신 불규칙하게 겹친 선들을 사용하여 불안한 느낌을 준다. 거칠게 떨리는 선은 익숙하지 않은 펜과 잉크로 그렸기 때문이지만, 클림트의 후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특히 이 작품은 형태를 간략하게 암시하듯 그리면서 그 안에 담긴 감정을 드러낸 클림트 말년의 경향을 잘 보여 준다.
클림트의 누드 스케치를 감상했다면, 반대편 공간은 에곤 실레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같은 듯 전혀 다른...
팔이 올라간 여성의 누드
에곤 실레 (1890–1918) 1910년 종이에 검은 분필 레오폴트미술관
이 그림은 여성의 머리, 팔, 몸통을 본 대로 빠르게 스케치한 듯하지만, 양팔의 평행선이 방해받지 않도록 턱 부분을 생략하는 등 실레가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곳 위주로 그려졌다. 실레의 초기 작품들은 장식적인 표현을 추구했으나, 이 시기에는 몸의 구조에 집중했다. 팔과 몸통의 윤곽선이 해부학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팔을 들어 올린 몸의 안정적인 구조에 중점을 두고 표현했다.
올라간 속옷을 입고 누워 있는 여성의 누드
에곤 실레 (1890–1918) 1915년 종이에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이 작품에서 실레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와 선으로 인체를 표현했다. 이러한 방식을 시도한 시기는 짧았지만 실레는 독특한 양식을 보여 준다. 이 작품에서는 여인의 말려 올라간 속옷을 아무렇게나 낙서하듯 그렸다. 모델의 머리는 소용돌이 같은 선으로, 얼굴은 반원 등 간략한 선으로 그려 마치 인형을 보는 듯하다.
이 그림을 그리던 1915년 무렵, 실레는 개성 있는 얼굴 대신 개인의 특징을 생략한 기하학적 형태로 인물을 표현했다. 실레의 특징이던 ‘말하는 듯한 눈’도 텅 빈 구멍처럼 묘사했다.
파란 스타킹을 신고 앞으로 몸을 숙인 누드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종이에 연필과 불투명 수채 레오폴트미술관
이 작품을 보면, 척추와 근육이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마른 여성이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있습니다. 몸을 표현한 섬세한 선과 부분적으로 칠해진 색은 이 여성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매우 힘들어 보이지만, 섬세한 구도로 안정적인 자세를 만들어낸 것이 신기하네요. 그만큼 이 여인이 느끼고 있는 고통과 고뇌를 표현하기 위한 실레의 고민이 느껴집니다.
회색 망토를 두르고 무릎을 꿇은 여성 (발리 노이칠)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종이에 검은 분필, 수채, 불투명 수채 레오폴트미술관
이 여인은 에곤 실레의 연인이었던 발리 노이칠입니다. 그녀는 에곤 실레의 모델이었고 그의 많은 작품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실레의 작품에 나오는 붉은 머리의 여성은 대부분 발리를 모델로 한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수줍은 듯 당찬 얼굴의 발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과 회색 가운의 주름이 세밀하게 표현됐고, 특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 발이 강조되어 안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실레와 발리는 생활고를 겪으며 여러 지역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실레는 1914년 정착한 곳에서 만난 중산층 집안의 여성과 결혼을 결심합니다. 결국 발리는 에곤 실레를 떠나게 됩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의 마지막 공간입니다.
에곤실레의 작품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의 에로티시즘 작품이 빠질 수 없습니다. 그만의 독특한 누드 작품을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불안함에서 안정감으로, 달라진 누드
에곤 실레는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특히 경력 초기에 생활고에 시달리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칠과 연인 관계였으며, 그녀는 주변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실레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안정적으로 정착하기를 원했던 실레는 결국 발리와 결별하고, 1915년 이웃으로 만난 중산층 집안의 딸 에디트 하름스를 만나 결혼 했습니다. 에디트는 따뜻하고 헌신적인 성품으로 실레에게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에곤 실레는 누드에서 주로 마르고 긴장된 모습으로 내면의 불안함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후기에 실레가 그린 인물들은 대체로 풍만하고 여유로운 모습입니다. 아내 에디트를 만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실레의 감정이 반영된 걸까요? 인물의 모습은 변화되었지만, 생명력을 강조하고 심리적 주제들을 탐구한 그의 예술 세계는 한결같아 보입니다.
누워 있는 여성
에곤 실레 (1890–1918) 1917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에게 누드는 단순한 육체의 묘사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인 욕망과 고독을 대하는 내면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안정된 정착 생활을 원했던 에곤 실레는 1915년 중산층 가정의 딸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했습니다.
에디트는 따뜻하고 헌신적인 성격이었고, 그것은 오랜 시간 실레가 원했던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예민하고 불안정했던 실레의 예술가적 성향과 달리 유복한 환경과 온화함을 가졌던 에디트의 성격은 실레에게 큰 안정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바로 실레의 아내, 에디트입니다. 양팔을 위로 올려 머리를 받친 팔의 자세와 넓게 벌린 다리가 가로로 긴 작품에서 대칭을 이룹니다. 실레는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있는 그대로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실레의 후기 작품에서는 이전의 깡마른 모습과 다른 풍만한 여성의 누드가 그려졌습니다. 결혼 이후 심리적으로 안정된 실레가 임신한 에디트를 보며 느낀 감정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요?
안타깝게도 1918년 유럽을 덮쳤던 스페인 독감으로 아내 에디트는 아들을 임신한 상태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3일 후, 에곤 실레도 세상을 떠납니다
서 있는 세 여성 (부분)
에곤 실레 (1890–1918) 1918년 (미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에곤 실레가 생을 마감하자 미완성으로 남게 된 작품이다. 세 여성은 모두 다른 표정과 자세를 하고 있다. 옆으로 몸을 돌린 가장 왼쪽의 여성은 무언가 이미 체념한 표정이다. 가운데 여성은 눈을 크게 뜨고 침착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이 여성에게 기댄 오른쪽 여성은 긴장을 풀려는 듯 눈을 감고 있다. 이 작품은 실레가 말년에 보였던 새로운 회화 양식을 잘 보여 준다.
에필로그/ 예술에는 자유를
전통의 벽을 넘어 새로운 양식에 도전하며 예술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해 왔습니다. 그 역사 속에서 각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이끈 선구자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났던 ‘꿈꾸는 예술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비엔나 분리파가 오스트리아 예술에 심은 ‘도전과 실험’이라는 나무는 에곤 실레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자유’라는 열매를 선물했습니다.
그들의 도전과 실험은 비엔나 예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끌었고, 자유를 꿈꿨던 예술가들은 ‘비엔나 1900년’의 선구자가 됐습니다. 전통의 틀을 깨고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했던 이들의 시대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선사합니다.
오늘 소개한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는 얼리버드 티켓팅 이후 너무나 기다리던 전시회 였는데요. 에곤 실레의 다양한 여러 원작들을 만나본 부분은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클림트는 약간 사기당한 느낌이 드네요. 제가 아는 클림트의 작품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작품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오늘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가 오늘 오픈했는데요. 얼리버드 예매를 통해 오늘 다녀 왔습니다.
오늘은 이번 전시회 티켓할인 및 도슨트, 오디오가이드, 주차장 / 주차시간, 포토존, 아트샵, 물품보관함, 전시회구성 등 관람에 필요한 기본 정보 공유합니다.
| 티켓 예약, 현장발권, 할인정보
| 얼리버드 티켓 할인 & 문화가 있는날 할인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티켓 할인은 종료 되었습니다. 현재는 매월 마지막 수요일(12. 25, 2. 26.) 문화의 날에만 각 권종 50% 할인이 가능하네요.
저는 얼리버드 티켓팅을 통해 할인된 가격인 13,000원에 관람하고 왔습니다.
| 현장발권은 바로 가능
온라인 예매는 마감되었지만, 현장 티켓은 여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방문한 전시회 개막일 날에는 바로 현장에서 전시회 티켓 발권이 가능했네요. 오히려 예약자가 일찍 방문하면 손해보는... 이상한 모습이 나왔네요.
아직 전시회 홍보가 덜 된것인지, 전시회 흥행성이 떨어지는 것인지.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입소문 나기는 어려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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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슨트 & 오디오 가이드 / 모바일 리플렛 : 이어폰 필수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도슨트는 없습니다. 다만 가이드온을 통해 별도 유료 오디오 가이드가 제공되니, 이어폰 꼭 챙겨 오세요.
| 가이드온 어플 사전 다운로드 받기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 오디오 가이드는 가이드온 앱을 통해 3,000원에 제공되는데요. 스트리밍 방식이 아닌 다운로드 방식으로 제공됩니다. 오디오가이드 파일 용량이 30Mb, 가이드온 앱이 없다면 추가 설치가 필요하니 현장에서 하기에는 다소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출발전에 앱 다운로드 및 파일 결제, 다운로드 하시고 국립중앙박물관 방문하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이번 가이드온 오디오 가이드 내용은 만족합니다. 비교적 충실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저는 사전에 한 번 설명듣고 전시회장을 방문하는데요. 오디오 가이드에 통상 제공되는 텍스트와 작품 이미지 중에 이미지는 제공되지 않아 다소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은 개선 되었을까?)
| 모바일 리플렛
해당 QR코드를 인식하면 전시회에 전시된 전 작품에 대한 모바일 리플렛이 제공됩니다.
작품에 대한 간단한 내용이 제공되는데요. 오디오가이드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부실합니다. (공짜 감안하면 만족)
| 무료 물품보관함
이번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1에는 물품보관함이 무료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전시장 반입금지 물품이나, 큰 가방, 두꺼운 옷등은 무료 물품보관함 이용하시면 됩니다.
보관함 이용하시고 꼭 보관한 보관함 번호 사진으로 찍어 두세요. 한 커플 고생 하시네요.
| 전시회 관람시 유의 사항 : 사진촬영 가능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사진촬영 가능합니다. 동영상 촬영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외의 다른 전시회 관람 조건은 다른 전시회 수준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 포토존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 포토존 소개입니다. 전시장 좋아하는 작품 앞에서 사진 한 장 남기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관람객도 많고 대표작은 줄 서 관람하는 상황이어서 어렵습니다.
야외 포토존은 티켓박스와 특별전시실 입구와 실내에 있는 거대한 전시회 현수막을 배경으로...
전시장 안에는 1실과 2실 사이 에곤실레의 작품현수막을 배경으로 많은 분들이 기념사진 남기시네요.
이 외에 휴게 공간이나 전시회 마지막 공간들이 기념사진 촬영하기에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번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맨 마지막 공간에서 에곤실레 대표 작품과!!!
(다음이 예술품에 대한 검열 수준이 높아 모자이크 처리 합니다.)
| 아트샵 / 기념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아트샵은 전시장 건너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입장권이 없어도 아트샵 이용 및 구매 가능 합니다.
신용카드 커버는 신박했다는...
다만 스티커 형식의 카드 커버네요. 교통카드가 해당 버전으로 나왔다면 바로 겟 했을 듯...
가격 6,900원
다른 기념품들은 항상 다른 미술 전시회에서도 볼 수 있는 구성품
| 레오파드 미술관 기념품
레오파드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기념품이 한정판매되고 있네요.
이런 구성은 좋은 것 같네요. 다른 전시회도 이런 상품구성은 도입이 시급!!!
| 주차장 및 주차요금 할인
국립중앙박물관 주차장 주차요금은 소형차 기준으로 2본 2시간에 2,000원 매 30분당 500원 주차요금이 부과됩니다.
국가유공자나 경차, 전기차 , 하이브리드차량 등 친환경 차량은 50% 주차요금 할인됩니다.
주말 입차에 한 시간 걸린다고 했지만 10분도...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는 주말의 경우 주차장 진입에 1시간 이상 대기한다고 해서 전시회 예약시간 보다 1시간 30분 여유두고 방문 했는데요. 박물관 입구부터 주차까지 10분도 안걸렸습니다. 뭐 차이는 있겠지만, 안막힘...
경차와 하이브리드 전용 주차공간이 었어 너무나 좋네요. 그것도 전시장 진입로 근처에 있어 좋았네요. 다만 국립중앙박물관 주차장 차간 간격은 여유있지는 않습니다. 중대형차 주차하니...
다만 저공해 하이브리드 차량은 무인정산기 정산되지 않고요. 출차하면서 확인 후 결제가능합니다.
| 전시회 구성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는 국립중앙박물과 특별전시실 1에서 진행됩니다. 제 1실과 2실에서 7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간단하게 진행합니다. (다음 포스팅에서 작품 하나하나 리뷰 합니다.)
*** 황금빛 클림트를 기대했다면 왕실망~ 실레를 기대했다면 만족!
00. 프롤로그 비엔나에 분 자유의 바람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비엔나를 유럽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도시 확장 계획을 단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비엔나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꼽히는 유명한 건축물들이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과거 예술 양식의 모방과 재현에 그쳤습니다. 기대와 실망 속에 논란의 중심이 된 대도시 비엔나에는 각종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였고, 토론의 장이 펼쳐졌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이때 새로 지어진 건물에 벽화를 그리면서 크게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전통 양식을 그대로 따르는 일은 클림트의 뜻과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예술의 길을 탐구했고,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특별한 예술 운동을 시작합니다. 클림트는 새로운 도전을 꿈꾸던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클림트와 동료들이 만든 비엔나 분리파의 활동으로 이제 비엔나에 ‘자유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01. 비엔나 분리파, 변화의 시작
19세기 말 비엔나에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변화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예술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기득권과 맞서는 젊은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된 구스타프 클림트는 동료들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하여 과거의 관습과 예술 양식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의 초대 회장이 된 클림트는 활발하게 전시를 열어 작품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는 교류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회화뿐 아니라 공예, 삽화, 책 표지와 우표 디자인 등 일상의 여러 분야로 예술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그들의 예술 철학과 외국의 예술 동향을 알리는 잡지인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도 발행했습니다. 여러 예술 장르를 합쳐 하나로 완성된 아름다움을 구현한다는 ‘총체예술’의 개념은 비엔나 분리파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02. 새로운 시각, 달라진 오스트리아의 풍경
비엔나 분리파의 대다수 회원은 유럽으로, 일부는 아시아 지역까지 여행하며 새로운 예술을 접하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전시회를 열어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어떤 예술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오스트리아를 그린 풍경화가 나타났습니다.
전통 양식을 따르던 보수적인 아카데미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탐탁치 않아 했고, 당시 유럽에 퍼져 나갔던 예술적 자극에 대한 수용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비엔나 분리파는 새로운 시도와 자극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모방이 아닌 그들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들의 예술 철학과 도전은 이후 비엔나 예술계가 모더니즘으로 나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동료들은 공예도 예술과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하며,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예술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에서는 회화, 공예, 조각, 포스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였고, 예술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대중에게 알렸습니다. 1903년 콜로만 모저와 요제프 호프만은 일상의 물건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설립했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초기 디자인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유행한 장식 미술과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곡선 형태가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곧 기능성과 미학의 조화를 강조한 영국 *예술공예운동의 영향으로 기하학적 단순함을 중시하는 디자인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들의 철학은 이후 기능주의를 추구하며 설립된 예술학교 **바우하우스를 비롯해 여러 방면의 디자이너와 건축가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04. 강렬한 감정, 표현주의의 개척자들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불만이 많았던 에곤 실레는 1907년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난 뒤로 예술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클림트는 실레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았고, 그를 주변에 소개하고 후원을 받게 함으로써 독립적인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둔 실레는 동료들을 모아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신예술가그룹’을 결성했습니다. 개인의 감정을 색채와 형태로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한 신예술가그룹 화가들은 비엔나 예술계를 모더니즘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자유롭게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개척하며 비엔나 예술계에 세대교체의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05. 선의 파격, 젊은 천재 화가의 예술 세계
20세의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확립한 에곤 실레는 1900년 비엔나의 표현주의 선구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의 예술 인생은 짧았지만 인간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독창성은 모더니즘 예술의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됩니다. 특히 에곤 실레는 자아 정체성, 고독, 욕망 등 심리적이고 실존적인 주제를 자신만의 선과 색으로 담아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혼자라는 두려움과 고독감, 한없이 불안한 마음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내면의 고통과 갈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에 표현했습니다. 이제 누구보다 솔직하게 인간을 탐구하고 그려냈던 예술가, 에곤 실레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오늘 오픈한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관람후기 1부 전시정보 리뷰입니다. 2부에서는 전시작품 소개 중심으로 리뷰 합니다.
날씨가 많이 쌀쌀해 졌습니다. 이번 겨울시즌에도 큰 규모의 미술 전시회가 열리고 있거나 준비중인데요. 오늘은 이달 말인 11월 30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오픈 예정인 '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프리뷰 입니다.
| 전시회 개요
- 전시명: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Vienna 1900, The Dreaming Artists - From Gustav Klimt to Egon Schiele - 전시기간: 2024. 11. 30.(토) ~ 2025. 3. 3.(월) - 전시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 레오폴드 미술관 (Leopold Museum) 소장품 191점
국립중앙박물관은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레오폴트미술관과 협력하여 19세기 말 비엔나에서 변화를 꿈꿨던 예술가들의 활동과 모더니즘으로의 전환 과정을 레오폴트미술관 소장품 총 191점으로 선보입니다. 세기말 새로운 시대, 예술의 자유를 찾고자 구스타프 클림트가 창립한 비엔나 분리파의 역할과 동시대 예술가들의 활동을 미술, 음악, 건축, 디자인 등 다양한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라고 합니다.
| 에곤실레 컬렉션...
2001년 개관한 레오폴트 미술관은 50년 동안 엘리자베스와 루돌프 레오폴트 부부에 의해 수집된 5,000점 이상의 작품을 관리하고 있는 곳으로 주로 20세기 전반의 오스트리아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오스트리아 근현대 미술의 흐름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곳에는 에곤 실레, 구스타프 클림트, 오스카스 코코슈카, 리하르트 게르스틀 등의 작품이 있는데요. 에곤 실레의 컬렉션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큰 곳이라고 합니다.
레오폴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에곤실레의 작품과 구스타프 클림트의 죽음과 삶. 이번 한국 전시에서 두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지? 과연 전시회 부제와 같이 클림트와 실레의 작품이 과연 몇 점이나 우리에게 찾아올지는 아직 정확하게 나온 것은 없네요. (전시회 타이틀 생각하면 각각 10점씩은 만나볼 수 있겠죠?)
| 전시회 구성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릴 예정인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구성입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5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오스트리아의 19세기 말 예술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회화는 물론 공예까지 당시 유럽 미술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네요. 특히 프롤로그의 구스타프 클림트와 4부와 5부의 에곤실레 리하르트 게르스틀의 작품이 가장 기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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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화가로 오스트리아에서 클림트를 빼면 미술을 논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아르 누보(Art Nouveau)와 심볼리즘(Symbolism) 운동의 중요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대담한 색채와 섬세한 디테일, 그리고 성적이고 감각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클림트의 작품은 주로 인간의 욕망, 성, 죽음, 생명 등 심오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대요. 그의 대표작인 "키스" (The Kiss, 1907-1908)는 오스트리아 밖으로 반출이 불가한 작품으로 이번 전시회에서는 만나볼 수 없습니다. 또한 영화 우먼인골드로 유명한 작품인 "아델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7) 도 마찬가지.
우선 아래 작품은 이번 전시회에서 선보인다고 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수풀 속 여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수풀 속 여인》(The Woman in the Forest, 1918)은 클림트의 후기 작품 중 하나로, 주로 자연과 여성, 그리고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결합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그가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제작한 작품 중 하나로, 클림트의 예술적 스타일과 테마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클림트가 그의 창작 활동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자연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성과 신화를 포함한 다양한 상징적이고 감성적인 주제들을 탐구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수풀 속 여인》 역시 그가 여성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신비로움을 결합하려는 의도를 잘 보여줍니다. 클림트는 1918년에 사망하기 직전까지 이러한 작품들을 많이 제작했으며, 《수풀 속 여인》은 그가 전통적인 예술적 기법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물의 내면을 더 깊이 탐구하고자 했던 노력의 결과물로 볼 수 있습니다.
《수풀 속 여인》은 클림트가 그린 수많은 여성 초상 중에서도 독특한 작품으로, 여성과 자연을 하나로 묶어내며 그의 예술적 전환과 사상적 깊이를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클림트 디오니소스 제단 (1886)
《디오니소스 제단》**은 클림트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그가 고대 신화와 고전적인 미술에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그가 후에 발전시킬 독특한 스타일로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특히 그의 예술 세계에서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클림트가 고전적인 기법과 전통적인 주제를 통해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를 확립해가는 초기 시점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클림트 근접하는 뇌우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작품 중 《근접하는 뇌우》(The Approaching Storm)는 그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활동하던 시기의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실상 잘 알려진 작품 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으며, 일부 자료에서는 이 작품을 1903년 또는 1904년에 그려졌다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현재는 클림트의 주요 작품 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이 작품은 그의 예술적 발전과 테마적 접근 방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감정, 특히 폭풍우처럼 격렬하고 급박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해석됩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뇌우"는 대개 불안정하고 격렬한 감정을 나타내는 메타포로 사용됩니다.
아쉽게도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에서는 클림트의 상징인 황금빛 작품들을 만나보지는 못할 것 같네요. (현재 공개된 작품중에서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화가로, 강렬하고 독창적인 스타일로 20세기 초의 예술을 혁신한 인물입니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감정과 신체, 성을 주제로 한 강렬하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종종 육체적인 에너지와 감정적 긴장감을 강조합니다. 실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점차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한 예술가였습니다. 강렬한 표현주의 화가로 제가 클림트와 함께 가장 사랑하는 오스트리아 작가입니다. 참고로 그는 클림트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젊은 나이에 스페인 독감으로 요절한 너무나도 안타까운...
에곤 실레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은 실레의 전반적인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으로, 그가 추구한 표현주의와 감정적 탐구의 핵심을 잘 보여줍니다. 실레는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본능, 성적 요소를 탐구하며 그들의 불완전함과 고립된 상태를 드러냈습니다. 그는 자신을 왜곡된 형태로 그리면서, 자아와 내면의 갈등을 강조하고, 불안정하고 고립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탐구한 예술가였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예술적 비전이 결코 아름다움이나 완벽함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복잡한 감정적, 육체적 경험을 정직하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에곤실레 스스로를 보는이 II(죽음과 인간)
《스스로를 보는 이 II (죽음과 인간)》는 에곤 실레가 죽음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심오하게 탐구한 작품입니다. 실레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죽음과 불안정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직시하며, 자기 인식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감정의 강렬함과 인간의 고독한 본질을 강하게 전달하며, 실레 특유의 왜곡된 형태와 강렬한 선을 통해 감정적인 충격을 유발합니다. 실레의 예술은 내면적 세계의 깊이와 인간 존재의 본질적 고통을 탐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 작품은 그가 추구한 예술적 목표를 잘 보여줍니다.
에곤 실레 ‘몰다우 강변의 크루마우 풍경(작은 마을3)'
《몰다우 강변의 크루마우 풍경》은 에곤 실레가 전통적인 풍경화의 틀을 넘어서는 감정적이고 표현주의적인 방식으로 자연을 탐구한 작품입니다. 실레는 이 작품을 통해 자연과의 교감을 단순한 미적 재현이 아닌, 감정적 반응의 장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강렬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 그리고 감각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이 풍경화는 실레가 자연을 정서적으로 소화하며 표현주의적 기법을 사용해 그려낸 결과물입니다. 실레의 풍경화는 그가 인물화에서 다룬 내면의 갈등과 정서적 폭발을 그대로 자연에 투영한 예시로 볼 수 있습니다.
에곤 실레의 작품을 이야기하자면 그만의 화풍으로 에로틱한 (상황에 따라 19금 작품이된) 작품들이 먼저 떠오르는데요.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에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네요.
| 리하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 1883–1908)
리하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 1883–1908)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중요한 예술가로, 에곤 실레와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활동한 작가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작품은 강렬한 감정적 표현, 내면의 심리적 상태를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며, 자기 탐구와 자아의 고통을 주요 테마로 삼았습니다.
작가는 1908년 25살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남긴 작품은 100점이 채 되지 않지만, 그 안의 추상적이고 강렬한 표현은 수십 년을 앞서갔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리하르트 게르스틀 '반신 자화상'
다. 자화상은 단순한 외적인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가 느끼고 경험한 내면적 감정을 탐구하는 중요한 방편이었습니다. 게르스틀의 자화상은 그가 겪은 정신적 고통과 자기 인식의 혼란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며, 이는 그가 표현주의적 스타일을 채택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그의 자화상에서 나타나는 왜곡된 형태와 강렬한 감정 표현은 그가 추구한 예술적 목표인 감정의 시각적 전개를 잘 보여줍니다.
리하르트 게르스틀 '피아니스트 헨리카 콘의 초상'
리하르트 게르스틀의 《피아니스트 헨리카 콘의 초상》은 그가 추구한 감정적 표현과 표현주의적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게르스틀은 헨리카 콘을 단순히 외적인 인물로 그리지 않고, 그녀의 내면적 갈등과 감정을 왜곡된 형태와 강렬한 색조를 통해 시각적으로 전달하려 했습니다. 이 작품은 자기 표현과 감정의 강렬함을 중시한 게르스틀의 예술적 특징을 잘 드러내며, 표현주의 미술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입니다.
콜로만 모저 (Koloman Moser, 1868–1918)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예술가이자, 비엔나 분리파(세션)의 중요한 구성원 중 한 명입니다. 그는 회화, 디자인, 장식 예술에 걸쳐 활동하며, 미술과 디자인의 융합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모저는 비엔나 분리파(Wiener Werkstätte)의 창립 멤버로서, 당시 근대 공예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엔나 분리파는 공예와 미술을 결합하려는 시도였으며, 예술의 실용적 기능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했습니다. 이 움직임의 일환으로 모저는 그가 디자인한 작품들에서 기하학적 형태와 우아한 장식성을 강조했습니다.
메리골드(Marigolds), 1909
콜로만 모저의 《메리골드(Marigolds)》는 기하학적이고 장식적인 스타일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으로, 비엔나 분리파의 예술적 철학을 잘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자연의 형태를 기하학적 패턴과 색상의 조화로 재구성하여, 미적이면서도 기능적인 디자인을 추구한 예시로 볼 수 있습니다. 모저의 작품은 예술과 공예의 경계를 허물고, 미학적 아름다움을 실용적 기능과 결합하려 했던 시대적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콜로만 모저가 디자인한 와인잔
빈 공방은 중산층도 살 수 있는 합리적인 상품 가격을 매기기 위해 비용을 절감하려고 노력했다. 디자인과 생산 등 여러 공정을 각기 다른 회사에서 담당하는 분업이 대표적이다. 빈 공방에서 분업 방식으로 생산한 첫 번째 제품이 이 와인잔입니다. 상품 디자인부터 순수예술까지 다양한 시각예술을 통해 당시 빈의 모습과 분위기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이번 전시만의 매력을 상징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에서는 요제프 호프만 '격자무늬 꽃병', 오스카 코코슈가 '헤르만 슈바르츠발트II' 등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 예매 전쟁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는 일자별 시간별로 사전 예매를 받고 있습니다. 다른 전시회와 다르게 티켓 구입후 원하는 날짜와 시간에 방문이 불가능합니다. 일반 예매(온라인 예매)는 11. 18.(월) 오전 10시 시작해서 2주 간격으로 입장권 추가 판매 하는데요. 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미 11월 18일 오픈된 티켓은 이미 매진 이후 일정을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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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2 (월) 오전 10시 : 2025.01.01.(수)-01.15.(수) 입장권 판매 시작 (30분 단위 회차별 판매) - 12.16 (월) 오전 10시 : 2025.01.16.(목)-01.31.(금) 입장권 판매 시작 (30분 단위 회차별 판매) - 01.02 (목) 오전 10시 : 2025.02.01.(토)-02.15.(토) 입장권 판매 시작 (30분 단위 회차별 판매) - 01.16 (목) 오전 10시 : 2025.02.16.(일)-03.03.(월) 입장권 판매 시작 (30분 단위 회차별 판매)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6월 2일 부터 열리고 있는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관람후기 입니다. 정말로 힘들에 얼리버드 티켓팅에 성공해서 어제인 토요일 가족과 함께 관람하고 왔습니다.
| 기대보다 인기가 없나? 영국 내셔널 갤러리 명화전 현장발권 쉽네
워낙 힘들게 사전 예매를 했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하는 규모있는 전시회의 경우 당일 현장발권은 엄두도 낼 수 없었는데요. 이번 전시회 현장발권은 너무 수월해서 당황스럽네요.
오히려 사전 예약하고 일찍 방문하는 것보, 바로 발권하는 것이 대기 없이 빨리 입장이 가능한 경우가 생기네요.
사전예약의 경우 진 줄 서지 않고 별도 발권기를 통해 빠르게 발권 가능합니다..
| 전시회 기본 정보
제목 :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전시기간: 2023.6.2.(금)~10.9.(월) / 휴관일 : 9.29.(추석 당일)
예매 : 네이버, 티켓링크, 인터파크에서 2주 간격으로 입장권 추가 판매 진행
| 4개의 섹션 & 대표 작품 52점 국내 최초 공개 > 관람시간 2시간 내외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전시회에는 라파엘로 '성모자와 세례 요한', 카라바조 '도마뱀에 물린 소년, 렘브란트 '63세의 자화상', 컨스터블 '스트랫퍼드의 종이공장', 마네 '카페 콩세르의 한구석', 반 고흐 '풀이 우거진 들판의 나비' 등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회화부터 종교개혁......
20세기 초 근대 회화까지 유럽 작가의 이름과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내셔널갤러리 런던 대표 소장품 52점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관람 시간은 최소 2시간 생각하셔야 합니다. 특히 관람객이 많아 대기시간이 많이 소요되기도 합니다.
| 오디오가이드 (필수) & 도슨트 (없음)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도슨트는 운영하지 않습니다. 대신 전시작품 52점 모두 소개되는 오디오가이드는 3천원에 대여 후 사용이 가능합니다. 저는 바이브앱에서 제공된다고 해서 별다른 생각없이 입장했는데, 바이브앱에서는 대표작품 아주 일부만 소개되고 있네요. 가능한 오디오가이드 이용하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특히 오디오가이드를 추천 드리는 이유는 아래와 같이 작품 설명이 하단 바닥에 위치해 있습니다. 상당히 보기 불편하고, 관람객이 많아 접근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보통 작품 옆부분에 배치해서 동선과 시선을 분산시키는데. 이번 영국 내셔널 갤러리 명화전 작품과 설명 배치는 상당히 불편하네요.
[섹션 1] 르네상스, 사람 곁으로 온 신
[섹션1 - 01] 사람의 모습을 닮은 신
서재에 있는 성聖 히에로니무스, 1475년경
안토넬로 다 메시나, 1456년부터 활동, 1479년 사망 / 목판에 유화, 45.7 × 36.2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894년 구입
그림의 배경은 4세기의 학자이자 수도사였던 성 히에로니무스(성 예로니모)의 서재로, 그림이 그려진 15세기 서재의 모습입니다. 그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 성경’은 지금도 가톨릭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닥 타일과 반복되는 아치 등에 선 원근법이 엿보입니다. 계단 위의 공작, 자고새, 그릇에 담긴 물은 영원, 진실, 순수함을 상징합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자는 성 히에로니무스가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빼준 뒤 사자가 성인을 따랐다는 전설을 반영합니다. 안토넬로는 네덜란드 화가의 영향을 받아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유화에 능숙했으며, 베네치아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음부터는 너무나도 유명하고 쟁쟁했던 르네상스 시대 대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성聖 제노비오의 세 가지 기적, 1500년경.
산드로 보티첼리, 1445년경-1510 / 목판에 템페라, 64.8 × 139.7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924년 몬드 유증
보티첼리는 장식적이고 우아한 그리스·로마신화 주제의 그림들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도미니크회 소속 수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를 추종하면서 이 작품처럼 경건하고 담백한 종교적인 그림을 주로 그리게 됩니다.
5세기에 살았던 주교 성 제노비오는 훗날 피렌체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15세기 피렌체를 배경으로 성 제노비오가 피렌체에서 일으킨 세 가지 기적을 그렸습니다. 자를 대고 그은 듯한 선 원근법으로 공간감을 주었습니다.
성모자 聖母子, 1480-90년경
조반니 벨리니, 1435년경-1516 / 목판에 유화와 템페라, 90.8 × 64.8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855년 구입
벨리니가 그린 작은 성모자상은 개인의 종교 활동을 위한 그림으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손꼽히는 화가 가문 출신으로, 티치아노 등 다음 세대의 베네치아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세 그림의 금빛 배경 대신 하늘과 산이 보이는 풍경 앞에 성모와 아기 예수가 다정히 앉아 있습니다. 소박한 옷차림과 부드러운 몸짓은 두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모가 손에 든 석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대리석 난간 앞에는 화가 이름이 쓰인 종이가 붙어 있습니다.
성모자聖母子와 세례 요한 (가바의 성모), 1510-11년경
라파엘로, 1483-1520 / 목판에 유화, 38.9 × 32.9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865년 구입
전성기 르네상스 대표 화가인 라파엘로가 자신의 걸작인 〈아테네 학당〉을 바티칸 교황궁에 그리던 시기에 그린 작품입니다. 가바 남작 조지 캐닝의 소유였으므로 ‘가바의 성모’라고도 불립니다.
로마 교외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을 배경으로, 갈대로 만든 십자가를 든 세례 요한이 아기 예수에게 훗날 겪게 될 수난과 부활, 신성한 사랑의 상징인 카네이션을 건넵니다. 인물들 사이의 감정 교류가 돋보입니다. 건축적 배경과 성모의 모습으로 강조된 두 아이의 손이 화면 중앙에 있으며,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 속 인물들이 배경과 조화를 이룹니다.
[섹션1 - 02] 신화 속 신과 사람들
그리스 로마 신화를 기반으로 제작된 작품들을 보면 글로만 내려오는 신화를 작가의 상상이 붙어 표현된 작품에 감탄을 하곤 합니다. 이번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에도 여러 신화 기반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데요. 과연 어떠한...
[왼쪽] 나르키소스, 1500년경
화가 모름 (조반니 안토니오 볼트라피오1467년경-1516의 추종자) / 목판에 유화, 23.2 × 26.5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910년 조지 솔팅 유증
젊고 아름다운 나르키소스(그리스어로 나르시스)가 물그릇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봅니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는 에코와 나르키소스에 대한 그리스 신화가 실려 있습니다. 나르키소스는 님프 에코의 사랑을 거절했을 뿐더러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가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던 나르키소스는 결국 죽고 맙니다. 나르키소스 신화는 오늘날 허영을 경계하는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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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아폴로와 다프네, 1470-80년경
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 1441년경-1496년 이전 / 목판에 유화, 29.5 × 20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876년 윈 엘리스 유증
피렌체 도시 전경과 아르노강을 배경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널리 읽힌 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43BCE-17/18)의 『변신 이야기』에 담긴 신화를 그린 그림입니다.
아폴로가 활과 화살을 가지고 노는 큐피드를 놀리자 이에 기분이 상한 큐피드는 아폴로에게 황금 화살을 쏘아 다프네를 사랑하게 하고, 다프네에게는 납 화살을 쏘아 그를 거절하게 합니다. 아폴로가 다프네를 쫓아가 손이 닿는 순간, 다프네는 아버지인 강의 신 페네우스의 도움으로 아폴로를 피해 월계수 나무로 변합니다. 사랑과 두려움, 좌절이 그림에 담겨 있습니다.
겁탈당한 가니메데, 1575년경
다미아노 마차, 1573년경부터 활동 / 캔버스에 유화, 177.2 × 188.7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824년 구입
거대한 독수리가 벌거벗은 소년을 움켜쥐고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따르면, 목동인 가니메데는 아름다운 외모가 눈에 띄어 독수리로 변신한 주피터에게 납치되었고, 올림푸스산에서 신들의 식사 시중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원래 변호사 프란체스코 아소니카의 저택 테라스 천장을 장식하려고 그린 것입니다. 아소니카는 티치아노의 법률대리인이었고 마차는 티치아노의 제자였으므로, 티치아노가 마차를 아소니카에게 추천했을 수도 있습니다. 원래 팔각형이었으나 18세기 초 벽에 걸 수 있게 캔버스를 더해 직사각형으로 만들었습니다.
머큐리, 큐피드와 함께 있는 비너스 (사랑의 가르침), 1525년경
코레조, 1494년부터 활동, 1534년 사망 / 캔버스에 유화, 155.6 × 91.4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834년 구입
전령의 신 머큐리가 다정하게 아들 큐피드에게 읽기를 가르치고, 사랑의 신 비너스는 그 옆에서 우리를 바라봅니다. 신들의 이야기를 빌려 그려진 누드에서 이상적인 비례와 사실적인 명암법이 돋보입니다. 비너스는 원래 큐피드를 바라보았으나 지금처럼 우리와 눈이 마주치도록 수정되었는데, 이처럼 캔버스에서 바로 그림을 고치는 방식은 유화 기법에 능숙한 베네치아 화가들의 특징입니다.
구입, 기증과 유증...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모두에 작품의 구입경로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미더 직픔 입수의 투명성을 소개하고 도덕적인 작품과 미술관을 강조하는 것 같은데요. 또한 대영박물관 등 유럽의 메이저 박물관의 약탈 논란에 대한 선긋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섹션1 - 03] 그림의 주인공이 된 사람
초상화 앞에서 작품속 주인공과 나누는 이야기는 항상 흥미롭고 재미있는 경험입니다. 이번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에서도 여러 초상화속 인물과 다양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내셔널갤러리 런던, 1942년, 준남작 프랜시스 쿡이 아버지 허버트 쿡을 추모하며 예술기금을 통해 기증
티치아노가 20대 초반에 그린 초상화입니다. 머리에 두른 베일을 비롯한 투명한 천의 표현에서 화가로서 티치아노의 솜씨와 기술이 젊은 나이에 이미 완숙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반니 벨리니의 제자인 티치아노는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대표 화가로, 유럽 각국의 강력한 통치자들이 그에게 그림을 주문했습니다.
이 작품의 별칭 ‘라 스키아보나’는 ‘달마티아의 여인’이라는 뜻으로, 달마티아는 1420년부터 1797년까지 베네치아공화국의 식민지였던 아드리아해 동쪽 지역을 말합니다.
그림 속에 조각을 그려 넣은 것은 그 당시에 있었던 ‘그림과 조각 증에 무엇이 더 뛰어난 미술인가?'에 대한 논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대 로마 조각의 영향을 받은 난간 오른쪽의 옆얼굴은 티치아노가 조각을 똑같이 따라 그릴 수 있고, 심지어 그의 그림이 조각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인 (루치아 알바니 아보가드로 백작부인 추정, 붉은 옷을 입은 여인), 1556-60년경
조반니 바티스타 모로니, 1520/4-1579 / 캔버스에 유화, 115 × 106.8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876년 구입
1534년 베르가모 귀족의 딸로 태어난 루치아 알바니 아보가드로 백작부인은 시에 재능이 있어 그녀가 쓴 소네트를 모아 엮은 책이 남아 있습니다.
모로니는 16세기 이탈리아 북부의 대표 초상화가로, 특히 반짝이는 호화로운 복식, 값비싼 갑옷 등으로 귀족들의 우아함을 표현한 전신 초상화로 유명했습니다. 새틴 드레스의 화려한 다홍색과 치마의 체크무늬, 드레스의 꼬임장식과 세로트임은 그 당시 유행했던 스타일로, 모로니는 유화 기법을 활용하여 질감을 잘 표현했습니다. 부채 손잡이를 손으로 가린 것은 손잡이가 귀한 재료로 만들어져 사치금지법의 규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빈첸초 모로시니, 1575-80년경
야코포 틴토레토, 1518년경-1594 / 캔버스에 유화, 85.3 × 52.2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내셔널갤러리 설립 100주년과 예술기금설립 21주년을 기념하여 예술기금에서 1924년 기증.
빈첸초 모로시니는 1572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즉위식에 베네치아 대표로 참석했는데, 이때 황금 스톨 기사단의 기사로 임명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깨에 걸친 금실로 수놓은 스톨이 이 기사단의 상징입니다.
틴토레토는 모로시니의 날카롭고 예민한 성격을 위엄 있게 표현했습니다. 노인의 얇은 피부, 앙상한 코, 주름진 얼굴 속 옅은 파란색 눈이 우리를 꿰뚫듯 쳐다봅니다. 얼굴은 물감을 꼼꼼하게 덧칠한 반면 옷은 빠른 붓질로 채웠습니다. 틴토레토는 베네치아의 대표 화가로, 피렌체 전통을 따른 미켈란젤로의 선과 구성, 그리고 베네치아의 전통을 따른 티치아노의 색채를 융합한 작품을 그리고자 했습니다.
어린 공주 (덴마크의 도로테아 추정), 1530-32년경
얀 호사르트, 1508년부터 활동, 1532년 사망 / 목판에 유화, 38.2 × 29.1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908년 구입
이 소녀는 망명 중이던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2세의 딸 도로테아로 추정됩니다. 진주를 엮은 호화로운 옷을 입었으며, 소매에 있는 옅은 파란색 원형무늬는 원래 왕족의 상징인 보라색이었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1523년 크리스티안 2세가 폐위되어 쫓겨난 후 네덜란드에서 오스트리아의 마거릿(1480–1530)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사실적인 초상화로 유명한 얀 호사르트는 16세기 초 북유럽 화가 최초로 로마를 방문했고, 이후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요소들을 북유럽에 들여왔습니다.
다음 전시관으로 이동하는 중간 공간에서는 작품에 대한 영상과 함께 포토존, 휴식공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조금 숨 차시면 이곳에서 조금의 휴식도 좋아 보입니다.
[섹션 2] 분열된 교회, 서로 다른 길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 1594-95년경
카라바조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1571-1610 / 캔버스에 유화, 66 × 49.5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986년 J. 폴 게티 2세 기금 후원으로 구입
이번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에 전시된 52점의 작품중 대표작품 중 하나입니다. 전시 공간도 별도로 구성되어 있는...
한 소년이 손가락을 도마뱀에게 물린 아픔에 깜짝 놀라 움츠리고 있습니다. 짧은 감각적 쾌락 뒤에 숨어 있는 예상치 못한 고통을 은유한 것으로, 소년의 귀에 꽂힌 장미와 꽃병의 꽃 역시 곧 시들어 사라질 덧없는 것입니다.
카라바조는 ‘정물을 그리는 일은 인물을 그리는 일만큼 예술적 재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연을 직접 관찰하여 그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점은 그의 혁신적인 특징 중 하나입니다. 초기에는 이 그림에서처럼 정물화나 일상생활의 장면을 그렸지만 곧 단순하고 쉽게 전달되는 종교화들을 그리게 됩니다.
카라바조는 ‘정물을 그리는 일은 인물을 그리는 일만큼 예술적 재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연을 직접 관찰하여 그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점은 그의 혁신적인 특징 중 하나입니다. 초기에는 이 그림에서처럼 정물화나 일상생활의 장면을 그렸지만 곧 단순하고 쉽게 전달되는 종교화들을 그리게 됩니다.
[카라바조에서 온 미켈란젤로, 천재이자 문제아]
카라바조의 원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입니다. 그의 이탈리아 고향 마을 이름인 ‘카라바조’를 따라서 카라바조라고 불렸습니다.
카라바조는 그림 실력은 뛰어났지만, 성격이 나쁘고 거칠어서 이곳저곳에서 싸움을 일으키고 다녔습니다. 결국 카라바조는 칼 싸움 끝에 사람을 죽이고 원래 살던 로마를 떠나 여러 곳으로 도망 다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를 후원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죄를 용서받고 로마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다시 문제를 일으켜 감옥에 갇힙니다. 카라바조는 결국 로마에 돌아가지 못하고 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섹션 2 - 01] 바로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빛
바로크 ... 로코코... 너무나도 좋아하는 미술 장르 중 하나, 그리고 그의 초상화를 만나볼 수 있는 셕션 입니다.
63세의 자화상, 1669
렘브란트 판 레인, 1606-1669 / 캔버스에 유화, 86 × 70.5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851년 구입
렘브란트는 프로테스탄트 국가였던 네덜란드에서 활동했습니다. 직접 이탈리아에 가본 적은 없지만 판화나 다른 동료들을 통해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640년대 암스테르담 최고의 인기 화가였으나 이 자화상을 그릴 때는 이미 파산한 상태였습니다.
렘브란트가 죽기 몇 달 전 그린 자화상입니다. 나이 들어가는 얼굴의 느낌에 집중해 물감을 두껍게 발라 얼룩덜룩한 피부, 숱이 적어진 눈썹 등을 그렸습니다. 옷과 배경은 얇게 재빨리 칠함으로써 밝은 빛을 받은 섬세한 얼굴 표정에 관심을 집중하게 합니다. 자화상으로 자신을 성찰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노인 초상화를 그릴 때 활용할 회화 기술을 연습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바커스 양육, 1628년경
니콜라 푸생, 1594-1665 / 캔버스에 유화, 80.9 × 97.7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831년 조지 제임스 첨리 유증. 1836년부터 내셔널갤러리 소장
푸생은 17세기 프랑스의 고전주의를 이끈 화가로,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나 일생을 대부분 로마에서 보냈습니다. 푸생은 고대의 문화를 바탕으로 현실보다 완벽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는 술의 신이자 주피터의 아들인 바커스가 이모인 이노의 보살핌을 받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림에서 바커스는 이노의 남편 아타마스에게 의지해 은그릇에 짜놓은 포도즙을 마십니다. 서로 끌어안고 있는 두 아기는 이노의 아들들입니다. 주피터의 아내 주노는 이노가 바커스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질투해 이노와 아타마스를 미치광이로 만들었고, 아타마스는 자기 아들 중 한 명을 죽이고 맙니다.
회화나 조각에 등장한 바커스는 보통 청년이나 노인, 그리고 그렇게 긍정적인 이미지로 표현된 작품은 기억이 없는데요. 이 작품에서 표현된 아기 바커스는...
종교개혁과 가톨릭 교회의 변화
기도하는 성모, 1640-50
사소페라토 (조반니 바티스타 살비), 1609-1685 / 캔버스에 유화, 73 × 57.7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846년 리처드 시몬스 유증
화가의 별명 사소페라토는 화가의 고향 이름입니다. 그는 개인의 기도를 직접 들어줄 듯한 혼자 기도하는 성모 그림으로 유명합니다. 이 도상은 가톨릭 개혁의 원칙들을 결정한 트리엔트공의회 이후 유행했습니다.
이 그림은 사실적이면서도 단순한 구도와 색채로 감동을 줍니다. 빨간색, 흰색 그리고 값비싼 울트라마린을 사용한 파란색 물감만으로 그려진 성모는 강한 빛을 받으며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조각 같은 얼굴과 우아한 색채는 르네상스 시대 라파엘로의 화풍과 비슷하지만 강렬한 연극적인 빛은 바로크 회화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성 마리아 막달레나는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그리스도의 제자 중 한 명입니다. 서유럽 회화에서 대부분 쾌락을 거부하고 참회하며 그리스도를 섬기기로 결심한 매춘부로 그려집니다.
참회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17세기에 자주 그려진 주제인데, 이는 가톨릭 개혁 시기 교회에서 참회를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주제로 감동적인 종교화를 그려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향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되돌리고자 했습니다.
귀도 레니와 그의 제자들은 성 마리아 막달레나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도박에 빠져 빚이 점점 늘어난 귀도 레니는 빚을 갚기 위해 빠르고 쉽게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그림 중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주제로 작은 크기의 그림을 여러 개 그려서 판 것입니다. 〈성 마리아 막달레나〉같은 성스러운 그림을 그린 이유가 도박 빚을 갚기 위해서라니 참 놀랍습니다.
[섹션 2 - 03] 일상의 풍경과 사람들
이번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전시회 작품중에서 상당히 독특하면서 매력적인 작품들이 모여있는 공간
북유럽 안트베르펜 출신 화가인 베케라르는 일상적인 장면에 종교적 주제를 담은 그림으로 유명합니다. 이 방에는 4원소인 불, 물, 공기, 흙을 주제로 한 4점 연작 중 〈불〉과 〈물〉이 전시 중입니다. 각 그림에는 주제가 되는 원소와 관련된 생산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4원소: 불, 1570
요아힘 베케라르, 1535년경-1575 / 캔버스에 유화, 158.2 × 215.4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2001년 구입
〈불〉에서 그림 속 여성들은 불에 구울 고기를 손질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먼 배경에는 자매인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한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마르타는 그리스도에게 동생 마리아가 자기의 음식 준비를 돕도록 얘기해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원소: 물, 1569
요아힘 베케라르, 1535년경-1575 /캔버스에 유화, 158.1 × 214.9 cm /내셔널갤러리 런던, 2001년 구입
다음 섹션은 풍경화 중심으로 구성된 공간입니다. 저는 미술 작품중에서 풍격화에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에 대충대충...
작은 집이 있는 숲 풍경, 1665년경
메인더르트 호베마, 1638-1709 / 캔버스에 유화, 99.5 × 130.5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876년 윈 엘리스 유증
수레바퀴 자국이 있는 길 위에서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가 햇살을 받으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멀리 개와 산책하는 한 남자와 들판을 걷는 남녀가 보이고, 한 여성이 오른쪽 시골집 문에 서서 밖을 바라봅니다.
호베마의 고향 암스테르담 근처 할렘 주변의 숲을 배경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실제 풍경을 보고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그가 즐겨 사용한 소재들을 모아 이상적인 전원 모습을 그린 상상의 풍경화입니다.
강풍 속 네덜란드 배와 작은 배들, 1658
빌럼 판 더 펠더 / 캔버스에 유화, 55 × 70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910년 솔팅 유증
빌럼 판 더 펠더는 17세기 후반 네덜란드에서 바다 풍경화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는 배를 매우 정확하게 그렸으므로 그의 그림은 당시 배 모습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흰 돛을 날리는 군함의 큰 돛대에는 네덜란드 국기가 달려 있고 고물에는 홀란트주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앞쪽의 배에 달린 깃발에 화가의 서명이 있습니다.
빌럼 판 더 펠더는 정교한 배를 그린 흑백 드로잉으로 유명한 아버지 대(大) 빌럼 판 더 펠더(1610/1-1693)에게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판 더 펠더 가족은 1672년, 프랑스의 침략으로 암스테르담에 경제 위기가 오자 영국으로 이주했으며, 18세기 영국에서 바다 풍경화가 발달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섹션 3] 개인의 삶, 기념하고 추억하며
전시공간 가운데에 위치한 가장 큰 그림...
멀리에서 봐도 독특한 포즈와 구도의 두 인물이 보입니다.
존 스튜어트와 버나드 스튜어트 형제, 1638년경
안토니 반 다이크, 1599-1641 / 캔버스에 유화, 237.5 × 146.1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988년 구입
반 다이크는 스승 루벤스와 함께 17세기 북유럽 플랑드르를 대표하는 화가로, 이후 영국에서 찰스 1세와 왕실 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화가, 특히 16세기 티치아노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고급 옷감의 반짝임과 감촉을 아름답게 표현하여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림 속 소년들은 영국 귀족인 3대 레녹스 공작의 아들들로, 왼쪽이 형인 존 스튜어트, 오른쪽이 동생 버나드 스튜어트입니다. 당시 18세, 17세에 불과했지만 귀족적인 거만함이 느껴집니다. 두 사람의 자세와 호화로운 옷은 이들의 부유함과 높은 신분이 돋보이도록 계산된 것입니다.
재수 없는 고압적인 시선과 구도. 아마 작가는 해당 가문에서 두둑하게 받았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생각이...
[스튜어트 형제의 삶]
이 그림은 스튜어트 형제가 유럽 대륙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졌을 것입니다. 스튜어트 형제는 1639년 1월 30일, 영국 돈 100파운드와 하인 6명을 데리고 3년 동안 해외 여행을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3년 후, 1642 년에 영국에서 국왕 찰스 1세와 의회가 서로 심하게 다투어 전쟁(청교도 혁명)이 일어납니다. 스튜어트 형제의 집안은 국왕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국왕 편으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형과 동생은 전쟁 중 1644년과 164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두 사람의 나이는 겨우 24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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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카나레조 입구, 1734-42년경
카날레토 (조반니 안토니오 카날), 1697-1768 / 캔버스에 유화, 48 × 80.2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879년 존 헨더슨 유증
카날레토는 베네치아 모습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그린 풍경화로 유명했습니다. 그랜드 투어가 유행한 시기, 이탈리아에 온 영국인들은 오늘날 여행 기념품으로 그림엽서를 사듯 그의 풍경화를 구입했습니다. 그림 속 장소는 지금도 인기 있는 관광지입니다. 이 작품은 베네치아 카나레조 운하의 입구를 그린 것으로, 인기가 좋아서 카날레토와 그의 공방에서 반복해서 제작했습니다. 차가운 저녁의 빛과 옅은 분홍색 구름이 있는 하늘은 1740년대 전반 그려진 카날레토의 그림에 많이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베네치아 카스텔로의 산 피에트로, 1730년대
30. 카날레토 (조반니 안토니오 카날), 1697-1768 / 캔버스에 유화, 47.3 × 79.5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879년 존 헨더슨 유증
여인 (마담 드 글레옹 추정) 1760년경
장 바티스트 그뢰즈, 1725-1805 / 캔버스에 유화, 64.1 × 54.6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945년 에밀리 이스나가 기증
프랑스에서 유행한 로코코 시대 패션을 살펴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문필가이자 아마추어 배우였던 드 글레옹 후작부인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초상화로, 18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유행한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머리와 옷 스타일이 눈길을 끕니다. 가르마 없이 빗어 넘겨 줄지어 땋은 곱슬머리가 특징인 ‘테트 드 무통(tête de mouton, 염소 머리)’ 스타일을 했습니다. 머리에 흰색 파우더를 뿌리고 진주와 비단으로 만든 파란색 꽃 장식을 달았는데, 이러한 머리장식들은 그것들을 유행시킨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이름을 따서 ‘폼폼(pompom)’이라고 했습니다. 넓은 네모모양 목 라인과 컷워크 레이스로 만든 섬세하고 화려한 소매가 돋보입니다.
이사벨 데 포르셀 부인, 1805년 이전
프란시스코 데 고야, 1746-1828 / 캔버스에 유화, 82 × 54.6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896년 구입
고야는 스페인의 대표 화가이자 판화가로 카를로스 3세, 카를로스 4세, 페르디난드 7세의 궁정화가로 일했습니다. 그림 속 여성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국무장관이던 돈 안토니오 데 포르셀의 아내 이사벨 데 포르셀 부인(1780년경-1842)입니다.
그녀가 입은 옷은 전통적으로 낮은 계급 여성인 마하(maja)의 복식이지만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스페인의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했습니다. 화려한 검은 레이스 숄을 둘렀으며 머리에는 검은 레이스의 만틸라(mantilla)를 썼습니다. 만틸라는 검은색 리본으로 만든 꽃이 달린 장식용 빗으로 고정했습니다. 이 작품은 내셔널갤러리가 발간한 『명화 100선(1994)』의 표지 작품으로 선정될 정도로 고야의 뛰어난 초상화로 여겨졌습니다.
다음 섹션으로 이동 전에 영국 내셔널 갤러리의 여가가 편집된 영상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워낙 자화자찬 영상이어서...
[섹션 3 - 2] 초상화와 풍경화의 유행
의사 랄프 숌버그, 1770년경
토머스 게인즈버러, 1727-1788 / 캔버스에 유화, 233 × 153.5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862년 구입
게인즈버러는 라이벌인 조슈아 레이놀즈와 함께 18세기 후반 영국을 대표하는 초상화가입니다. 당시 유행한 옷차림에 자연스러운 자세를 한 인물들을 풍부한 색감과 가벼운 붓 터치로 그렸습니다.
고향인 영국 남동부 소도시에서 활동하던 그는 1759년 휴양도시 바스로 이주했으며, 이곳에 휴양 온 영국 상류층들에게 큰 인기를 끕니다. 이 작품은 바스에서 자신의 가족을 진료해 주던 의사 랄프 숌버그를 그린 그림입니다. 낭만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파우더를 뿌린 가발을 쓰고 지팡이를 든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준 초상화 중 하나
찰스 윌리엄 램튼 (레드 보이), 1825
토머스 로렌스, 1769-1830 / 캔버스에 유화, 140.5 × 110.6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내셔널갤러리 미국 후원회, 길리언 클리버, 울프슨재단 기부금 포함 예술기금, 알 타니 재단, 매니&브리기타 데이비슨 자선재단, 윌리엄 샤프, 예술애호자선신탁협회 후원으로 2021년 구입
토머스 로렌스는 17세기 반 다이크, 18세기 게인즈버러와 레이놀즈의 뒤를 잇는 영국 대표 초상화가로, 특히 어린이를 그린 그림으로 유명합니다. 이 작품은 1967년 영국 우표에 실린 최초의 그림이 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는데, 1대 더럼 백작이 자신의 아들이 예닐곱 살일 때 주문 제작한 것입니다. 소년은 1831년, 열세 살 나이에 결핵으로 죽고 말았기에 이 그림은 그를 기억하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루소(1712–1778)의 주장처럼 아동기를 특별한 시간으로 여기기 시작한 당시 관점과 자연에 대한 낭만주의적 관심을 담고 있습니다. 로렌스는 놀 자유가 있는 어린이가 최고의 스승인 자연의 가르침을 받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도금된 액자는 처음부터 그림과 함께 있었으며, 로렌스가 직접 액자 제작가 조지 모란트에게 주문한 것입니다.
산업혁명이 시자된 곳 영국...
스트랫퍼드의 종이공장, 1820
존 컨스터블, 1776-1837 / 캔버스에 유화, 127 × 182.9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987년 상속세 대신 물납
컨스터블은 자신이 태어나고 활동했던 서포크 지역의 일상 풍경을 많이 그렸습니다. 스트랫퍼드 공장은 스트랫퍼드 외곽 스투어강 섬 위에 지어진 수력을 이용하는 종이공장입니다. 그는 야외 스케치를 대형 캔버스에 옮겨 그렸는데, 때로는 스케치 후 몇 년이 지나서야 유화로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컨스터블이 년에 영국 왕립아카데미에 전시한, 너비가 6피트여서 ‘6피트 그림’으로 불린 대형 풍경화 6점 중 두 번째 그림입니다.
자연을 깊이 관찰하여 그린 그의 작품은 자연과 교감하며 풍경을 그린 프랑스 바르비종 화파나 낭만주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으며, 빛에 대한 관심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이별, 1837년 이전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 1775-1851 / 캔버스에 유화, 146 × 236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856년 터너 유증
그리스 신화의 헤로와 레안드로스 이야기를 그린 그림입니다. 비너스의 사제인 헤로는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헬레스폰트 해협의 도시 세스토스에서 살았습니다. 그녀는 아시아 쪽에 사는 레안드로스와 사랑에 빠졌고, 매일 밤 그녀를 보려고 바다를 헤엄치는 그를 위해 등불을 들었습니다. 어느 날, 바람에 등불이 꺼져 레안드로스가 바다에서 죽자 헤로 역시 죽음을 택합니다.
화면 중앙 테라스에는 날개 달린 큐피드가 등불과 횃불을 들고 있으며, 결혼의 신 히멘이 그 옆에 서 있습니다. 테라스 아래 바닷가 어둠 속에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헤로와 레안드로스가 보입니다. 터너는 클로드 로랭의 풍경화에서 보이는 균형 있는 고전적 구도, 표현적 색채 그리고 대기의 효과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마지막 섹션입니다. 지금까지 르네상스 부터 1800년대 회화를 만나봤다면, 지금부터는 우리에서 익숙한 근현대 화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소 아쉬운 공간, 좀더 과거로 돌아가 작품을 보고 싶었는데...
[섹션 4] 인상주의, 빛나는 순간
작업실의 난로, 1865년경
폴 세잔, 1839-1906 / 캔버스에 유화, 41 × 30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992년 헬렌 체스터 비티의 유족이 상속세 대신 물납
세잔의 초기작으로 스튜디오의 물건들을 대충 그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세심하게 배치했습니다. 난로 뒤에 캔버스를 놓아 난로가 돋보이고, 난로의 검은 연통이 캔버스를 둘로 나눕니다. 난로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테이블은 정면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렸습니다. 전체 색채가 어두운 것은 세잔 초기 그림의 특징입니다.
세잔은 후기 작품에서 사물의 형태와 색을 단순화해 질서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어 19세기 말 인상주의와 20세기 초 입체주의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 화가로 평가받습니다.
목욕하는 사람, 1885-90년경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1841-1919 / 캔버스에 유화, 39.4 × 29.2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961년 안토니 혼비 부부 기증
누군가 지켜보는 줄 모르는 누드의 여성을 그리는 것은 고대 그리스 신화의 디아나와 악테온, 성경의 수잔나와 장로들 등 과거부터 이어진 주제이지만, 르누아르는 동시대의 평범한 여성 누드를 그림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르누아르는 1881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본 고대 로마의 조각상과 르네상스 회화에서 영감을 얻어 고전적 전통을 따르는 누드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붓 터치와 보색으로 대상의 빛과 움직임을 표현하였으며, 붓으로 번진 듯한 느낌을 표현해서 그림 속 여성과 그 주변 풍경을 더 감각적으로 보이게 했습니다.
창문 앞 과일 그릇과 맥주잔, 1890년경
폴 고갱, 1848-1903 / 캔버스에 유화, 50.8 × 61.6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2006년 사이먼 세인스버리 유증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고갱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과 색의 순간을 포착하는 인상주의를 넘어 보다 영속성 있는 접근법을 찾는 과정에서 세잔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1880년경 고갱은 세잔의 그림 6점을 구입했는데, 그 중 〈과일 접시, 유리잔, 사과가 있는 정물(1879-80년)>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전시된 고갱의 작품은 고갱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최고의 보석'이라고까지 말한 세잔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과일, 비스듬히 놓인 칼, 구겨진 테이블보 등 세잔의 정물화 속 소재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 시기 고갱이 사용하기 시작한 사인 P Go.가 왼쪽 아래에 거꾸로 쓰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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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우거진 들판의 나비, 1890년
빈센트 반 고흐, 1853-1890 / 캔버스에 유화, 64.5 × 80.7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926년 코톨드 기금으로 구입
반 고흐는 오늘날 인기 있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이지만 살아있을 때는 그림을 거의 팔지 못했고 스스로 실패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정신병이 악화되어 남부 프랑스의 생 레미 마을 근처의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린 그림입니다. 그는 죽기 얼마 전인 1890년 5월 4일경, 동생 테오에게 ‘그림이 잘 그려진. 새롭게 자른 잔디 모습을 두 작품이나 그렸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이 그림이 여기서 말한 두 작품 중 하나로 추정됩니다.
반 고흐는 진디와 잡초 위로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담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감정을 담은 표현적인 밝은 색채와 유화물감을 겹쳐 두껍게 칠하는 임파스토 기법이 특징입니다.
카페 콩세르의 한구석, 1878-80년경
에두아르 마네, 1832-1883 / 캔버스에 유화, 97.1 × 77.5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924년 코톨드 기금으로 구입
대상을 직접 보고 그리기를 좋아한 마네는 근대적인 삶의 모습을 주제로 택했으며 물감을 자유롭게 사용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여겨지지만, 정작 마네 자신은 인상주의 전시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평생 살롱전의 인정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마네는 잔을 여러 개 들고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서빙하는 종업원들의 솜씨에 감탄해서 그중 가장 뛰어난 종업원에게 작업실에 와서 모델이 되어달라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자기 ‘보호자’도 함께 가서 돈을 받는 조건으로 마네의 제안을 수락했는데, 그림 속 파란 셔츠를 입은 남성이 그녀의 보호자입니다.
오늘 소개한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52/52
마지막 작품을 모네의 작품으로 끝내는 구성에는 반대!!!
붓꽃, 1914-17년경
클로드 모네, 1840-1926 / 캔버스에 유화, 200.7 × 149.9 cm / 내셔널갤러리 런던, 1967년 구입
모네는 프랑스 인상주의의 대표 풍경화가입니다. 이 작품은 모네가 1914년에서 1917년 사이에 그린 붓꽃 연작 중 하나로 지베르니에 있는 그의 정원을 그린 것입니다.
붓꽃은 모네가 가장 좋아한 꽃이었습니다. 붓꽃 연작은 대부분 높이 2미터의 대형 작품으로, 매우 독특하고 새로운 시점을 보여줍니다. 모네는 두껍고 대담한 붓으로 보라색, 파란색, 초록색 물감을 칠했고 캔버스의 흰 바탕이 드러난 채로 내버려두기도 했습니다. 이는 당시 모네가 백내장으로 시력이 온전하지 못했던 영향도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모네가 사망했을 때도 작업실에 있었으므로 모네가 작품을 완성했는지 아니면 미완성으로 여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전시가 끝나고 전시장 마지막 공간에는 영국 내셔널 갤러리 전시관이 생각나게 하는 포토존이 준비되어 있으니 꼭 만나서 사진 찍고 전시장을 나가세요.
|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총평
그래도 이런 대작들을 한 곳에서 만나볼 수 있는 부분에는 감사
전시장 동선 구성, 작품 전시 캡션 등의 위치, 그위 자사한 운영과 구성은 저에게는 역대급으로 불편하고 피곤을 일으키는 전시회였다는 생각입니다.
올 겨울 가장 뜨거웠던 전시회중 하나인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 빈미술사박물관 특별전' 관람후기 입니다. 아마도 코로나가 끝나가고 해외 진품들이 들어온 가장 최대규모의 전시회가 아니었을까 하네요.
| 국립중앙박물관 & 예약마감 > 현장 발권
이번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회 온라인 예약은 이미 사전에 마감되었습니다. 간혹 전일 취소 티켓이 나오기는 하지만 운이 많이 따르고요. 현장발권도 있지만 새벽같이 가서 줄서야 합니다.
| 티켓 예약시간 정시 입장 +30분 / 사진촬영 가능
전시회는 일찍 올 필요는 없습니다. 주차시간 고려해서 도착하시면 됩니다. 예매 전용창구가 있어 긴 티켓팅 줄은 없고요. 예약시간 정시가 되어야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사진촬영 가능합니다.
이번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 빈미술사박물관 특별전'에 전시된 전시품은 모두 진품이라고 하네요.
| 더 멀리 합스부르크가의 비상
막시밀리안 1세 / 베른하르트 슈트리겔(1460-1528) 원작을 모사 1508년 이전 나무에 유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강력한 제후 세력과 맞서야 했고 실질적인 통치력은 약했다. 1508년 황제가 된 막시밀리안 1세는 군주의 권위와 명성을 드러내기 위해 초상화를 선전 수단으로 활용했다. 황제는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황제의 홀을, 왼손으로는 검 손잡이를 쥐고 ‘명예의 천’이라 부르는 화려한 붉은색 천을 배경으로 서 있다. 이러한 양식의 초상화는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변화되어 전해지고 있다.
전시의 시작은 합스부르크왕가의 대표 인물과 갑옷으로 시작합니다.
마티아스 / 뤼카스 판 팔켄보르흐(1535년경-1597) 1583년경 캔버스에 유화
마티아스(1557-1618)가 린츠에 머물던 시절에 그의 궁정 화가 였던 뤼카스 판 팔켄보르흐가 그린 것이다. 그는 루돌프 2세의 동생이다. 정치적 야망이 컸던 마티아스는 헝가리 신교 진영 세력을 규합해 1608년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1611년에는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고 결국 1612년 신성로마 제국 황제로 추대됐다. 황제가 된 이후 에는 오히려 신교 진영을 탄압하는 정책을 펴 30년 전쟁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1508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막시밀리안 1세가 1490년대 초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영지를 지배하게 된 것을 기념하며 주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으로 전하는 갑옷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갑옷 제작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릎 보호대 양쪽에는 돋을새김이 장식되어 있다. 로렌츠 헬름슈미트는 막시밀리안 1 세의 황실 갑옷 장인이었는데 로렌츠 가문은 16세기 중반까지 합스부르크 황제들을 위해 갑옷을 제작 했다.
세로 홈 장식 갑옷 / 빌헬름 폰 포름스 1세(1504-1537) 1525-30년경 연철, 가죽
갑옷 표면의 세로 홈은 당시 의복의 주름 장식을 모방한 것이다. 홈 장식은 빛을 반사해 표면을 빛나게 하는 효과를 내고 갑옷의 강도를 높여 보호 기능을 강화했다. 얼굴 표정을 연상하게 하는 투구는 마상 창 시합과 함께 열린 가면극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갑옷은 뷔르템베르크의 울리히 공작이 실제 사용했던 것으로, 그의 손자가 페르디난트 2세 대공에게 선물한 것이다.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은 티롤의 암브라스 성에 “영웅들의 무기고”를 지어 무기와 갑옷을 수집하고 전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의 독수리 장식 갑옷 / 외르크 조이젠호퍼(1528-1580) 1547년 연철, 아말감 도금, 황동, 가죽, 천
현존하는 르네상스식 갑옷 세트 중 가장 큰 것으로, 총 90개의 부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옛 오스트리아의 상징인 독수리가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어 <독수리 갑옷>으로도 불린다. 이 갑옷은 페르디난트 1세가 아들 페르디난트 2세 대공을 위해 황실 갑옷 제조공 외르크 조이젠호퍼에게 주문해 제작된 것이다.
사브르 / 1560년경 코듀로이 직물, 철, 금, 은, 아말감 도금, 나무
사브르란 날이 휘어진 긴 칼이다. 전투용이 아니라 축제 행렬에서 의장용으로 착용했던 것이다. 이런 형태의 칼은 르네상스 초기에 나타난 것이지만, 16 세기 무렵까지만 해도 고대의 무기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이 사브르는 페르디난트 1세의 아들이자 루돌프 2세와 마티아스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가 소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너무 많은 관객, 조절 실패
전시공간에 비해 관람객이 너무나 많습니다. 첫 공간인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빠지지 못하고 있네요. 저는 몇 개 작품 포기하고 조금 여유있는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한회차 관람객을 너무 많이 수용한 듯...
| 루돌프2세와 혜술의 방
루돌프 2세의 궁정 화가였던 마르티노 로타가 황제 즉위를 기념해 제작한 초상화로 추정된다. 루돌프 2세는 합스부르크 군주를 통틀어 가장 독특한 인물로 꼽힌다. 루돌프 2세 치세에 구교와 신교의 갈등은 커져만 갔다. 또 13년 이상 지속된 오스만 튀르크 전쟁에서는 별 다른 소득을 얻지 못해 무능한 황제라는 인식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수집한 공예품은 빈미술사 박물관 공예 관의 모태가 될 정도로 그의 예술가적 감식안은 높게 평가된다.
루돌프 2세 / 마르티노 로타 (1520년경- 1583) 1576-80년경 캔버스에 유화
십자가 모양 해시계 / 1619년 구리 합금에 도금
해시계는 근대 초기까지 시간을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방법이었다. 기계식 시계처럼 오작동할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해시계는 여러 방법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다면 십자가 구조로 제작되었다. 해시계에 집약된 다양한 방법의 시간 측정법은 제작자의 수학, 기하학, 과학 그리고 예술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루돌프 2세 황제가 선호한 예술품 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전쟁 선포 / 한스 폰 아헨(1552-1615) 1603-04년경 종이 또는 양피지에 유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배경으로 두 무리의 사람들이 마주하고 있다. 붉은 옷을 입은 오스만 제국의 지도자는 언월도를 들고 있다. 반대편에는 신성로마 제국을 대표하는 사신이 헝가리 전통 의복을 입고 쇠고랑을 차고 있다. 뒤에는 사자 가죽을 두르고 곤봉을 든 헤라클레스가 서 있다. 이 작품은 루돌프 2세 황제재위기에 있었던 합스부르크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페르디난트 2세 대공 / 16세기 후반 캔버스에 유화
헤라클레스의 곤봉을 든 페르디난트 2세 대공(1529-1595)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황금 양모 기사단 휘장을 목에 건 대공을 둘러싼 화환은 티롤 통치 권자의 권위를 강조한다. 대공은 종교 대립이 심했 던 티롤에서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다양한 종파가 자리 잡고 예술이 발달하면서 르네 상스 인본주의가 티롤에 유입됐고 이는 그의 수집품 에 반영되어 암브라스 성에 남았다.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
개인적으로는 공예 보다는 회화가 좋더라는...
야자열매 잔 / 16세기 후반 또는17세기 전반 야자열매, 은, 도금
17세기로의 전환기 대항해 시대에 유럽의 항해사 들과 상인들은 외국에서 온갖 이국적인 물건들을 들여왔다. 낯선 물건에 값비싼 부속을 장식해서 만든 공예품들은 유럽의 예술 애호가들과 수집가들 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유럽인은 야자 열매를 해독제와 치료제로 여겼기 때문에 야자열매 를 잔으로 변형시킨 작품이 드물지 않게 제작됐다. 뚜껑에는 ‘란츠크네히트’라고 부르는 16세기 용병 복장을 한 작은 인물상이 있다.
야자열매 주전자 / 16세기 후반 야자열매, 은, 도금
16세기 유럽에 야자열매는 바다에서 자라는 나무 열매라고 알려지면서 낯설고 경이로운 물건으로 여겨졌다. 인도로 떠난 유럽인들은 항해 도중 야자 열매가 바다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주전자를 장식한 물고기 모양 물의 정령은 야자열매가 바다 에서 왔음을 암시한다. 또 야자열매가 해독 성분을 갖고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확산되기도 했다. 전 세계에 야자열매 장식품이 6점 있는데, 이 가운데 3점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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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聖 가족 / 안젤로 솔리메나(1629-1716) 17세기 중엽 캔버스에 유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사이의 애정 어린 관계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요셉은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고, 배경에는 양과 소, 당나귀가 있다. 이탈리아 출신 화가 안젤로 솔리메나는 주인공들 사이의 안정된 구도를 만들기 위해 원형 틀 안에 인물들을 배치하여 세 사람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1전시장 전시가 끝나고 2전시장으로 이동합니다.
매혹의 명화를 모으다. 예술의 도시 빈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1656년경 캔버스에 유화
| 벨라스케스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 시녀들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와 두 번째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 아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스페인의 공주 를 보고 싶어 하던 페르디난트3세를 위해 그린 초상화이다. 공주는 훗날 외삼촌인 레오 폴트 1세와 결혼하게 된다. 두께와 농도 를 달리한 붓질로 소매와 드레스의 질감을 생동감 있고 정교하게 만드는 벨라스케스 특유의 화법이 잘 살아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볼 수 없지만, 바로 아래 시녀들 작품이 더 익숙하지 않을까?
| 디에고 벨라스케스
아래 3점의 작품 모두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인물화 작품
스페인 왕 펠리페 4세 > 스페인 왕비 엘리자베트 > 흰 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나그네로 변장한 신들은 프리기아라는 마을을 방문한다. 집집마다 문전박대를 당하지만 유일하게 이 늙은 부부만이 그들을 성심성의껏 대접했다. 화가는 노인이 손님에게 대접한 포도주가 줄어들지 않아 이들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을 그렸다. 붉은 옷을 입은 머큐리를 마주보는 필레몬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고, 주피터는 손을 들어 단 한 마리 남은 거위마저 잡으려는 바우키스를 저지하고 있다.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에서 공방을 열고 장르별 대표 화가들과 협업했는데, 이 작품의 정물과 동물은 플랑드르 화가 프란스 스네이데르스가 그렸다.
은둔자와 잠자는 안젤리카 / 피터르 파울 루벤스(1577-1640) 1625-28년경 패널에 유화
| 브릐헐 가문과 꽃 정물화
꽃다발 / 얀 판 덴 헤케(1620-1684) 1652년 캔버스에 유화
창문 앞 난간에 놓인 유리병에는 튤립, 카네이션, 수선화, 팬지, 재스민으로 가득하다. 오른쪽 벽은 자연스러운 경계를 만들어 왼편의 도시 너머 평야로 관람객의 시선이 향하게 한다. 꽃병 뒤로 보이는 도시 그레벨링겐 성벽으로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튤립은 역사적 사실을 숨기는 아름다운 허상을 의미하며, 관람자의 시선을 공격받는 도시가 아닌 화려한 꽃다발에 머물게 하고 있다
거울속에 보이는 아름다운 내모습...
화환 속 남자 / 얀 리벤스(1607-1674), 얀 판 덴 헤커(1620-1684) 1642-44년 패널에 유화
미소를 띤 젊은 남성이 화환에 둘러싸여 있다. 화환은 튤립, 수선화, 카네이션, 장미, 한련, 물망초, 히아신스, 아네모네, 은방울꽃, 나팔꽃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꽃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이 같은 화환 속 초상화는 안트베르펜 지역 회화 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양식이다. 루벤스와 반 다이크의 영향을 받은 얀 리벤스는 초상화로 가장 잘 알려진 네덜란드 화가였다.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앉은 아기 예수는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는 나이 든 왕을 축복한다. 왕의 오른편 으로는 터번을 쓰고 코트를 입은 무어인 왕이 금 그릇을 손에 들고 아기 예수에게 허리를 숙이고 있다. 성모 뒤에 있는 요셉은 이 순간을 바라보고 있다. ‘세 명의 동방박사’는 16세기 베네치아에서 인기가 많았던 주제로, 동양과 유럽 무역의 중심지 였던 베네치아는 이국적인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곳이었다.
야코모 데 카시오핀 /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 1634년경 캔버스에 유화
야코모 데 카시오핀은 안트베르펜 출신의 예술 애호가이자 수집가로, 이 초상화를 그린 안토니 반 다이크와 가까운 친구였다. 반 다이크는 그의 내성적인 성향을 잘 표현 했다. 초상화로 유명했던 플랑드르 화가 반 다이크는 1569년 부터 1621년까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섭정한 알브레히트 7세 대공과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부부의 궁정 화가로 일했다.
현재 햄프턴 궁전에 소장돼 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화가안드레아만테냐가그린<승리>연작을 작은 크기로 모사한 것이다. 카이사르(기원전 100-44)가 기원전 46년 갈리아를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 장면을 묘사했다. 만테냐의 그림을 판화로 옮긴 작품들은만테냐의작품이널리알려지는데큰역할을 했다.
사냥한 새 / 얀 페이트(1611-1661) 1641년 이후 캔버스에 유화
버들로 엮어 만든 바구니와 새장 주변에 죽은 새를 배열하고 여러 사냥 도구를 배치했다. 메추리, 자고새, 피리새, 오색방울새, 되새, 푸른박새, 종달새 등 다양한 종류의 새가 등장한다. 화가는 특유의 붓질로 깃털의 질감을 다채롭게 표현했다. 17세기 귀족 사이에 유행하며 귀족의 특권으로만 여겨지던 새 사냥은 부르주아 신흥세력에게도 퍼지며 더 유행했다.
사냥 도구 요하네스 레이만스(1633-1688) 계열 1660년경 캔버스에 유화
그림은 매 사냥과 연관된 도구가 벽에 실제로 걸린 것처럼 묘사했다. 화면 하단에 길게 놓인 총이 있고, 작은 새장과 모자, 미끼를 넣는 주머니, 호루라기 등이 보인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린 ‘ 트롱프뢰유’ , 즉 눈속임 기법의 그림은 17세기 중엽 정물화의 하위 장르로 발전했다. 눈속임 정물화는 작품이 걸릴 장소의 빛의 방향까지 고려해 주문 되었을 정도로 사실적인 세부 묘사를 주된 특징으로 했다.
| 대중에게 선보이다. 궁전을 박물관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 마르틴 판 메이텐스 2세(1695-1770) 1745-50년경
캔버스에 유화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0년 아버지 카를 6세가 사망하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보헤미아의 왕위를 차례대로 계승한다. 세 군주국의 위엄은 탁자 위에 올려둔 왕관으로 드러난다. 헝가리의 성 슈테판 왕관, 보헤미아의 성 바츨라프 왕관, 오스트리아의 대공관이 차례로 놓여 있다. 여성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이 174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의
약혼 축하연 /요한 카를 아우어바흐(1723-1786년경)
1773년
캔버스에 유화
1766년 4월 2일,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열린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과 작센 공작 알베르트의 약혼을 축하하는 공식 연회를 그린 것이다. 테이블 중앙에는 요제프 2세 황제와 황후가 자리하고 있고, 황제의 오른쪽에 신랑신부가 있다. 테레지아의 두 남자 대공과 후일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는 마리아 안토니아를 포함한 다섯 여자 대공이 왕위 계승 순서대로 앉아 있다.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 빈미술사박물관 특별전에서 계속되는 인물화와 회화들...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1755-1842) 1778년
캔버스에 유화
마리 앙투아네트로 잘 알려진 마리아 안토니아 는 1774년 프랑스 왕위 계승자 루이 16세와 결혼한다. 프랑스 대혁명 전부터 프랑스 국민들은 ‘정치에 간섭하는 오스트리아 여자’라 부르며 낭비가 심한 어린 왕비를 싫어했다고 한다. 왕비는 실크로 만들어진 전통적인 프랑스식 드레스를 입고 있다. 일생을 악평에 시달렸지만 한편으로는 일찍이 패션의 선구자였던 인물로 재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 시대의 앙숙 프란츠 2세와 나폴레옹
잔세트 76-79
안톤 마티아스 도마네크 금, 자기, 나무
|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당 테피스트리 연작
| 기적의 물고기 잡이
디자인 : 라파엘로 산치오 제작 : 야콥 괴벨스1세 1600년경 양모, 실크
이 작품은 예수가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 베드로, 안드레를 도와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 준 기적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있고, 안드레는 팔을 저으며 풍성한 수확량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기적을 체험한 후 어부들은 예수의 첫 제자가 된다. 이 기적은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베드로를 나타내기도 한다.
| 아테네에서 설교하는 사도 바울
디자인: 라파엘로 산치오 제작: 야코프 괴벨스 1세 1600년경 양모, 실크
작품은 사도 바울이 선교를 위해 아테네에 머물 렀던 일화를 묘사한 것이다. 바울은 아테네 사법 평 의회 중 광장에서 양팔을 들고 설교를 하고 있다. 설교에는 불멸에 대한 논의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1513년 영혼불멸에 관한 칙령을 내린 교황 레오 10 세와 연관이 있다. 이 작품은 판 앨스트가 바티칸 궁을 위해 만든 태피스트리의 여러 복제품 중 하나로 프란츠 2세가 1804년 나폴리 왕비로부터 매입하여 빈미술사박물관 소장품이 됐다.
| 프란츠 요제프 1세 미하이 문카치(1844-1900) 1896년경 캔버스에 유화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 육군 원수의 정복 위에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기사단 현장과 휘장을 갖추고 있다. 그는 1848년 오스트리아 황제가 된 후,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을 결성 하여 헝가리 왕으로도 즉위했다. 황제의 가장 큰 업적은 빈을 현대적 도시로 탈바꿈하고 빈미술사 박물관을 건립한 것이다. 19세기 헝가리를 대표 하는 화가 미하이 문카치는 초상화, 풍경화, 종교화 등으로 유명했다
| 엘리자베트(시시) 황후 요제프 호라체크(1830-18885) 1858년 캔버스에 유화
“시시”로도 불리는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 국민 이 가장 사랑하는 황후이다. 초상화는 그녀가 21세 때 모습을 그린 것으로 어두운 배경에 밝은 푸른빛 드레스가 미모를 돋보이게 한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그녀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엘리자베트에게 엄격한 황실은 감옥과 같았다. 결국 오스트리아에 마음을 붙이지 못한 비운의 황후 엘리자베트는 1898년 제네바 여행 도중 이탈리아인 무정부주의자 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스테파니 황태자비 94
한스 마카르트(1840-1884) 1881년
캔버스에 유화
스테파니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아들 루돌프 황태자와 17세 생일이 얼마 지나 지 않은 어린 나이 결혼했다. 꽃으로 장식한 우아한 새틴 드레스를 입은 황태자비의 초상화는 약혼을 기념하여 그린 선물이었다. 루돌프 황태자가 내연녀 메리 베체라와 동반 자살한 뒤, 스테파니 는 재혼해서 헝가리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러시아군에 의해 궁에서 쫓겨나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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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 빈미술사박물관 특별전 전시회는?
만나기 힘든 오스트리아 걸작을 만나볼 수 있던 기회!!!
다만 티켓팅도 너무 어려웠고, 전시공간 대비 관람객도 너무 많아서 사람에 시달리다가 돌아온 전시회가 되었다는...
주차장은 아래와 같이 업무용 주차장과 소형 주차장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옥내 주차장의 경우 지하 1층 부터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수용대수는 754대로 안내되어 있습니다. 옥외주차장의 경우 대부분 대형차량을 수용하는 곳으로 대부분 입구를 지나 왼쪽의 지하로 이동합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주차장 공사도 있고, 이건희 특별전 및 여러 큰 전시회가 있어 주차장 진입이 혼잡스럽다는 안내를 받아 일찍 도착했는데요. 사진과 같이 주차장 진입을 위한 긴 줄이... 지금까지 방문했던 것 중에서 가장 긴 줄이 아닐까 하네요. 주차장 진입까지 대략 20~30분 소요 되었네요. 여기에 주차하는데 10여분 결렸습니다.
| 소형주차장 모습
지하1층 관람객용 주차공간이 522대(장애인용 24대, 경차·하이브리드용 36대 포함)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장애인용 공간을 제외하는 만차입니다. 갓길에 주차한 차량들도 보이네요. 예매 시간은 다가오도 공간은 없고. 저도 순간 갓길 주차를 해야할지 나쁜 고민을 했네요. 주차진입인 주차 공간 난이도는 쉬운 편입니다. 초보운전자 분들도 무리 없이 주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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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중앙박물관 주차요금
주차요금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반 승용차 기준으로 기본 2시간에 2천 원, 이후 30분에 500원의 주차요금이 부과 됩니다. 1일 최대 1만 원의 국립중앙박물관 주차요금이 부과되니 큰 부담없이 특별전이나 상설전, 산책 등 여유있게 관람할 수 있습니다. 일반 주차객의 경우 사전 정산기를 통해 정산 후 출차하시면 편합니다만 신용카드 정산만 가능합니다. 물론 삼성페이등 실물카드가 없어도 정산 가능.
저도 간신히 국립중앙박물관 주차장을 빙빙 돌다가 빈 자리를 발견하고 주차에 성공 했네요. 비교적 이번에 방문할 이건희 특별전 전시장과 가까운...
| 국립중앙박물관 주차요금 할인
아래와 같이 조건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 주차장 할인이 가능합니다. 참고하세요
장애인 및 국가유공자의 경우 주차요금은 면재되며, 이외에도 경차나 친환경차량 다둥이 가족의 경우 주차요금 할인이 가능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 이용고객을 제외하고 일반 무료 및 유료관람 방문객의 경우 국립중앙박물관 주차요금 할인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3시간에 3천 원 가격이면 상당히 저렴한 요금이라는 생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