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이 건국되면서 사람의 수양과 도덕을 중시하는 인문人文시대가 열렸습니다. 사대부들은 시와 글씨, 그림에 자신의 이상을 담았습니다. 그들이 남긴 글과 그림은 조선을 물들이며 문文의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문치文治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검지만 오색五色을 담은 먹은 사대부의 내면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도구였고, 자연과 만나며 더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수묵산수화의 풍경은 단순한 경치가 아니라 사대부가 꿈꾼 이상세계이자 내면을 확장하는 창이었습니다. 2부는 서화를 통해 사대부들이 바라본 세계와 품었던 인문정신을 들여다봅니다.
새나라 새미술 전시회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2부 '묵 墨, 인문으로 세상을 물들이다' 는 총 3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1. 인문정신, 자연에서 길을 찾다
자연은 우주 질서가 담긴 거대한 공간입니다. 사대부들은 자연을 보며 인간이 나아갈 길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그림 속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은 영원히 변치 않는 자연의 힘을 보여주고, 계절에 따라 바뀌는 풍경은 세상이 일정한 주기에 따라 변하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대부들은 이러한 자연의 원리를 깨닫고 흐름에 순응하며, 백성의 삶을 돌보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더 나은 세상을 꿈꿨습니다.
먼저 입구에서부터 고풍스러운 그림들이 보입니다.
산수도 山水圖
계절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산수
작가 모름 조선 16세기 중반 비단에 먹과 색 모리박물관
봄, 여름, 가을의 경치를 담은 산수화로, 본래 사계절이었으나 겨울은 결실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자연의 변화에 주목한 이와 같은 사시도四時圖 유형의 그림이 자주 그려졌습니다. 양식적으로는 한쪽으로 치우친 구도, 넓은 공간, 언덕 위 소나무 등에서 안견파 화풍이 드러나지만, 물결치는 구름과 강한 명암 대비는 미법산수와 절파 화풍의 흔적도 엿보입니다.
거대한 산을 배경으로 정교한 건축 묘사와 화려한 채색 등은 화원의 솜씨로 여겨지며, 건축 기단의 ‘허튼층쌓기’는 조선 건축 표현의 한 단면입니다. 이 작품은 조선 전기 회화의 새로운 기준작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그림입니다.
| 안견의 작품인가? 안견의 작품이 아닌가?
안견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본관은 지곡이며 자는 가도, 득수이고, 호는 현동자와 주경입니다. 그는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시기에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하며 정4품 호군까지 올랐으며, 산수화를 비롯해 초상, 화훼, 누각, 말, 의장도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안견은 안평대군을 가까이 모시면서 그가 소장한 고화들을 접하고, 북송 곽희의 화풍을 바탕으로 여러 화풍의 요소를 융합해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였으며, 이는 조선 중기까지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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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표작은 1447년 안평대군의 꿈을 바탕으로 3일 만에 완성한 ‘몽유도원도’로, 현재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안견의 화풍과 영향력은 후대 화가들에게 계승되어 ‘안견파’라는 유파로 불리며, 조선뿐 아니라 일본의 수묵화 발전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이번 새나라 새미술 전시회 : 조선 전기 미술 대전에서 안견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데요
적벽도 赤壁圖
적벽에서 뱃놀이
구전舊傳 안견安堅(15세기 활동) 조선 16세기 후반 비단에 먹과 엷은 색 덕수2417
북송의 문인 소식蘇軾(1037~1101)의 「전적벽부前赤壁賦」에 나온 뱃놀이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소식은 음력 7월 보름에 적벽 아래에서 배를 타고 시를 읊으며 달을 감상했는데, 조선 전기 사대부들도 소식을 본받아 7월 보름에 배를 띄우는 풍속을 즐겼습니다. 그림에는 절벽 아래 소식과 일행이 술을 마시고 퉁소를 부는 장면이 담겨 있으며, 험하고 복잡한 산과 바위의 표현에서 중국 명나라 절파 화풍의 영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본래 안견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나 그의 화풍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촌석조도 漁村夕照圖
평사낙안도 平沙落雁圖
어촌에 지는 저녁노을과 모래에 내려앉는 기러기
전傳 안견安堅(15세기 활동) 조선 15세기 말~16세기 초 비단에 먹과 엷은 색 야마토문화관
소상팔경 중 ‘어촌에 지는 저녁 노을’과 ‘모래에 내려앉는 기러기’를 묘사하였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고깃배가 고기를 잡고 돌아오는 장면과 함께, 먼 산 뒤로 붉게 물든 석양이 표현되어 있으며, 왼쪽 그림에는 멀리서 날아오는 기러기 떼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양쪽 화면은 각각 오른쪽과 왼쪽으로 구도가 치우쳐 있으며, 나란히 걸었을 때 균형 잡힌 구도를 이룹니다. 나뭇가지는 게발처럼 뾰족한 해조묘蟹爪描 기법으로 표현되었고, 산봉우리의 나무는 가늘고 날렵한 세형침수細形針樹로 묘사되어 전체적으로 정제된 필치를 보여줍니다.
위에서 소개한 안견의 작품은 이번 새나라 새미술 전시회 조선 전기 미술 대전에서 7월 초까지만 전시되는 작품으로 지금 방문하시면 보실 수 없습니다. 아마도 다른 작품으로 대체되어 있을 것 같네요.
산수행려도 山水行旅圖
산수 여정
작가 모름 조선 16세기 중반 비단에 먹과 엷은 색 후쿠오카시미술관
긴 여정 중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산속 집 한 채가 그려져 있습니다. 집 옆으로는 첩첩이 이어진 능선 사이로 긴 폭포가 겹겹이 떨어지며, 떨어진 물은 언덕 왼쪽의 강가로 이어지는 듯한 구도를 이룹니다. 마당에는 두 마리의 닭이 있고, 쌍상투를 튼 아이가 손에 빗자루를 들고 대문을 열고 있어 일상의 정취를 더합니다. 나귀를 탄 인물들과 수레를 몰고 있는 인물이 이 집을 향해 오고 있는 것으 미루어 이들이 여정 중에 이 집에 잠시 들러 쉬려는 의도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거대한 산이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도 비교적 가옥과 인물이 크게 묘사된 점이 특징입니다.
동자견려도 童子牽驢圖
나귀를 끄는 동자
김시金禔(1524~1593) 조선 16세기 후반 비단에 먹과 엷은 색 개인소장 보물
개울을 건너기 싫어 버티는 나귀와 이에 맞서 고삐를 힘껏 잡아당기는 아이의 모습이 해학적이면서도 목가적인 정취를 자아냅니다. 반면 주변 자연은 대담한 구도와 강한 대비로 시선을 끕니다. 화면 왼쪽의 소나무는 쓰러질 듯 솟은 산과 맞닿아 있고, 바위와 암석은 도끼로 내리친 듯한 거친 붓질인 부벽준斧劈皴 기법으로 단단한 질감을 묘사했습니다. 그림 속 나귀는 예부터 벼슬을 할지, 은둔할지를 고민하는 선비의 마음을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한림제설도 寒林霽雪圖
김시가 그려준 겨울 풍경
김시金禔(1524~1593) 조선 1584년 비단에 먹 클리블랜드미술관 1987년 윌리엄 H. 말랫 부부 기금
김시가 안사확安士確에게 그려준 겨울 풍경입니다. 나귀를 탄 인물이 산길을 따라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고, 화면 위쪽 눈 쌓인 웅장한 산이 시선을 끕니다. 산과 바위를 왼쪽으로 치우치게 배치하고, 강과 안개를 통해 표현한 넓은 공간감, 게 발톱처럼 뾰족하게 그려진 나뭇가지 표현은 15세기 안견파 화풍을 이어받은 모습입니다. 한편, 한쪽으로 기울어진 바위산과 강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각진 산 표현에서는 중국 명나라 절파 화풍의 영향이 드러납니다. 15세기와 16세기 화풍이 함께 나타나는 과도기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입니다.
김시(金禔, 1524~1593)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본관은 연안이며 호는 양송당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는 김안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벼슬길이 막혀 평생을 독서와 서화에 전념하였고, 산수, 인물, 우마, 화조 등 다양한 분야의 그림에 뛰어났으며, 대표작으로는 삼성미술관에 소장된 ‘동자견려도’가 있습니다.
송하보월도 松下步月圖
달밤 소나무 아래를 걷다
전傳 이상좌李上佐(16세기 활동) 조선 16세기 비단에 먹과 엷은 색 덕수2149
마르고 단단한 소나무가 쇠처럼 구부러져 자라고, 바람에 날린 솔잎들이 허공에 흩날립니다. 하늘에는 달이 떠 있고, 소나무 아래에는 고사와 시동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이러한 구도는 중국 남송 마하파 화풍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 표현에서는 차이를 보입니다. 달은 붉게 칠해져 있고, 금니로 달 테두리를 칠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소나무 아래의 매화는 붉은 매화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지금의 소슬한 분위기보다는, 원래 화려하고 경쾌한 봄의 정취를 담고 있었던 작품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신숙주 시 申叔舟 詩, 김종서 시 金宗瑞 詩
소상팔경시첩瀟湘八景詩帖》 15-16면·37면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의 아름다운 여덟 풍경을 읊은 시
이영서李永瑞(?~1450), 김종서金宗瑞(1383~1453), 신숙주申叔舟(1417~1475) 등
조선 1442년 이후 종이에 먹 신수14513 보물
안평대군 이용李瑢(1418~1453)이 중국 후난성湖南省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의 아름다운 풍경을 읊은 소상팔경시瀟湘八景詩를 엮은 시첩입니다. 이 시첩에는 조선 전기 인물 19명의 시詩가 실려 있습니다. 그중 김종서의 시는 해서와 행서를 섞은 자연스러운 글씨로 친필로 여겨집니다. 신숙주의 독특한 예서 글씨는 후대에 그의 글씨를 모방해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작품은 소상팔경에 대한 조선 전기 명사들의 인식과 서예 문화를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사시팔경도 四時八景圖
아름다운 사계절 풍경
전傳 안견安堅(15세기 활동) 조선 15세기 중반 비단에 먹과 엷은 색 덕수3144
사계절을 두 폭씩, 이른 봄부터 늦은 겨울까지 여덟 장면으로 구성한 작품입니다. 여름은 물기 많은 필묵으로, 겨울은 거친 필선으로 계절감을 표현하였습니다. 단순한 자연 풍경의 재현을 넘어 자연 만물의 생장과 소멸이라는 이치를 이상세계로 형상화한 그림으로, 농본農本 이념과도 깊이 관련됩니다. 절기에 따라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일은 왕을 비롯한 지배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덕목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은 백성의 삶을 이해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사관수도 高士觀水圖
자연 속 생각에 잠긴 선비
전傳 강희안姜希顔(1417~1464) 조선 16세기 중반 종이에 먹 본관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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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질 듯한 거대한 절벽 아래 한 사람이 물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거대한 절벽은 붓을 단번에 쓸어내려 표현하였고, 절벽 아래로 뻗어 나온 넝쿨은 빠른 필선으로 표현하여 전체적으로 강렬한 필묵이 돋보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강희안의 필치를 성글고 거친 붓질이 특징이라고 한 언급과 맞닿아 있습니다. 화면 왼편 가운데 「인재仁齋」 인장이 있어 그의 작품으로 전해오고 있지만, 그의 작품으로 보지 않는 의견도 있습니다.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화가, 시인으로,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경우, 호는 인재입니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해 집현전 학사, 호조참의, 황해도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훈민정음 해석과 『용비어천가』 주석, 『동국정운』 편찬 등 학문적 업적도 남겼습니다. 시, 글씨, 그림 모두에 뛰어나 ‘삼절’로 불렸으며, 대표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고사관수도」를 비롯해 「산수인물도, 교두연수도 등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인 『양화소록』을 저술하였으며, 평생 꽃을 가꾸고 예술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무이구곡도 武夷九曲圖
아홉굽이 물길을 따라 수양하다
이성길李成吉(1562~1621) 조선 1592년 비단에 먹 덕수2216
중국 송나라 주희朱熹(1130~1200)가 머물렀던 무이산武夷山의 아홉 굽이 물길을 그린 그림입니다. 계곡은 1곡부터 9곡까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며, 1곡이 하류, 9곡이 상류에 해당합니다. 각 굽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경치를 배치하였습니다.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여정은 인간의 본성을 되찾고자 하는 수양의 길로 비유되는데, 이는 자연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한 주희의 삶을 동경한 당시 사대부들의 이상과 내면을 반영한 그림입니다.
이성길(李成吉, 1562~1621)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화가로, 본관은 고성이고 자는 덕재, 호는 창주입니다. 그는 병조참판 등 관직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과 북관대첩 등으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예술적으로도 뛰어나 <쌍포승첩도>와 <무이구곡도> 같은 산수화와 전쟁화로 유명하며, 특히 <무이구곡도>는 조선시대 무이구곡도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이성길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시와 그림에서도 높은 예술적 감각을 보여주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새나라 새미술 전시회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전시 2부 '묵墨, 인문으로 세상을 물들이다' 두 번째 공간입니다.
2-2. 사람과 사람, 인문으로 기록되다
조선 시대에는 서화가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지고 다양하게 활용되었습니다.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마음, 정신을 담아내려는 의지가 글과 그림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충忠과 효孝 같은 유교적 덕목을 널리 알리려고, 동료와 뜻을 나누려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려고, 이들은 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겨진 서화는 조선 전기 사람들이 삶 속에서 남긴 흔적, 즉 인문이 되었습니다.
이번 공간의 선비들의 초상으로 시작합니다.
김진 초상 金璡 肖像
16세기 평상복을 입은 선비의 초상
작가 모름 조선 1572년경 비단에 먹과 색 의성 김씨 천전파 대종택(한국국학진흥원 기탁) 보물
김진(1500~1580)의 73세 초상입니다. 바닥에는 표범 가죽 방석을 깔았는데, 원근감 없이 네모난 모양으로 단순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옷은 평면적으로 그려졌지만, 얼굴에는 붓으로 연하게 음영을 넣어 볼과 입, 코 주변의 주름을 살려 입체감이 느껴집니다. 김진은 이 초상을 자신의 별장 정자에 걸어두고, 자연 속에서의 여유로운 삶을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는 바람을 읊기도 했습니다. 16세기 후반 평상복을 입은 선비의 모습을 담은 귀한 초상화입니다.
장말손 초상 張末孫 肖像
15세기 공을 세운 신하의 초상
작가 모름 조선 1476년경 비단에 먹과 색 인동 장씨 연복군 종택 보물
장말손(1431~1486)은 세조와 성종 대 활약한 인물입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 녹훈되었습니다. 이 초상화는 1476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장말손은 푸른빛이 도는 검은 예복을 입고 사모를 쓴 채, 몸과 얼굴을 약간 왼쪽으로 돌려 앉아 있습니다. 얼굴은 연한 붓질로 입체감 있게 표현되었고, 눈매와 주름은 섬세한 선으로 그렸습니다. 가슴에는 금실로 수놓은 백한白鷴 흉배를 하고 있어 당시 그가 3품 관직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초상은 15세기 후반 공신 초상화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홍가신 초상 洪可臣 肖像
17세기 초 공을 세운 신하의 초상
작가 모름 作家未詳 조선 朝鮮 17세기 비단에 색 絹本彩色 덕수2831
홍가신洪可臣(1541~1615)은 1596년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시기에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홍주목사로서 반란 진압에 앞장섰습니다. 1604년 그의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청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습니다. 이 초상화는 인물의 복식과 자세, 이전에 없던 바닥에 깔린 채전彩氈(문양이 있는 화려한 깔개) 등을 통해 17세기 초 공신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홍가신이 착용한 흉배에는 기러기와 구름 무늬가, 허리에는 삽금대鈒金帶를 착용하고 있어 그가 당시 정2품 관직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현보 초상 李賢輔 肖像
16세기 승려의 진영처럼 그려진 선비의 초상
전傳 옥준상인玉峻上人 조선 1537년경 비단에 먹과 색 영천 이씨 농암종택(한국국학진흥원 기탁) 보물
이현보(1467~1555)는 조선 중종 대 문신입니다. 초상에서 그는 머리에 사모 대신 검은 발립鈸笠을 쓰고 있으며, 오른손에 불자拂子를 들고 왼손은 허리의 서대犀帶를 쥐고 있습니다. 벼루갑과 서책이 놓인 경상經床 앞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승려의 진영과도 같아 불교 회화의 영향이 엿보입니다. 실제로 이현보 아들의 문집에 그가 동화사의 승려 화가 옥준상인玉峻上人과 교유한 시문이 남아 있습니다. 이 그림도 1537년 이현보가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옥준상인이 그려준 것으로 추정됩니다.
열심히 일하고 살았으면, 즐길 줄 알아야지!
조선시대에도 회식은 많았구나!!!
미원계회도 薇垣契會圖
안견풍으로 그린 사간원 관리들의 모임
그림 작가 모름 제시題詩 성세창成世昌(1481~1548) 조선 1540년경 비단에 먹 신수13556 보물
그림 제목의 ‘미원薇垣’은 사간원의 별칭입니다. 참석자 중에는 퇴계 이황李滉(1501~1570)도 포함되어 있어 흥미를 더합니다. 이들은 관복을 차려입고 지위에 따라 차례대로 앉아 있습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그들이 자리한 모임의 배경입니다. 높은 산과 쓰러질 듯한 절벽, 언덕 위의 소나무 등 안견풍 산수가 모임 장면보다 훨씬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 전기 계회도는 안견풍으로 그려진 이상경을 배경으로 모임을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사간원(司諫院)은 조선시대에 국왕과 조정의 잘못이나 부당한 점을 바로잡기 위해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하던 독립 언론기관입니다. 사간원은 사헌부, 홍문관과 함께 ‘삼사(三司)’로 불리며, 조선 정치의 핵심적인 견제와 감시 역할을 맡았습니다. 관원들은 ‘간관(諫官)’이라 불렸고, 왕의 언행이나 정책, 인사 문제 등에 대해 자유롭게 비판하고 바로잡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사간원은 조선 왕정에서 공론(公論)과 민의(民議)를 전달하는 중요한 창구로, 왕권의 독주를 견제하고 균형 있는 정치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호조낭관계회도 戶曹郎官契會圖
모임 장면이 부각된 호조 낭관들의 모임
작가 모름 조선 1550년경 비단에 색 신수2234 보물
호조戶曹의 전·현직 낭관이 모여 교류하는 모습을 담은 계회도입니다. 정자 안팎의 인물들은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참석자 명단은 8명이지만 그림 속에서는 9명의 관원이 보입니다.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을 착용하고 반원 형태로 둘러앉은 8명은 허리를 숙인 채 가운데 북쪽에 앉은 인물에게 예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산수보다 인물 묘사의 비중이 크고, 구성도 더욱 실제 모임의 질서와 형식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16세기 중엽 계회도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호조(戶曹)는 조선시대 육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중 두 번째로 높은 서열을 가진 행정기관으로, 호구(인구), 공납, 조세, 국가 재정 및 경제 전반을 담당하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기획재정부에 해당하는 부서입니다. 호조는 판적사(호구·토지·조세), 회계사(회계·재정), 경비사(국가 경비·식량 등) 등 세 부서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인구 조사, 세금 부과, 토지와 식량 관리 등 국가 재정의 핵심 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탁지아문으로 개칭되기 전까지 조선의 재정과 경제를 총괄하는 중추 기관이었습니다.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 蓮榜同年一時曹司契會圖
안견풍으로 그려진 과거 급제 동급생들의 모임
그림 작가 모름 글·글씨 김인후金麟厚(1510~1560) 조선 1542년경
종이에 먹과 엷은 색 국립광주박물관 광주3869 2001년 울산김씨 문정공 대종중 기증
이 그림은 1531년 사마시司馬試에 함께 급제한 일곱 명의 인물들이 10여 년 후인 1542년경 다시 모임을 갖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계회도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구도, 언덕 위에 배치된 두 그루의 소나무 등에서 조선 전기 대표 화풍인 안견풍 산수화의 전형적인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화면 상단에는 명필 김인후가 쓴 시詩가 적혀 있으며, 참석자 명단 양옆에는 매화와 대나무가 있는 점이 특징입니다.
새나라 새미술 전시회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제2부. 묵墨, 인문으로 세상을 물들이다. 다음 공간에는 조선 전기의 서화 중에서 서예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행초 行草
목판으로 인쇄한 안평대군 글씨 병풍
이용李瑢(1418~1453) 조선 종이에 목판 강릉 오죽헌시립박물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이 당나라 문인들의 시를 행서와 초서를 섞어 쓴 글씨를 후대에 목판으로 찍은 작품입니다. 나무판에 새긴 글씨라 획이 조금 각져 보이지만, 안평대군 특유의 시원하게 펼쳐지는 큰 글씨에서는 여전히 활달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 작품에는 흘려 쓴 행서와 획을 과감히 생략한 초서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습니다. 삐치고 파인 획, 길게 뻗은 가로선, 글자의 위아래를 연결한 구성, 크기 차이를 둔 배열 등에서는 안평대군이 좋아했던 원나라 조맹부趙孟頫와 선우추鮮于樞의 영향이 뚜렷하게 보입니다.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로,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로 불렸던 조선 전기의 대표적 예술가이자 왕자입니다. 그는 인왕산 기슭에 비해당과 무이정사를 짓고 많은 책과 서화를 수장하며 문인·예술가들과 교유했고, 당대 서화계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문종 사후 어린 단종을 보위하는 정치 세력의 중심에 섰으나, 1453년 수양대군(세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유배되어 교동도에서 사사되었으며, 이후 숙종 때 복권되었습니다
초서 草書
김구가 초서로 쓴 이별시
김구金絿(1488~1534) 조선 1519년 종이에 먹 개인 소장(충재박물관 기탁)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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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가 삼척부사로 떠나는 친구 충재 권벌權橃을 위해 써준 작품입니다. 16세기를 전후해 명나라의 새로운 초서풍이 조선에 유입되었고, 김구는 이러한 서풍에 민감하게 반응한 대표적인 명필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감정이 폭발하듯 미친 듯이 써 내려간 초서, 즉 광초狂草를 능숙하게 구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그의 부드럽고 활달한 붓놀림이 돋보입니다.
천자문 千字文
석봉 한호가 쓴 천자문
글씨 한호韓濩(1543~1605) 조선 1583년 간행 종이에 목판 개인소장 보물
조선 선조 대 명필 석봉石峯 한호가 쓴 천자문입니다. 천자문은 예로부터 글씨를 처음 배울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교육서였습니다. 이 책은 1583년(선조 16), 선조의 명을 받아 한호가 직접 쓰고 나라에서 목판으로 찍어 배포한 것입니다. 처음 간행된 판본인 만큼 석봉체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습니다. 글씨는 획의 굵기가 일정하고, 점과 선, 자형 모두 단정하고 깔끔합니다. 학습용 글씨로 손색이 없는 구조와 균형을 보여줍니다. 이후 한호의 『천자문』은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었으며 전국의 관아,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석봉진적첩 石峯眞蹟帖
석봉 한호가 말년에 쓴 글씨
글씨 한호韓濩(1543~1605) 조선 1602~1604년 종이에 먹과 금니 본관2203 보물
조선을 대표하는 명필 석봉 한호의 노년 글씨로, 모두 세 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첩에는 한호가 가평군수에서 물러난 1602년부터 흡곡현령으로 있었던 1604년 사이에 쓴 글씨가 실려 있습니다. 검은색이나 감색紺色 종이에 금니金泥로 글씨를 썼으며, 해서·행서·초서의 다양한 서체를 사용했습니다. 세 번째 첩은 흰 종이에 검은 먹으로 도교 경전인 「설상청정경說常淸淨經」을 정갈하게 옮겨 쓴 것입니다. 이 첩은 석봉체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평가되며, 한호의 깊은 서예 세계를 가장 잘 드러내는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초서 草書
조선으로 전래된 명나라 초서 병풍
장필張弼(1425~1487) 중국 명明 15세기 종이에 먹 개인소장(충재박물관 기탁) 보물
16세기 전반, 중국 명나라 서예가 장필의 글씨가 조선에 전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한 초서 작품입니다. 이 병풍은 문신 충재冲齋 권벌權橃이 사행 시에 북경에서 구입한 것입니다. 획마다 움직임이 강하고, 화면 전체에 리듬감과 생동감이 살아 있습니다. 이런 장필의 초서풍은 조선의 서예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자암 김구金絿, 고산 황기로黃耆老 등과 같은 16세기 조선의 대표적 초서 명필들이 장필의 필법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서풍을 발전시켰습니다.
새나라 새미술 전시회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전시회 2부. 묵墨, 인문으로 세상을 물들이다. 마지막 전시공간으로 이동합니다.
2-3. 영원한 조선을 꿈꾸다
조선 전기 궁궐은 아름답고 상징적인 그림들로 꾸며졌습니다. 나라가 평안하고 왕이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태평한 세상이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기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특히 자연에서 복을 상징하는 존재들을 그림에 담아 좋은 기운이 깃들길 바랐습니다. 이처럼 궁궐 안에 그려진 그림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서 조선이 오래도록 번영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상징적 표현이었습니다.
앞의 두 전시공간에서는 전통적인 서화가 중심이었다면, 이번 공간은 기복을 비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림들 화조도와 다양한 채색화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화조도 花鳥圖
궁중 정원의 신기한 꽃과 새
전傳 신잠申潛(1491~1554) 조선 16세기 전반 종이에 먹과 색 덕수1154
문인화가 신잠이 그린 네 폭 그림으로, 원래는 병풍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각 폭마다 새와 동물, 꽃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1폭에는 매화와 동백꽃이 핀 가지 위에 동박새 한 쌍이 앉아 있습니다. 2폭에는 태호석과 장미를 배경으로 연못에서 오리 한 쌍이 노닙니다. 3폭은 꽃가지 위에 앉은 수대조綏帶鳥로 보이는 새 한 쌍과 그 아래에 토끼 한 쌍이 등장합니다. 4폭에서는 여문 조 이삭과 들국화가 가을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신잠은 신숙주의 증손으로 태어나 관리로 활동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유배를 당한 뒤 서화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십장생도 十長生圖
장수와 왕실 번영의 염원
작가 모름 조선 16세기 후반 비단에 색 일본 개인소장
열 가지 장수의 상징물을 그린 그림입니다. 오른쪽 화면에는 해, 사슴, 영지버섯, 소나무가 있고, 왼쪽 화면에는 달, 학, 대나무, 거북이가 등장하며, 두 화면 모두에 산과 시냇물이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사슴은 하얀 털로 표현되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사슴이 1,500년을 살면 흰 사슴이 된다고 전합니다. 두 폭은 구름과 안개에 싸인 산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곁에 해와 달이 떠 있어 화면 전체에 신비롭고 장엄한 분위기를 더해 줍니다. 십장생도는 고려 말부터 그 기록이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궁궐 장식이나 의례용 그림으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십장생(十長生)이란?
십장생은 ‘늙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을 상징하는 열 가지 자연물 또는 사물을 의미합니다. 이는 한국의 전통적인 민속 신앙과 도교, 신선 사상에서 유래했으며, 인간의 장수와 건강, 영원한 삶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십장생은 조선시대 궁중과 민간에서 그림, 자수, 도자기, 가구, 복식 등 다양한 예술과 생활용품의 문양으로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십장생의 구성
십장생을 이루는 열 가지는 시대와 지역, 작품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해(日)
생명, 권위, 영원, 남성적 원리
산(山)
불변, 생명의 근원, 신성, 장수
물(水)
생명력, 복, 깨끗함, 영속성
돌(石)
변치 않는 견고함, 영원성
구름(雲)
신령스러움, 길상, 자연의 조화
소나무(松)
절개, 신의, 장수, 불사
대나무(竹)
절개, 불변, 장수
거북(龜)
장수, 지혜, 인내, 재물
학(鶴)
불사, 고귀함, 입신출세
사슴(鹿)
장수, 선함, 평화, 재생
불로초(芝)
불로장생, 신비, 소망
가응도 架鷹圖
충신을 상징하는 매
전傳 이암李巖(1507~1566) 조선 16세기 중반 비단에 먹과 색 일본민예관
횃대 위에 매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단단한 부리, 매서운 눈, 발끝의 날카로운 발톱은 섬세한 필치로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꼬리 깃에는 ‘시치미’라 불리는 표식이 달려 있는데, 이는 주인 있는 매라는 뜻입니다. 이암은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증손으로, 특히 동물 그림에 능했던 화가입니다. 매는 예로부터 충신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졌는데, 횃대에 묶여 있는 매는 왕에게 바른말을 하며 간신을 물리치는 신하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화조구자도 花鳥狗子圖
꽃나무 위 새와 강아지
이암李巖(1507~1566) 조선 16세기 중반 종이에 먹과 엷은 색 개인소장 보물
한 쌍의 새가 앉아 있는 나무 아래 강아지 세 마리가 평화롭게 쉬고 있습니다. 화면 맨 앞에 있는 강아지는 벌레를 입에 문 채 엎드려 있고, 다른 두 마리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각각 잠을 자거나 먼 곳을 바라보며 앉아 있습니다. 강아지는 윤곽선을 쓰지 않고 먹의 진하고 옅음을 조절하여 칠했지만, 나무는 형태를 또렷하게 드러내기 위해 선으로 윤곽을 그려 넣었습니다. 또한 껍질의 울퉁불퉁한 질감을 살린 나무 표현은 이암의 특징적인 기법입니다. 배경을 생략하고 나무와 새, 강아지만을 그려 소재에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합니다.
새나라 새미술 전시회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2부. 묵墨, 인문으로 세상을 물들이다 마지막 공간에는 소개한 작품 이외에도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나는 왜 이런 그림들이 좋은지... 너무나 좋더라는...
나전 칠 모란 넝쿨무늬 능화형 반 螺鈿漆牡丹唐草文菱花形盤
조선 15~16세기 도쿄국립박물관
주름질로 작은 꽃과 넝쿨무늬를 만들고 줄기는 금속으로 표현하는 고려 나전칠기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모란 넝쿨무늬는 고려시대 도안화된 무늬에 비해 사실에 가깝게, 바람에 흩날리는 듯 표현되었습니다. 무늬 사이의 여백을 충분히 둔 점은 이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고려와 조선을 연결하는 과도기적 작품이지만 조선 전기 나전칠기의 새로운 풍조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나전 칠 국화 넝쿨무늬 상자 螺鈿漆菊唐草文箱子
고려 14세기 후반-조선 15세기 야마토문화관
려 나전의 전통을 기반으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국화와 모란 넝쿨무늬, 세부를 선각으로 묘사하는 모조법毛彫法, 넝쿨 줄기와 경계선에 사용된 금속 등은 고려시대의 전통입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비해 무늬의 규칙성과 밀집도가 낮아지고 넝쿨 흐름이 보다 유연해지면서 부드러운 느낌을 줍니다. 각 면의 무늬가 옆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전기 나전칠기에 나타나는 새로운 표현 방식이기도 합니다. 조선 전기 나전칠기는 왕실 용품이나 왕실의 하사품, 외국과 교류에서 예물로 사용되는 고급 물품이었습니다
오늘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새나라 새미술 전시회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2부. 묵墨, 인문으로 세상을 물들이다 소개를 마칩니다. 다음 공간은 '3부 금金, 변치 않는 기도를 담다'로 조선의 불교미술을 만나볼 수 있는데요.
우선 외규장각의궤의 가치와 역사적 아픔과 환수과정 등 많은 이야기가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직 소유권은 프랑스에 있는) 기록문화의 정수입니다.
오늘은 '왕의서고' 외규장각 의궤 전시장 위치 및 전시해설 (도슨트)시간 등 관람정보 공유합니다.
| 외규장각 의궤 전시실 위치 201호
위치는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 2층 201호 입니다. 박물관에서 검색대를 통과하고 바로 왼쪽 2층 맨 첫 방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등으로 이동하시면 되고요.
바로 건너편에는 또 하나의 대표 전시관인 사유의 방에서 반가사유상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 왕의 서고 '어진 세상을 꿈꾸다'
외규장각 의궤는 조선 왕실의 주요 의식과 행사를 기록한 책인 의궤 중, 강화도에 위치한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특별한 의궤들을 의미합니다. 이 의궤들은 주로 국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된 어람용으로, 국내외에 단 한 권만 존재하는 유일본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매우 높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닙니다. 외규장각은 1782년(정조 6년)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의 별관으로, 기존의 규장각(내규장각)과 구분하여 서적을 분산 보관했습니다만...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입하면서 외규장각은 불에 타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권의 도서가 프랑스에 약탈되었습니다. 약탈된 의궤는 오랜 기간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분관의 창고에 방치되어 있었고, 1979년 박병선 박사가 그 존재를 확인해 한국에 알렸습니다. 이후 환수를 위한 노력과 협상이 이어졌으나, 2011년에서야 145년 만에 1차분 75권이 반환되었고, 이후 전량이 5년마다 갱신하는 대여 형식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소유권은 여전히 프랑스에 있습니다.
| 약정은 치욕적이다.
사실 당시의 협정은 물론 최선을 다한 결과이고 결국 우리의 손에 있지만 협정 내용은 치욕적이라는 생각입니다.
외규장각 의궤 반환 약정은 5년마다 갱신하는 대여(임대, 기탁) 방식으로 체결되었으며, 실물 도서는 한국에 반환되지만 소유권은 프랑스에 남아 있습니다. 대여 기간은 5년 단위로 갱신할 수 있고, 반환된 의궤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전시됩니다. 소유권이 프랑스에 있기 때문에, 한국이 전시나 연구 등으로 의궤를 활용하려면 프랑스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한편, 프랑스는 반환 조건으로 등가의 도서를 맞교환(대차)할 것을 요구했으나, 국내 여론의 반발로 인해 최종적으로 맞교환 없이 대여 형식만 채택되었습니다.
| 전시해설 매일 13시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전시 '왕의 서고' 전시회 전시해설은 휴일 없이 매일 13시에 외규장각의궤 도슨트가 진행됩니다. 전시해설 진행시간은 약 30분입니다.
외규장각 의궤 전시 '왕의 서고' 전시회는 총 4개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람시간은 1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01. 책이 입는 옷, 책의
전시장 첫 공간은 이번 왕의 서고 전시회 포토존이자 환수된 의괘의 모형이 전시된 공간입니다.
靖殿都監儀軌 (정전도감의궤)
궁궐의 주요 전각(정전)과 관련된 행사의 절차와 내용을 기록한 도감의 공식 문서
嘉禮都監儀軌 (가례도감의궤)
왕실 혼례 등 경사스러운 의식의 절차와 내용을 기록한 도감의 공식 문서
프랑스 것들이 외규장각의궤에 붙여놓은 분류 스티커 'CHINOIS' 한국이 아닌 중국으로 분류되어 있다.
敬惠嫄嬪禮部監儀軌 (경혜원빈예부감의궤)
경혜 원빈(왕세자빈) 관련 예식을 담당한 예부감에서 절차와 내용을 기록한 공식 문서
02. 왕실의 위엄 만세의 모범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전시 '왕의 서고' 전시회 두 번째 섹션은 두 점의 의궤가 넓은 공간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인선왕후의 장례를 기록한 의궤
어람용 의궤의 외형과 역사적 가치
이 의궤는 제작 당시의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간직하고 있는 어람용(御覽用) 의궤입니다. 표지는 큰 구름무늬와 작은 보배무늬가 어우러진 초록색 비단으로 만들어졌으며, 다섯 개의 구멍을 뚫어 변철을 덧댄 뒤 황동못으로 책을 고정하였습니다. 앞뒤 표지의 마감은 국화 모양의 장식으로 품격을 더했고, 제목은 흰색 비단 위에 따로 쓴 뒤 표지에 붙여 어람용 의궤의 고급스러운 외형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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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내용과 특징
이 의궤는 1674년 승하한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의 장례 절차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선왕후의 시신을 여주 영릉(英陵)으로 운구할 때 전례 없이 남한강의 물길을 이용한 점이 특징적입니다. 배의 원활한 운행을 위해 강 주변의 바위를 깨고 정비하는 등, 수로 발인의 준비와 절차가 매우 구체적으로 수록되어 있어 당시 장례 문화와 기술, 그리고 왕실 의례의 엄격함을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어람용 의궤는 조선 왕실의 장례 의식뿐만 아니라, 당시의 예술적·기술적 수준과 기록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인선왕후의 장례를 기록한 의궤
| 즉위한 숙종이 쓸 가마와 의장을 제작한 일을 기록한 의궤
별삼방 의궤의 의의와 내용
이 의궤는 조선 숙종 임금께서 앞으로 사용하실 가마와 각종 의장물을 제작하기 위해 설치된 별삼방의 업무를 기록한 소중한 자료입니다. 숙종 임금께서는 1674년 현종께서 승하하신 후 왕위를 계승하셨으나, 27개월 동안 현종의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상복을 입고 계셨습니다. 장례가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하실 시기가 다가오자, 왕께서 사용하실 새로운 물품들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즉위 2년째에 별삼방이 설치되었습니다.
별삼방은 현종, 숙종, 경종, 영조 네 분의 임금 시기에만 운영된 특별한 기구입니다. 이 의궤는 숙종대 별삼방의 설치 경위와 담당 업무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록으로, 당시 별삼방이 1661년 현종 2년에 설치된 별삼방의 전례를 따라 운영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별삼방에서 사용할 예산과 물품 역시 이전의 별삼방 의궤를 참고하여 책정하였으며, 국왕의 의장물 마련에 필요한 다양한 사항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별삼방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의 의장물 제작과 관련된 제도, 예산, 운영 방식 등 여러 측면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CHINOIS > COREEN
한 권의 책에 두 스티커가 붙어 있네요.
03. 조선 왕실 의례
해당 섹션은 조선 왕실 의례 가례와 흉례 관련 의궤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비디오도 없이 오직 현장에서 손으로 종이에 기록한 내용이지만 세심함과 디데일에 놀라게 됩니다.
3-1. 경사스러운 왕실의 결혼 가례
| 경종의 세자 시절 혼례 기록한 의궤
1696년, 당시 세자이셨던 경종께서 세자빈(훗날 단의왕후로 추존되신 분)을 맞이하시는 혼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혼례를 담당하는 임시 관청인 가례도감은 3월에 설치되었으며, 세자빈의 최종 간택은 4월 8일에 이루어졌습니다. 세자빈께서는 간택 당일 별궁으로 들어가신 후 약 한 달 동안 혼례 절차를 진행하셨습니다. 5월 19일에는 왕세자께서 직접 별궁으로 가셔서 세자빈을 모셔 오는 친영이 거행되었습니다. 의궤에는 친영 때 왕세자께서 세자빈의 아버지께 기러기를 전달하고 절을 올리는 등 구체적인 동선과 행동이 명시된 의주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 효장세자의 혼례를 기록한 의궤
효장세자(1719-1728)는 영조가 연잉군延礽君이었던 1719년(숙종 44)에 태어난 첫아들이다. 영조가 국왕으로 즉위한 뒤, 8세의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후 1727년(영조 3) 세자빈을 맞이하는 가례를 올리게 되었는데, 이 의궤는 그때 혼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효장세자는 이듬해인 1728년(영조 4)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의궤에는 12면에 걸친 반차도가 수록되어 있는데, 세자빈이 별궁에서 궁궐로 들어갈 때의 행렬을 확인할 수 있다.
| 사도세자의 혼례 기록한 의궤
사도세자(1735-1762)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효장세자가 세상을 떠난 지 8년이 지나 태어난 왕위계승자였다. 태어난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0세가 되던 해인 1744년(영조 20)에 세자빈(훗날 혜경궁 홍씨)을 맞이하는 혼례를 올렸다. 이 의궤에도 세자빈을 궁궐로 모셔 오는 반차도가 수록되어 있다. 앞선 효장세자 혼례 당시 반차도의 행렬 구성과 동일하다. 바로 직전에 있었던 왕세자의 가례를 참고하여 의례를 치렀음을 알 수 있다.
의궤의 두께가...
한 장 한장 그리고 글쓰고... 정말로 대단하다는...
3.2. 장엄한 왕실의 장례. 흉례
사극에서 많이 보던 3년 국장에 대한 이야기도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전시 '왕의 서고' 전시회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아래 표시된 국장 기간만 27개월 7일...
| 효종의 장례를 기록한 의궤
이 문서는 효종 임금님의 장례 절차를 담당하신 임시 관청인 국장도감의 업무를 기록한 의궤입니다. 국장도감에서는 효종께서 승하하신 뒤, 어진(御身)을 영릉(寧陵)으로 옮겨 장례를 모시고, 다시 궁궐로 돌아와 신주(神主)를 봉안하는 모든 과정을 주관하셨습니다. 의궤의 마지막에는 국왕의 어진을 묘소로 모실 때의 행렬을 그린 발인반차도(發靷班次圖)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의궤의 기록에 따르면, 이 발인 행렬에는 총 6,000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습니다.
| 효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절차를 기록한 의궤
효종 임금님의 시신을 영릉(寧陵)에 안장하신 뒤, 임금님의 혼을 모신 신주(神主)는 궁궐 내 혼전(魂殿)에 모셔 두었다가, 돌아가신 지 27개월이 되는 때에 종묘로 옮겨 모시게 됩니다. 이 의식을 **부묘(祔廟)**라고 부르며, 선왕의 삼년상을 마무리하는 중요한 의례 절차입니다.
궁궐에서 종묘로 신주를 옮기실 때에도 정해진 절차와 행렬 구성이 엄격히 지켜졌으며, 이러한 내용은 의궤에 수록된 반차도(班次圖)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특히, 임금님의 행차 중 가장 규모가 큰 **대가의장(大駕儀仗)**의 규정에 따라 행렬과 의장이 마련된 점도 알 수 있습니다.
| 인선왕후의 능을 조성한 일을 기록한 의궤
이 문서는 인선왕후의 묘소를 조성하신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인선왕후의 능은 효종 임금님의 능인 영릉(寧陵) 권역 내에 함께 조성되었습니다. 효종 임금님의 봉분이 있는 언덕 아래쪽에 인선왕후의 봉분을 마련하였습니다.
의궤의 첫 부분에는 사수(四獸), 즉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그린 도설(그림)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능에 관을 모시기 전에 임시로 관을 넣어두는 구조물인 찬궁(攢宮) 내부에는 관을 수호하는 의미로 사수의 그림을 붙였습니다. 찬궁은 매장 절차가 끝나면 모두 불태우기 때문에, 그 실제 모습은 의궤에 남아 있는 도설을 통해서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전시 '왕의 서고' 전시회 마지막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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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디지털 서고
이 공간은 1866년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 군대가 가져갔다가 2011년에 반환된 외규장각 의궤를 전시하는 곳입니다. 외규장각은 정조(재위 1776-1800) 임금님의 명으로 강화도에 설치되었던 왕실의 중요 기록물을 보관하던 장소입니다. 의궤는 왕실의 중요한 행사를 세세하게 기록한 책을 의미합니다.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임금님께서 직접 보시던 ‘어람(御覽)’용 의궤이며, 세상에 단 한 부만 남아 있는 유일본 의궤 29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궤는 조선 왕조의 대표적인 기록유산이지만, 한자로 작성되어 있어 접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진열장 안에 전시된 의궤는 직접 넘겨보며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전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제한적입니다. 이에 따라, 전시실 내에 디지털 방식을 활용한 ‘디지털 책’을 마련하였습니다. 관람객 여러분께서는 실제로 책을 넘기듯이 디지털 책을 조작하며 의궤 속 다양한 내용을 직접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디지털 책 위에 있는 책장에서 미니북을 선택하여 올려두시면 해당 콘텐츠가 재생됩니다.
이번에 만나볼 수 있는 콘텐츠는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한 권으로 읽는 의궤: 의식의 궤범(軌範) 공문서, 도설, 반차도 등 의궤의 기록적 특징을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를 통해 살펴보실 수 있는 콘텐츠입니다.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비교 어람용(왕이 보는 책) 의궤와 분상용 의궤(기관 배포용) 사이의 다양한 차이점을 알아보실 수 있는 콘텐츠입니다. 효종이 읽어주는 발인반차도 효종이 본인의 장례행렬 그림을 직접 넘기며 내용을 들려주는 스토리북 형식의 콘텐츠입니다.
전시실은 마치 외규장각에 실제로 있는 듯 ‘왕의 서고’를 재현하였고, 외규장각 의궤의 아름다운 외형뿐만 아니라 정교한 기록을 통해 조선 왕실의 중요한 의례를 이해하실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또한 어려운 의궤 속 내용을 현대의 언어로 더욱 쉽게 접하실 수 있도록 ‘디지털 서고(書庫)’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외규장각 의궤실은 3개월마다 전시품을 교체하여 다양한 자료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도설(圖說) 아카이브도 함께 제공됩니다.
도설圖說은 행사에 실제로 사용한 물품의 형태를 알 수 있도록 의궤 속에 그려놓은 그림이다. 외규장각 의궤 속에는 약 3,800개의 도설이 있다. 이를 기반으로 관람객이 직접 흥미로운 테마를 선택하여 도설과 관련 내용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콘텐츠이다. 가로 4.8m의 디스플레이에서 60종의 테마가 보여지고, 눌러볼수록 더욱 많은 의궤 속 도설을 볼 수 있다.
오늘 소개한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전시 '왕의 서고' 전시회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방문하셨다면 꼭 방문하셔야 하는 특별전시관 중 하나로 추천 드립니다.
사유의 방으로 들어가는 길 벽면에는 멀티미디어 아트가 상영되고 있는데요. 저는 잘 이애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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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 장줄리앙 푸스, 2021
디지털 비디오, 3430 x 1200 픽셀, 5분, 흑백, 사운드
끝없는 물질의 순환과 우주의 확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고체, 액체, 기체의 각기 다른 상태로 존재하는 물질을 미세한 크기에서 거대한 크기로 변화시켜 보여주며 관람자로 하여금 사물의 너머를 보도록 연출하였습니다.
| 사유의 방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 소개합니다.
| 반가사유상 뜻, 결가부좌 結跏趺坐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가볍게 얹고 오른손을 살짝 뺨에 댄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이라는 명칭은 상 像의 자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반가 半跏’는 양쪽 발을 각각 다른 쪽 다리에 엇갈리게 얹어 앉는 ‘결가부좌 結跏趺坐’에서 한쪽 다리를 내려뜨린 자세입니다.
‘사유 思惟’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 상태를 나타냅니다. ‘반가의 자세로 한 손을 뺨에 살짝 대고 깊은 생각에 잠긴 불상’을 반가사유상이라고 합니다.
석가모니는 태자 시절부터 인간의 생로병사를 깊이 고뇌했고,
출가를 결심하는 인생의 갈림길에서도 깊은 생각을 거듭했습니다. 반가사유상은 이처럼 깊은 생각에 빠진 석가모니의 모습이면서, 깨달음을 잠시 미루고 있는 수행자와 보살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반가의 자세는 멈춤과 나아감을 거듭하며 깨달음에 이르는 움직임 가운데 있습니다. 한쪽 다리를 내려 가부좌를 풀려는 것인지, 다리를 올려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어갈 것인지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반가의 자세는 수행과 번민이 맞닿거나 엇갈리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살짝 다문 입가에 잔잔히 번진 ‘미소’는 깊은 생각 끝에 도달하는 영원한 깨달음의 찰나를 그려 보게 합니다. 이 찰나의 미소에 우리의 수많은 번민과 생각이 녹아들어 있다고 합니다.
가. 금동반가사유상 삼국시대 7세기 전반
높이 90.8cm, 무게 112.2kg,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덕수 3312
크기도 크기지만 무게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두 점의 반가사유상 중에서 저에게는 더 익숙한...
과거에는 국보 83로 명명 되었지만 국보에 순서는 없다는 취지에서 이제 연번은 없습니다.
7세기 전반에 제작된 전시실 우측 반가사유상은
단순하고 절제된 양식을 보여 줍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 세 개의 반원으로 이루어진 보관 寶冠의 형태와 두 줄의 원형 목걸이는 간결함을 더합니다. 반면, 무릎 아래의 옷 주름은 물결치듯 율동감 있게 표현되어 입체적으로 흘러내리며 역동성을 보여 줍니다. 양손의 손가락들에선 섬세함이 느껴지고, 힘주어 구부리고 있는 발가락에는 긴장감이 넘쳐흐르는 작품입니다.
저는 이곳 사유의방에 전시된 두 점의 반가사유상 중에서 조금 더 애착가는 작품이 바로 이 반가사유상입니다.
뒷태까지 너무나도 아름다워라~
이 반가사유상은 1912년 이왕가 李王家박물관이 일본인 고미술상 가지야마 요시히데 梶山 義英에게 2,600원이라는 큰돈을 주고 구입한 것으로 알려 있습니다. 당시 2,600원 이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구입할 수 있는 돈이라고 하네요.
두 점의 반가사유상에는
삼국시대의 최첨단 주조 기술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주조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수직과 수평의 철심으로 불상의 머리에서부터 대좌까지 뼈대를 세운 뒤에 점토를 덮어 형상을 만들고 밀랍을 입혀 반가사유상 형태를 조각한 다음, 다시 흙을 씌워 거푸집(외형)을 만듭니다.
거푸집에 뜨거운 열을 가하면 내부의 밀랍이 녹아 반가사유상 모양의 틈이 생기는데 여기에 청동물을 부어 굳힌 다음 거푸집을 벗기면 반가사유상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금속가공 기술이라 하네요
나. 금동반가사유상 삼국시대 6세기 후반,
높이 81.5cm, 무게 37.6kg,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본관 2789
이 반가사유상은 과거 국보 78호 였네요.
전시장 좌측에 위치한 반가사유상은 6세기 후반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날카로운 콧대와 또렷한 눈매, 그리고 화려한 장신구와 정제된 옷 주름 등이 특징으로 꼽히며, 양옆으로 휘날리는 어깨 위의 날개옷은 생동감을 주고, 옷 사이로 살짝 드러난 목걸이와 팔 장식은 화려함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부분이 두 점의 반가사유상의 극명한 차이가 아닐까요?
같은 해인 1912년에 조선총독부가 사업가이자 골동품 수집가인 후치가미 사다스케 淵上貞助에게 4,000원을 보상해 주며 구입했고, 191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입수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45년 국립박물관이 인수하였고, 이왕가박물관(덕수궁미술관) 소장품은 1969년 국립박물관에 통합되었습니다.
반가사유상을 보존하고 있던 사찰과 만든 곳을 짐작하게 해주는 단서들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으며, 옛 사람들의 말을 통해 전해질 뿐입니다. 보관 상태, 장신구, 옷 주름 등의 모양으로 살펴볼 때 7세기 전반에 제작된 반가사유상(전시실 오른쪽)은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만 하네요.
| 사유의 방 구성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방 전시장에 들어오시면 상당히 고급스럽고 안정적인 실내 분위기를 느끼셨을 것 같은데요. 이 공간은 건축가 최욱(원오원 아키텍스 대표)이 디자인하였다고 하네요.
건축가는 반가사유상의 에너지와 공간이 일체화된 느낌으로 전시를 경험할 수 있도록 관람객과의 거리를 고려하여 소극장 규모로 전시실을 설계하였습니다. 관람객은 어둠을 통과하는 진입로, 미세하게 기울어진 벽과 바닥, 반짝이는 천정 등 추상적이고 고요한 전시 공간에서 반가사유상을 집중적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 반가사유상 굿즈 아트샵
반가사유상 문화상품은 박물관 내 문화상품점과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온라인상품점(museumshop.or.kr)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 관람후기 마지막 포스팅입니다.
이번 전시회는 총 3개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 섹션인 조선 전기 불교미술을 다룬 '금金, 변치 않는 기도를 담다' 소개입니다.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섹션 + 마지막 특별섹션인 훈민정음 소개입니다.
섹션 3: 금金, 변치 않는 기도를 담다
조선의 건국되면서 유교의 시대가 시작된 뒤에도 불교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교는 공적 영역에서 경제적·사회적 위치가 제한되었지만, 이념과 명분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또한 변함없이 삶의 고통과 죽음의 슬픔을 위로하는 신앙으로 존재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왕실 가족과 사대부는 물론, 일반 백성까지 화려한 불교미술의 조성과 불교 행사에 끊임없이 열중했습니다. 빛나는 금빛 부처를 만드는 마음은 유교의 사회가 시작되어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는 않는 금처럼, 변치 않는 마음을 담은 조선 전기의 불교미술이 소개됩니다.
조선 전기 미술 전시회 대전 금金, 변치 않는 기도를 담다 섹션에서는 총 3개의 소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첫 주제는 바로..
01. 조선 부처, 유교의 시대를 가로지르다
조선 초에는 왕실 가족이 불교미술의 조성을 주도했습니다. 왕과 왕비, 대군과 종친들은 사찰을 짓고 불상과 불화를 만들었으며 경전을 간행했습니다. 왕실에서는 가장 뛰어난 장인을 고용하고 가장 좋은 재료를 들여 최고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세상을 떠난 가족을 추모하고 산 자를 위해 복을 비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조선의 불교미술은 최고의 정성과 간절한 바람을 담고 유교의 시대를 가로질러 갔습니다.
조선시대를 배우면 가장 먼저 듣는 단어중 하나가 '억불숭유' 정책인데요. 고려시대부터 계속된 불교문화가 한 번에 사라지기는 불가능 했겠죠. 조선시대에도 불교 예술은 계속됩니다.
조선 전기 미술 전시회 대전 : 불교미술에서는 불상과 불화, 서적등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심곡사 탑에서 발견된 부처와 불감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감과 금동불상군 深谷寺 七層石塔 出土 金銅佛龕·金銅佛像群
조선 전기 금동 익산 심곡사 보물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기단에서 발견된 부처와 불감입니다. 상자 모양의 불감 안에 7구의 부처와 보살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7구 중 크기가 큰 아미타부처와 관음보살, 지장보살의 삼존상은 원·명 티베트계 불교미술의 영향으로 날씬한 신체를 드러내고 화려한 장신구를 걸쳤습니다. 4구의 작은 상은 대좌가 없고 부처는 양 어깨를 가리는 옷을 입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이처럼 탑 안에 부처와 불감을 넣는 신앙이 유행했습니다
왕실 가족이 금산사 탑을 수리하고 모신 사리장엄
금산사 오층석탑 출토 사리장엄 金山寺 五層石塔 出土 舍利莊嚴
조선 1492년 봉안 금동 금산사 성보박물관
세조의 아들인 덕원군과 만 명이 넘는 신도들이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을 수리하고 넣은 부처와 보살, 사리함 등과 중창 기록입니다. 금산사는 1460년 세조의 시주로 중창이 시작되어 왕실의 지원을 받은 사찰이었습니다. 금산사 탑을 해체할 때에 향기가 나고 장륙상丈六像이 땀을 흘리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왕실 후원 불사에는 이러한 기적이 자주 기록되어 불사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석가탄생도 釋迦誕生圖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
조선 15세기 비단에 색, 금니 혼가쿠지
그림속에서 석가모니를 찾아 보세요. 이런 불화 너무나 좋다는... 불교신자도 아닌데 심신이 안정되는 느낌...
석가모니 부처의 일생을 그린 여러 폭의 그림 중 하나입니다. 석가모니가 카필라 왕국의 왕자로 태어날 때의 여러 이야기를 한 화면에 그렸습니다. 그림 중앙에는 석가모니 부처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는 모습을 그렸고, 시간적으로 전후에 해당하는 장면들을 배치했습니다. 이 그림에 나오는 장면은 조선 전기 왕실에서 지은 부처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에 실린 변상도와 매우 비슷하여, 왕실에서 만든 그림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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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미술 대전 불교미술 공간은 불교를 조금 알고 감상한다면 더 매력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석가출가도 釋迦出家圖
석가모니 부처의 출가
조선 15세기 비단에 색, 금니 쾰른동아시아미술관
석가모니 부처의 일생을 그린 여러 폭의 그림 중 출가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림 오른쪽에 그려진 큰 궁궐 건물 안에는 석가모니가 떠난 것을 알아차리고 슬퍼하는 태자비와 시녀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화면 위 왼쪽에는 집을 나서 스스로 머리를 깎는 석가모니의 모습을 그렸고, 화면 아래쪽에는 슬퍼하는 아버지 정반왕과 빈 말을 붙들고 우는 태자비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조선 전기 왕실에서 지은 부처의 일대기인 『석보상절』 등에 나오는 구절을 충실히 나타냈습니다.
영산회상도 靈山會上圖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 부처
조선 16세기 비단에 금니 호놀룰루아카데미미술관
갈색 비단 바탕에 금선으로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인도의 영취산에서 『묘법연화경』을 설법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강조되고 『묘법연화경』 신앙이 유행하면서 설법도가 많이 그려졌습니다. 그림 아래쪽에는 부처의 설법을 듣는 인물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설법을 들으며 꿇어앉은 보살이나 승려의 뒷모습은 조선 15세기의 경전 변상도에서부터 등장해 조선 후기까지 유행합니다.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조선초기 불상들이 소개됩니다. 첫 섹션에서는 금동 불상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금강산에서 발견된 관음보살
금동관음보살좌상 金銅觀音菩薩坐像
여말선초 금동 높이 18.6 본관11724 보물
이번 새나라새미술 전시회에서 가장 눈길을 끈 불상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아트샵에서도 모형을 구입할 수 있네요.
연꽃 모양의 대좌 위에 앉아 있는 관음보살입니다. 화불이 있는 보관을 쓰고 큰 귀걸이와 목걸이, 무릎까지 드리워진 장신구를 걸쳤습니다. 허리가 잘록하고 곧은 자세와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은 고려 말 원 티베트계 불교미술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이 보살은 금강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합니다. 금강산은 고려시대부터 불교 성지로 여겨졌고, 불상을 금강산의 암벽에 봉안하는 신앙이 조선 초까지 유행했습니다.
무량사 탑에서 발견된 부처와 보살
무량사 오층석탑 출토 금동삼존불좌상 無量寺 五層石塔 出土 金銅三尊佛坐像
조선 15세기 금동 불교중앙박물관 보물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향완 청곡사 청동은입사향완 靑谷寺 靑銅銀入絲香爐
인수대비가 만든 수종사 동종 수종사 동종 水鐘寺 銅鐘
왕실이 후원한 유점사에서 만든 종 유점사 동종 楡岾寺 銅鍾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만들어 수종사에 모신 종입니다. 인수대비는 아들이 왕이 되기 전, 수빈 한씨였던 시절에 남편인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궁궐을 나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종은 당시에 만든 것으로, 왕실 여성들이 궁궐을 나와 머물렀던 사찰인 정업원淨業院 주지와 함께 만들었습니다. 이 종은 어깨에 문양대를 세우고 연꽃 모양 당좌를 표현하는 등 고려 종 양식을 이어받았습니다.
사대부가 발원한 건칠 관음보살
기림사 건칠관음보살반가상 祇林寺 乾漆觀音菩薩半跏像
조선 1501년 건칠 경주 기림사 보물
기존에 보던 불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강한 느낌의 불상입니다.
한쪽 다리를 내리고 편안하게 앉은 관음보살입니다. 흙으로 만든 상 위에 삼베를 겹겹이 씌우고 옻을 발라 단단하게 만든 뒤 속을 비우는 건칠 기법으로 만들었습니다. 건칠상은 재료인 옻이 귀하고 제작이 까다로워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의 예가 여러 구 남아 있습니다. 이 상은 태내군수太內郡守를 지냈던 이원림李園林이 발원했습니다. 관직에 올랐던 인물이 발원하여 조성한 뛰어난 상으로 주목됩니다.
15세기의 뛰어난 조각 수준을 보여주는 부처
조계사 목조여래좌상 曹溪寺 木造如來坐像
조선 15세기 나무 서울 조계사 보물
조선 전기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부처이며, 15세기 조선에 새롭게 들어온 명 티베트계 불교미술 양식을 보여줍니다. 신체와 이목구비가 균형잡혔고, 자연스러운 옷주름이 뛰어난 조각 수준을 보여줍니다. 전라남도 영암 도갑사에 봉안되었다가 1938년 현재의 조계사로 옮겨져 봉안되었습니다. 도갑사는 15세기 후반 왕실의 후원을 받아 대대적인 중창을 한 일이 있는데, 이 불상은 그 때 왕실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무에 금칠을 해서인지 이곳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다른 금동불상과는 확연하게 다른 발색을 보여줍니다.
02. 부처의 말씀을 전할 것이니
조선에서 출판문화가 발전하면서 불교 교리를 담은 경전도 활발히 간행되었습니다. 15세기에는 왕실과 관청에서 불교 경전을 간행했습니다. 한문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새로 만든 문자인 한글로 경전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왕실에서 펴낸 경전은 전국으로 퍼져 나가 16세기 전국의 사찰에서 다시 간행되었습니다. 사찰에서는 기도와 학습, 불교 의식 등 사찰에 실제로 필요한 경전을 펴냈습니다.
금강경, 고려대장경, 부모은중경, 묘법연화경 등 이번 조선 전기 미술 전시회 대전 금金, 변치 않는 기도를 담다 섹션에서는 다양한 불교관련 책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만, 책하고는 친하지 않아서... 간략하게 소개를...
세종이 왕후의 명복을 빌며 한글로 지은 불교 노랫말
월인천강지곡 권상 月印千江之曲 卷上
세종世宗(재위 1418~1450) 어제구결 조선 1447년 종이에 금속활자 인쇄 한국학중앙연구원(미래엔 기탁) 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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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명복을 빌기 위해 한글로 지은 불교 노랫말입니다. 소헌왕후에게 부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쓰였습니다. 전체 노랫말이 모두 전해지지는 않지만 원래는 600곡 정도 실려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새로 만들어진 문자인 한글로 왕이 직접 지어 금속활자로 찍어냈습니다.
성달생이 글씨를 쓴 묘법연화경
묘법연화경 권5-7 妙法蓮華經 卷5-7
조선 1405년 종이에 목판 인쇄 신수15340 보물
조선 초의 무신 성달생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며 글씨를 써서 안심사에서 펴낸 『묘법연화경』입니다. 책의 앞머리에는 가로로 긴 변상도가 있는데, 고려시대의 그림을 다시 새겨서 찍어낸 것입니다. 안심사에서는 이 책 외에도 여러 번 『묘법연화경』을 간행했고, 전국의 사찰에서 다시 찍어내며 널리 퍼졌습니다.
03. 모두의 손에서 모두의 마음으로
불교는 16세기에 정책적으로 소외되었지만 지방 사찰은 신앙의 중심지로 세력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사찰에서 불교미술을 조성하거나 의식을 베풀 때에는 신분이 높고 낮은 수많은 사람이 참여했습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불교미술을 조성하게 되면서 값비싼 재료보다 나무, 흙과 같이 구하기 쉬운 재료가 선호되었습니다. 사찰마다 불교 의식을 자주 행하면서 의식에 필요한 불화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조선 전기 미술 전시회 대전 이번 작품들은 목조불상입니다.
수백년의 시간을 지났는데, 목조 작품이 이렇게 잘 보존되어 있다는 부분이 놀랍네요.
나무에 흙을 씌워 만든 관음보살과 지장보살
소조관음보살입상 塑造觀音菩薩立像 소조지장보살입상 塑造地藏菩薩立像
조선 전기 나무, 흙 덕수2209, 덕수1780
한 쌍으로 만들어진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입니다. 조각난 나무를 못으로 연결하여 상을 만들고 전체적으로 흙을 얇게 씌웠습니다. 얼굴과 턱, 온몸에 걸친 옷주름처럼 섬세한 표현이 필요한 곳에 흙을 덮어 조각한 후 삼베를 씌우고 옻칠을 더했습니다. 나무의 단단함과 흙의 섬세함을 모두 이용한 방법입니다. 보살은 얼굴이 장방형에 하반신이 긴 비율을 보입니다. 이는 가슴 앞에서 세 줄로 나뉜 장신구와 다리 앞에서 주름진 옷주름 표현과 함께 15세기 보살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원래 아미타부처를 중심으로 삼존상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무에 흙을 씌워 만든 관음보살
목조관음보살좌상 木彫觀音菩薩坐像
조선 전기 나무, 흙 국립경주박물관 접수411
한쪽 무릎을 세우고 편안하게 앉은 관음보살입니다. 이 윤왕좌輪王坐 자세는 고려시대 이후 수월관음보살의 전형적인 자세였으며, 조선 전기에도 여전히 이어졌습니다. 보살의 몸체는 여러 조각의 나무를 못으로 조립하고 바닥에 흘러내린 옷자락은 흙으로 섬세한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보관과 양팔 장식은 금속으로 만들고 색색의 보석을 박아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보살의 둥근 얼굴과 좁은 어깨, 편평한 가슴 등에서 조선 전기의 특징이 엿보입니다.
이번에는 무서운 불화들이 소개됩니다. 죄 짓지 않고 살아야 극락왕생 한다는...
감로를 베풀어 아귀를 구하는 그림
감로도 甘露圖
조선 16세기 삼베에 색 증7551
굶주린 영혼을 먹이고 위로하는 불교 의식에 걸었던 그림입니다. 굶주린 아귀가 그림 가운데 그려져 있으며,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족,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승려들, 의식 공간에 내려오는 부처와 보살이 그려졌습니다. 의식의 목적과 절차, 내용을 그림으로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 일반 신도들을 위한 의식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측하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조선 전기부터 많이 그려지기 시작해 조선의 독특한 의식용 그림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 부처 석가여래설법도 釋迦如來說法圖
지장보살과 10명의 왕 지장시왕도 地藏十王圖
에필로그 조선의 빛, 훈민정음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 마지막 공간입니다. 에필로그 공간으로 훈민정음이 소개되는데요.
해가 떠올라 세상을 비춥니다. 새 나라 조선의 문화도 해와 달처럼 빛났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유교적 이상을 바탕으로 옛 문물을 연구하여 새로운 문화와 미술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은 이전 시대와도, 주변 어느 나라와도 다른 조선만의 고유한 세계였습니다. 이 시대의 혁신과 창조성은 훈민정음을 만들어냈습니다. 듣는 대로 쓰고, 말하는 대로 적을 수 있는 전혀 새로운 문자였습니다. 자음과 모음이 어울려 하나의 소리를 이루고, 그 소리가 다시 세상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자기나 불상을 만드는 장인들도 쉽게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교적 이상을 좇던 사대부는 한편으로 이 문자를 만드는 주역이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훈민정음으로 번역되어 모두가 소리내어 읽게 되었습니다. 새 시대의 찬란함 속에서 만들어진 훈민정음은 오늘날에도 빛처럼 우리 삶 구석구석을 비춥니다. 빛이 어디에나 닿고, 누구에게나 스며드는 것처럼, 조선 전기와 우리도 500여 년의 시간을 건너 연결됩니다. 앞으로의 우리와도 여전히 그러할 것입니다.
해당공간에서는 영상으로 한글의 원리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번 조선 전기 미술 대전은 국내는 몰론 해외의 박물관과 사찰에서 보관중인 우리의 문화재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번 전시회가 끝나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작품들이 많이 있으니 꼭 시간내서 방문하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이번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 관람팁 및 예매, 도슨트, 아트샵 등 정보는 지난 포스팅 참고하세요.
오늘 전시회 후기는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층 306호에서 열리고 있는 '일본미술, 네 가지 시선' 전시회 관람후기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관람했던 전시회 중에서 일본 작가의 전시회 또는 일본 미술전시회를 접했던 경험이 몇 손가락에 뽑는 것 같네요. 이번 전시회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잘 모르는 일본 전통미술에 대한 이해가 되는 좋은 기회로 추천 합니다.
| 전시회 개요
일본미술, 네 가지 시선 日本美術のとびら四つのまなざし Japanese Art from Four Perspectives 전시기간 : 2025. 6. 17.~8. 10. 전시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06호
이번 일본미술, 네 가지 시선 전시회는 총 4개의 섹션에서 가을풀무늬 고소데 등 62점의 회화, 도자, 공예, 의상 등 다양한 일본 미술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 관람시간은 최소 1시간 30분 할애하셔야 합니다.
| 전시회를 시작하며
국립중앙박물관과 도쿄국립박물관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미술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망하는 특별전 《일본미술, 네 가지 시선》을 공동 개최합니다. 양 기관은 오랫동안 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긴밀히 교류해 왔으며, 그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 관람객에게 일본미술을 소개하는 뜻깊은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번 전시는 도쿄국립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이 엄선한 소장품 62건을 중심으로, 일본미술이 지닌 외적인 아름다움과 내면의 정서를 눈과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화려한 장식성(飾り), 이에 대비되는 절제된 미(反飾り), 자연의 섬세한 변화에 대한 감동(あはれ), 유쾌하고 재치 있는 미적 감각(遊び)이라는 네 가지 시선을 통해 일본미술을 조명합니다. 이 요소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며 일본인의 삶과 세계관을 반영합니다. 일본미술의 시각적 매력을 넘어서, 그 내면에 흐르는 사유와 감성을 오롯이 경험하는 기회를 선사할 것입니다. 네 가지 시선을 따라 일본미술을 좀 더 친숙하게 감상하고, 나아가 일본 문화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I. 꾸밈의 열정 Decorative Impulse
일본에서는 예부터 사물과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는 문화가 발전해 왔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92) 귀족들은 몸을 치장하고 공간을 호화롭게 장식하여 일상에 특별함을 더했다. 이러한 미의식은 여러 시대를 거치며 무사, 상인, 농민 등 다양한 계층으로 널리 퍼져 화려한 일본미술의 토대가 되었다.
조몬 시대(縄文時代, 기원전 11000년-400년)의 토기, 에도 시대(江戸時代, 1603-1868)의 채색 자기, 금을 가루로 장식한 칠기, 금박 위에 화려한 색을 입힌 병풍, 그리고 장식적인 서체로 쓴 서예 작품까지 다양한 미술품 속에 담긴 꾸밈의 정신과 그 미적 의미를 살펴본다.
장식 종이에 꽃핀 글씨
Letters Blooming on Decorated Paper
우아한 귀족 문화가 꽃핀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종이를 갖가지 색으로 물들이고 금과 은으로 그림을 그려 장식하는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이렇게 꾸민 종이에 글씨를 쓸 때는 굳이 빈 공간이 아닌 그림 위에도 겹쳐지도록 썼습니다. 즉 글씨는 단순히 문자의 기능을 넘어 종이 위에서 그림과 어우러져 하나의 아름다움을 자아냈습니다.
뜻보다 시각적 아름다움을 우선하여 글씨를 쓰는 서법도 등장합니다. ‘흩뜨려 쓰다’라는 뜻의 지라시가키(散らし書き)는 장식적 서법의 대표 사례입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쓰는 전통의 방식을 지키지 않고, 의미와 상관없이 줄을 바꾸며, 글자의 나열이 만드는 아름다움을 추구했습니다.
일본미술, 네 가지 시선 전시회 1부 꾸밈의 열정 Decorative Impulse 에서는 화려한 일본 미술의 정수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겐지모노가타리 중 제39첩 유기리 源氏物語 第三十九帖 夕霧
고노에 노부타다(近衛信尹, 1565~1614) 에도 시대(江戸時代) 17세기 도쿄국립박물관
와카 단간 和歌巻断簡
혼아미 고에쓰(本阿彌光悅, 1558~1637) 에도 시대(江戸時代) 1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이 작품의 바탕 종이는 금은니(金銀泥)를 사용한 판화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양귀비 꽃과 열매, 수선화 세 가지 도안을 반간야 적되, 높낮이에 변화를 주어 시각적 리듬을 형성했다. 고예쓰는 밑그림에 맞추어 글씨 각 행의 높이와 길이를 조절했으며, 시의 운율이나 의미에 상관없이 줄을 바꾸어 장식적인 서예를 완성했다. 글씨의 굵기, 농담, 높낮이 변화가 만드는 시각적 아름다움은 물론 글씨와 그림이 이루는 조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봉황공작도병풍 鳳凰孔雀図屏風
가노 히데노부(狩野秀信, 1639~1718) 에도 시대(江戸時代)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6폭으로 이어진 병풍 두 척이 한 쌍을 이루는 전형적인 일본 병풍이다. 오른쪽 병풍에는 냇가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는 봉황 한 쌍과 오동나무를, 왼쪽 병풍에는 벚나무 아래에서 노니는 세 마리 공작을 묘사했다. 화면의 여백에는 일정한 크기로 잘라낸 사각형 금박을 붙여 정교하게 장식했다. 오른쪽 병풍의 화면 오른쪽과 왼쪽 병풍의 화면 왼쪽 하단에 ‘히데노부 필(秀信筆)’이라는 묵서와 ‘가이의(外記의)’ 인장이 있어,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회화 제작을 전담하던 가노파(狩野派)의 화가가 주세기 히데노부(狩野常信, 1639~1718)의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학 거북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무늬 옷 모양 이불 夜着萌黄縮緬地松竹梅鶴亀模様
에도 시대(江戸時代) 19세기 도쿄국립박물관
옷처럼 보이는 에도 시대(江戸時代, 1603~1868)의 이불입니다. 원래는 붉은 비단 안감이 있었고, 겉감과 안감 사이에는 두툼한 솜이 들어 있었으나 현재는 해체되어 겉감만 남아 있습니다. 당시 잠자는 동안 마귀가 들 수 있다는 속설이 있었고, 이에 따라 이불에 봉황, 학, 거북, 여의보주, 소나무, 대나무, 매화 등 길상무늬를 자수나 화려한 염색 기법으로 대담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이 이불은 한 쌍을 나란히 놓으면 부리를 벌린 학과 다른 학이 서로 마주 보게 됩니다. 이러한 두 마리 학의 조합은 원만한 부부 사이를 상징합니다. 학은 천년을 사는 길조(吉鳥)로 여겨졌으며, 학무늬에는 부부가 오래도록 해로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이불 전체에는 거상(巨商)의 부유함을 상징하는 호화로운 자수를 놓았으며, 혼례 때 신방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일본의 채색 자기
조몬 시대(繩文時代) 후기(繩文後期 기원전 2000년~1000년)와 만기(繩文晩期 기원전 1000년~400년)의 토기는 정교하게 무늬를 새겨 마감한 것과 조리용으로 비교적 간소하게 제작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또한 깊은 바리 외에도 항아리 모양 토기[甕形土器], 뚜껑토기[蓋土器], 귀때토기[耳土器] 등이 등장한다. 토기의 종류에 따라 정확한 용도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시 사람들이 쓰임새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기와 만기의 토기는 줄기처럼 입체감 있는 장식은 줄어들고, 선을 그어 만든 기하학무늬가 많이 나타난다. 또한 토기 표면에 새끼줄로 무늬를 새긴 뒤 일부를 갈거나 깎아 지우는 스트레치 조몬(撚消縄文 기법)이 널리 유행했다. 이 기법은 기하학적인 선무늬와 함께 사용되는데, 선을 경계로 새끼줄무늬가 남은 부분과 사라진 부분이 대비를 이루어 기하학무늬의 장식 효과가 강조됩니다.
채색 꽃 새무늬 발 色絵花鳥文大深鉢
이마리 자기(伊萬里燒) 에도 시대(江戸時代) 17세기 도쿄국립박물관
채색 참외무늬 대접 色絵瓜平文鉢
이마리 자기(伊萬里燒) 에도 시대(江戸時代) 1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일본 중요문화재
채색 푸른 물결과 모란무늬 접시 色絵青海波牡丹文皿
나베시마 자기(鍋島燒) 에도 시대(江戸時代)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일본미술
| 꾸밈의 원류, 조몬 토기
조몬 시대(繩文時代) 후기(기원전 2000년~1000년)와 만기(기원전 1000년~400년)의 토기는 정교하게 무늬를 새겨 마감한 것과 조리용으로 비교적 간소하게 제작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또한 깊은 바리 외에도 항아리 모양 토기, 뚜껑토기, 귀때토기 등이 등장합니다. 토기의 종류에 따라 정확한 용도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시 사람들이 쓰임새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기와 만기의 토기는 줄기처럼 입체감 있는 장식은 줄어들고, 선을 그어 만든 기하학무늬가 많이 나타납니다. 또한 토기 표면에 새끼줄로 무늬를 새긴 뒤 일부를 갈거나 깎아 지우는 스트레치 조몬 기법이 널리 유행하였습니다. 이 기법은 기하학적인 선무늬와 함께 사용되는데, 선을 경계로 새끼줄무늬가 남은 부분과 사라진 부분이 대비를 이루어 기하학무늬의 장식 효과가 강조됩니다.
깊은 바리 深鉢形土器
도쿄도(東京都) 하무라시(羽村市) 하케타우에(羽ヶ田上) 출토 조몬 시대(繩文時代) 중기 도쿄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일본미술, 네 가지 시선' 전시회에서 만나본 일본의 도자들...
바로 옆동네 이지만 우리나 중국과도 확연하게 다르네요.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회 '일본미술, 네 가지 시선' 1부가 열리고 있는 전시장 공간
마키에 벚꽃무늬 향 놀이 도구 상자 桜蒔絵十種香箱
에도 시대(江戸時代) 19세기 도쿄국립박물관
여러 향을 맡고 구별해 내는 구미코(組香) 놀이에 사용하는 도구를 담는 상자이다. 구미코 놀이는 기본적으로 ‘열 가지 향’이라는 뜻의 짓큐코(十種香)라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먼저 세 종류의 향을 맡은 뒤 그 세 종류의 향을 각각 세 개의 향포에 넣어 아홉 포를 만들고, 시향하지 않은 새로운 향을 한 포에 넣어, 총 네 종류의 향이 든 향포 열 개를 준비한다. 이 향포 열 개의 향을 맡고 네 가지 향 중 어떤 향인지 알아맞히는 놀이다. 구미코 놀이는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92~1573)에 체계화되었고, 에도 시대(江戶時代, 1603~1868)에 이르러 널리 유행해 향의 도구 전문가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짓큐코 상자는 다이묘(大名) 혼슈를 모은 채택됨에 일정한 규격을 갖추고 상자를 다채로운 장식으로 화려하게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짓큐코에 사용한 도구를 담는 상자이다. 겉 상자를 비롯한 각종 도구 표면은 전체적으로 검은 칠을 하고, 금은 가루와 붉은 가루를 활용한 마키에(蒔繪) 기법으로 벚꽃무늬를 정교하게 장식했다. 또한 뚜껑 안쪽에는 은을 소량한, 흑칠하여 장식의 변화를 주었다. 다양한 꽃무늬와 풍부한 색채가 어우러져 우아하고 화려한 장식을 이루고 있다. 내용물은 향을 담는 도구(향로, 향봉 등을 담는 3단 상자, 제출할 때 담는 통)와 향을 맡을 때 제출할 때 사용하는 도구(향포, 향봉 등을 표시한 패, 제출할 패를 담는 종이 주머니와 통 등)로 구성되어 있다. 후쿠시마 오사무(福島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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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에 모란넝쿨 접시꽃무늬 오하구로 도구 牡丹唐草葵紋散蒔絵お歯黒道具
에도 시대(江戸時代)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상류층 무사 가문에서 딸을 시집보낼 때 마련하던 칠기 혼수품 가운데 하나로,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데 사용한 도구입니다. 에도 시대(江戶時代, 1603~1868)의 여성은 성인이 되거나 결혼이 결정되면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오하구로(お歯黒) 화장을 했습니다. 검은색은 다른 색에 물들지 않아 정절의 증표로 여겨졌으며, 충치 예방에도 효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치아를 물들이기 전에는 먼저 뚜껑에 망을 댄 작은 상자에 담긴 양치 도구로 이를 깨끗이 닦고, 뚜껑이 있는 우묵한 그릇을 사용해 입을 헹궜습니다. 본격적으로 이를 물들일 때는 양옆에 귀가 달린 대야 위에 와타시가네(渡金)라는 긴 금속판을 걸쳐두었습니다. 그 위에 치아를 물들이는 염료와 용액이 담긴 금속제 주전자·그릇을 올리고, 새 깃털로 만든 붓으로 치아를 염색했습니다. 귀 달린 대야 안에는 끓인 물을 넣어 염색을 마친 뒤 입을 헹궜습니다..
한편, 이 시기 상류층 무가(武家) 사회에서 혼례 의식과 혼수품은 가문의 위세와 품격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이 도구 역시 검은 칠 바탕에 금은 가루를 뿌려 장식하는 마키에 기법으로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금은 가루를 배경에 흩뿌린 뒤, 그 위에 모란넝쿨무늬와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葵紋), 그리고 접시꽃무늬를 군데군데 배치해 한층 더 화려함을 살렸습니다. 이처럼 꾸밈은 때때로 권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II. 절제의 추구 Pursuit of Restraint
장식과 더불어 일본미술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화려함을 덜어내는 절제의 미의식입니다. 장식을 최소화하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며, 불완전함 속에서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하였습니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92~1573)부터 사찰 공방에서 제작된 붉은 칠기는 금을 장식 대신 실용성과 견고함을 강조하였으며, 에도 시대(江戸時代, 1603~1868)에는 사치 금지령의 영향으로 단정하고 간결한 옷차림을 세련된 멋으로 여겼습니다. 절제미는 자연스러운 흠과 거친 질감을 그대로 살린 투박한 찻잔에 잘 드러납니다
다도 도구의 아름다움
Beauty of Tea Ceremony Utensils
16세기 무렵 일본에서는 공간과 도구를 갖추고 차를 대접하는 ‘차노유(茶の湯)’가 성행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조선이나 일본 각지에서 만든 꾸밈없는 도기가 다도 도구로 새롭게 조명받았습니다. 완벽한 형태를 고수하지 않고, 굽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흠이 생기더라도 애써 고치지 않고 개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표면과 찌그러지고 금이 간 모양을 마치 ‘차갑고 마른(冷え枯れる)’ 겨울처럼 담담하면서 깊은 멋을 풍기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전시에 선보이는 다도 도구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사용감까지 고려해 만든 것으로 여기에는 도구 하나하나를 아끼고 사랑한 다도인의 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베개 모양 꽃병 旅枕花入
비젠 도기(備前燒) 에도 시대(江戸時代) 17세기 도쿄국립박물관
‘라이도진’이라 불린 대추 모양 차통 黒漆大棗 銘 来道人
에도 시대(江戸時代) 17세기 도쿄국립박물관
붉은 띠무늬 그릇 緋襷向付
비젠 도기(備前燒)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安土桃山時代)~에도 시대(江戸時代) 16~17세기 도쿄국립박물관
모래톱 모양 손잡이 그릇 織部洲浜形手鉢
미노 도기(美濃燒) 에도 시대(江戸時代) 17세기 도쿄국립박물관
한 줄로 쓴 ‘적덕후자수박’ 一行書 積徳厚自受薄
료칸(良寬, 1758~1831) 에도 시대(江戸時代) 19세기 도쿄국립박물관
붉은 칠 굽다리 접시 朱漆高杯 / 붉은 칠 대접 朱漆鉢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安土桃山時代) 1597년 국립중앙박물관
붉은 칠 술병 朱漆瓶子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5~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사치 금지령 속에 탄생한 또 다른 멋
에도 시대에는 오랫동안 평화가 이어지면서 도시 상공업자들의 경제력이 눈에 띄게 성장하였습니다. 이들은 귀족이나 무사처럼 각종 여가와 장식 문화를 누리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막부는 신분 질서를 유지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고자 사치 금지령을 여러 차례 내렸습니다.
이 무렵부터 도시 사람들 사이에 잔무늬, 줄무늬 옷이나 회색·갈색·남색처럼 수수한 색으로 물들인 옷이 유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통제하던 시대에, 사람들은 꾸미지 않은 듯한 간결함에서 또 다른 세련된 멋을 찾았던 것입니다.
리칸 줄무늬 고소데 小袖紺木綿地璃寛縞模様
에도 시대(江戸時代) 19세기 도쿄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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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벚꽃무늬 고소데 小袖鼠平絹地小桜模様
에도 시대(江戸時代) 17세기 도쿄국립박물관
III. 찰나의 감동 Beauty of Ephemerality
일본미술을 바라보는 세 번째 시선은 미술에 깃든 마음에 닿습니다. 일본 문화에는 벚꽃이 피고 지고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듯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을 바라보며 아쉬워하면서도 그 순간의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애잔한 정서를 의미하는 ‘아와레(あはれ)’가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와레의 정서는 일본 고유의 시가인 와카(和歌)나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92)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와 같은 고전 문학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미술에도 다양하게 표현되었는데, 잠시 꽃을 피우는 가을풀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아와레의 정서를 시각적으로 전하는 소재로 사랑받았습니다. 전시에서는 가을풀이 묘사된 그림, 복식, 공예 등 미술품과 함께, 아와레를 표현한 문학 작품과 공연을 소개합니다.
일본미술, 네 가지 시선 전시회 섹션 3 공간은 좌우에 대형 병풍이 전시되어 있고, 정면에 옷 한벌이 보입니다.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매력적인 공간이라고 생각되는 곳
무사시노도병풍 武蔵野図屏風
작가 모름 에도 시대(江戸時代) 17세기 도쿄국립박물관
무사시노(武蔵野)는 지금의 도쿄도(東京都)와 사이타마현(埼玉縣) 일대를 가리키는 옛 지명으로, 와카(和歌)에 자주 등장하는 일본 동부의 대표적 명소이다. 달 아래 억새 등 가을풀이 무성한 너른 들판은 가을의 정취를 담은 와카의 주요 소재였다. 이 그림에서는 지평선 가까이에 떠오른 달과 웅장한 후지산의 산줄기가 대비를 이룬다. 달은 억새와 도라지 같은 가을풀에 가려져 있다.
이는 “달이 숨어들 봉우리조차 없구나(月の入るべき嶺もなし,)”라는 와카 구절을 연상케 한다. 화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억새와 멀리 펼쳐진 산 사이에는 금빛 구름과 안개가 가로로 길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표현은 화면에 깊이감을 부여하는 일본 회화의 전통적 기법이다. 가까이서 보면 역시 일본인 특유의 성격이 작품에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간 중앙에 있는 체험공간 원하는 소리의 종이를 중앙에 올려놓은면 내용에 맞는 문구와음삭, 배경이 출력되는데, 잘 모르겠다.
추초도병풍 秋草図屏風
와타나베 기요시(渡邊淸, 1776~1861) 에도 시대(江戸時代)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각 병풍에는 흰 점 위에 노란색을 덧칠하여 입체적으로 표현한 마타리꽃과 푸른빛 도라지꽃이 풍성하게 피어 있습니다. 마타리와 도라지는 ‘가을의 일곱 가지 풀’에 속하며, 이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 『만요슈(萬葉集)』에 수록된 “싸리꽃, 억새꽃, 칡꽃, 패랭이꽃, 마타리꽃, 등골나물, 도라지꽃[萩の花 尾花 葛花 なでしこの花 女郎花 藤袴 朝がほの花]”이라는 시 구절에서 유래했습니다. 가을에 잠시 피었다 지는 풀꽃은 지나감을 향한 아쉬움과 애틋함을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을풀은 일본에서 그림의 소재로 널리 사랑받았습니다.
마타리꽃에 대한 표현, 사진에서는 잘 못 느끼겠지만 노란 금박 배경위에 금보다 더 노란 꽃들의 표현이 상당히 흡입력을 가진다.
앞의 병풍이 여백은 무시하고 병풍 전체를 빽빽하게 채웠다면 이번 작품은 여백의 미와 화려하면서 안정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마키에 담쟁이 울타리무늬 벼루 상자 柴垣蔦蒔絵硯箱
고마 규이(古滿休意, 생몰년 미상) 에도 시대(江戸時代) 17세기 도쿄국립박물관 일본 중요문화재
이 작품은 뚜껑이 달린 벼루 상자입니다. 뚜껑은 윗면이 볼록하게 솟아 있으며, 네 귀퉁이와 옆면이 모두 곡선으로 이루어져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둥근 느낌을 줍니다. 벼루와 연적을 놓는 판에는 비 내리는 강가와 갈대를 묘사하여, 뚜껑과 본체의 장면을 자연스럽게 연결하였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마키에 기법을 활용해 대상의 움직임과 정서를 회화적으로 담아낸 표현은 이전 시대의 벼루 상자에서는 보기 어렵습니다. 이 벼루 상자는 1636년부터 에도 막부의 전속 마키에 장인으로 활동한 고마 규이(古満休意, 생몰년 미상)가 제작한 것으로, 뚜껑 안쪽에 그의 아들 고마 규하쿠(古満休伯, ?~1715)가 남긴 명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을풀무늬 고소데 小袖白綾地秋草模様
(그림)오가타 고린(尾形光琳, 1658~1716) 에도 시대(江戸時代) 18세기 도쿄국립박물관 일본 중요문화재
에도 시대(江戸時代, 1603-1868) 전기부터 중기까지 활약한 화가 오가타 고린(尾形光琳, 1658-1716)께서 직접 무늬를 그린 것으로 알려진 고소데(小袖)입니다. 이 옷과 함께 전해 오는 두루마리 그림을 통해 오가타 고린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토에서 화가로 명성을 쌓으신 고린은 1704년에 더 큰 성공을 꿈꾸며 에도(현재의 도쿄)로 향하셨습니다. 당시 처음 머무르신 곳은 후카가와(深川)의 목재상인 후유키(冬木) 가문의 저택이었는데요, 그 시절 유복한 상인층 여성들 사이에서는 유명 화가가 직접 무늬를 그린 고소데가 큰 유행이었습니다. 고린의 작품으로 알려진 고소데는 몇 점 전해지지만,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이 작품이 유일합니다.
비록 고린의 낙관은 남아 있지 않지만, 사카이 호이츠(酒井抱一, 1761-1829)의 제자 이케다 고손(池田孤村,1801-1866)이 편찬한 『고린 신찬백도(光琳新撰百図)』에 이 고소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에도 시대 후기에도 이 고소데가 고린의 작품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린께서 신세를 진 후유키 가문의 안주인을 위해 그리셨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이 고소데에는 고린이 당시 자주 그리셨던 ‘가을풀’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쪽빛 농담이 돋보이는 도라지꽃을 중심으로 억새, 국화, 싸리 등 가을풀이 무성하게 어우러져 가을의 넓은 들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허리 부분에 여백을 남겨 둔 점에서는 교토의 포목점 가리카니야(雁金屋)의 아들이었던 고린의 섬세한 배려가 엿보입니다
같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서로 다른 극, 노(能)와 교겐(狂言)
Same Stage, Different Dramas: Noh and Kyogen
노(能)는 일본을 대표하는 무대 예술로, 가면을 쓴 배우가 노래와 춤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가무극입니다. 노에서는 비극적 서사를 다룬 작품이 많습니다. 오늘날까지 상연되는 작품의 절반가량은 슬픈 사연을 지닌 혼령이 세상에 미련을 품은 채 등장해 살아 있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조입니다. 이 밖에도 비극적 상황에 처한 인간의 슬픔과 고뇌가 노의 주요 소재입니다. 그러나 노에서는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배우는 절제된 대사와 몸짓으로 슬픔을 담담히 표현하고, 관객께서는 절제된 연기와 가면 속에 드러나지 않는 표정을 보시며 슬픔을 느끼고 깊은 여운과 정취를 경험하시게 됩니다.
비극적인 노의 막간에는 희극인 교겐(狂言)을 상연하였습니다. 노의 체계를 확립한 제아미(世阿弥, 1363년경~1444년경)께서는 노 공연 세 편과 교겐 공연 두 편을 번갈아 올린다고 기록하셨습니다. 대사 중심으로 진행되는 교겐은 일상적인 유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다루며, 교겐 가면은 개성 있는 생김새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배역의 성격을 단번에 드러냅니다. 배우는 과장된 몸짓과 대사로 관객 여러분께 웃음을 전해 드렸습니다. 이처럼 엄숙한 노의 막간에 등장한 교겐은 일본 미술 속에서 슬픔과 유쾌함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민들레 눈꽃무늬 누이하쿠 교겐 의상 縫箔白地花菱亀甲蒲公英雪輪草花模様
에도 시대(江戸時代) 18세기 도쿄국립박물관
이 교겐(狂言) 의상에는 내리는 눈송이를 도안화한 둥근 눈꽃 모양 틀 안에 사시사철의 꽃과 풀을 수놓았습니다. 대나무와 어린 소나무, 조릿대는 새봄을, 등꽃은 초여름을 상징합니다. 마타리, 패랭이꽃, 싸리, 버드나무와 국화, 도라지와 나비는 일본인이 특히 사랑하는 가을풀 무늬입니다.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는 화려한 단풍을 비단에 빗대어 표현한 무늬도 있습니다. ‘흐르는 물과 단풍’은 전통적인 조합으로, 와카(和歌)에 자주 등장하는 명소 다쓰타강[龍田川]을 상징합니다.
노 가면 ‘샤쿠미’ 能面 曲見
에도 시대(江戸時代) 19세기 도쿄국립박물관 일본 중요문화재
노 가면 ‘한나'
에도 시대(江戸時代) 17~18세기
불룩한 이마와 앞으로 돌출된 턱, 중앙이 움푹 들어간 얼굴 형태의 ‘샤쿠미(曲見)’ 가면입니다. 중년 여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일본의 전통 가무극 노(能) 공연에서 자식을 잃고 실의에 빠진 어머니 역할에 자주 사용됩니다.
교겐 가면 ‘오토’ 狂言面 乙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6세기 도쿄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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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 있고 사랑스러운 인상의 가면입니다. 통통한 볼에 살짝 위로 들린 낮은 코, 단정한 머리, 작은 입술, 초승달 같은 눈매, 혀가 살짝 보이게 웃는 표정이 귀여운 느낌을 줍니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의 전통 희극 ‘교겐(狂言)’의 작품 <마쿠라노노구루이(枕物狂)>에 등장하는 ‘오토고제(乙御前)’ 역할에 어울리는 가면입니다.
IV. 삶의 유희 Aesthetics of Playfulness
사뭇 진지한 노(能)의 막간에 상연되는 교겐(狂言)이 웃음을 선사하듯이, 일본 미술에는 ‘아와레(あはれ)’의 마음과 함께 ‘아소비(遊び)’의 마음이 공존합니다. 이번 설명의 마지막 시선은 일본 미술에 드러난 아소비의 마음입니다. ‘놀이’를 뜻하는 아소비는 미술에서는 현실을 유쾌하게 바라보고 형식을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하며 표현하는 태도로 확장됩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 1603-1868)의 우키요에는 놀이와 여가를 즐기던 사람들의 일상이 생생하게 담겨 있으며, 동물이나 인물을 묘사한 작은 도자기에는 해학과 재치가 깃들어 있습니다. 또한 전통 수묵화의 틀에서 벗어나 먹의 번짐과 즉흥성을 활용해 자유로운 회화 세계를 펼친 이토 자쿠추(伊藤若冲, 1716-1800) 선생의 작품에서는 그림 그리는 행위를 놀이처럼 여긴 화가의 인식을 엿보실 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과 일본미술, 네 가지 시선 전시회 마지막 공간...
수묵유도권 水墨游図巻
이토 자쿠추(伊藤若冲, 1716~1800) 에도 시대(江戸時代)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에도 시대(江戸時代, 1603-1868) 후기에 ‘이색 화가’로 이름을 떨치셨던 이토 자쿠추(伊藤若冲, 17161800) 선생의 수묵 화조화입니다. 매화, 작약, 국화 등 계절을 대표하는 꽃과 뻐꾸기·닭·원앙 같은 새를 묘사한 다섯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화면은 제목·그림·제발문(題跋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제목 ‘수묵유(水墨遊)’와 인장 ‘정선지인(淨善之印)’은 황벽종(黃檗宗) 선승 무센 조센(無染淨善, 1693-1764) 스님의 글씨를 판화로 찍은 것입니다.
제발문은 자쿠추 선생과 교유가 깊었던 선승 다이텐 겐조(大典賢常, 17191801) 스님의 글로, 판화첩 『현포요화(玄圃瑤華)』에 실린 글과 동일합니다. 제목과 제발문이 언제 추가되었는지는 확언할 수 없으나, 이 작품에 사용된 흑백 반전의 ‘다구한가(拓版畫)’ 기법 자체가 ‘먹의 유희’라는 주제를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수묵화에 비해서는 한 참 떨어진다는 생각 깊은 먹의 놀림이 없다는 생각
진짜진짜 마지막 전시공간
채색 오후쿠 향합 色絵於福香合
닌나미 도하치(仁阿彌道八, 1783~1855) 에도 시대(江戸時代) 19세기 도쿄국립박물관
향합은 향을 담기 위한 뚜껑이 달린 그릇입니다. 다도에는 화로에 숯을 넣는 ‘스미테마에(炭手前)’라는 절차가 있으며, 이때 화로에 향도 함께 넣어 실내에 향이 퍼지게 하였습니다. 다도에서 사용하는 향합의 재질은 계절에 따라 달라집니다.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풍로를 사용하는 시기에는 칠기 향합을, 늦가을부터 봄까지 바닥에 고정된 화로를 사용하는 시기에는 도자기 향합을 사용합니다. 도자기 향합은 산지·형태·무늬가 매우 다양하여 차 모임의 취지나 주최자의 취향에 맞추어 선택하였습니다.
이 향합은 ‘오타후쿠’라고도 불리는 정감 있는 여성의 모습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한자로는 ‘많을 다(多)’와 ‘복 복(福)’을 써서 ‘오타후쿠(御多福)’라고 표기하며, 행운을 불러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향합을 만든 닛나미 도하치(仁阿彌道八, 1783-1855) 선생은 에도 시대(江戸時代, 1603-1868) 후기부터 말기까지 교토에서 활약한 도공이셨습니다. 찻잔을 비롯하여 다양한 다기를 제작하셨고, 특히 상형 도자기를 훌륭히 만들어 세부를 섬세하게 묘사한 독특한 작품도 많이 남기셨습니다.
도슈사이 샤라쿠(東洲斎寫楽, 생년 미상)는
1794년부터 1795년 초까지 약 열 달간 판화 140여 점을 제작한 뒤 자취를 감춘, 수수께끼의 화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794년 5월 에도(현재의 도쿄) 내 세 극장에서 열린 가부키(歌舞伎)에 출연한 배우들을 묘사한 판화 28점 연작은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됩니다.
생선 장수 ‘고로베’를 연기한 4대 마쓰모토 고시로 四代目松本幸四郎の肴屋五郎兵衛 (우)
도슈사이 샤라쿠(東洲齋寫樂, 생몰년 미상) 에도 시대(江戸時代) 1794년 국립중앙박물관
‘오시즈’를 연기한 3대 세가와 기쿠노조 三代目瀬川菊之丞の田辺文蔵女房おしづ
도슈사이 샤라쿠(東洲齋寫樂, 생몰년 미상) 에도 시대(江戸時代) 1794년 국립중앙박물관
이 우키요에 작품은 미야코자(都座) 극장에서 상연된 가부키 〈하나야아메 본료쿠소가(花着清文蔵倶我)〉에서 ‘오시즈(おしず)’ 역을 맡은 3대 세카와 기쿠노조(三代目瀬川菊之丞, 1751-1810)를 그린 것입니다.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관자놀이 부근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모습으로 보아, 병을 앓던 오시즈가 막 일어난 상황임을 짐작하실 수 있습니다. 이 가부키는 형제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복수극으로, 오시즈는 형제의 복수를 돕는 다나베 본조(田邉文蔵)의 아내로 등장합니다. 결의에 찬 채 일어선 오시즈의 모습에서는 복수를 돕다 곤궁에 처한 부부의 절박한 상황이 드러납니다. 화면 왼쪽에는 도슈사이 샤라쿠의 이름과 함께, 그와 협업하여 판화 연작을 출판한 쓰타야 주자부로(蔦屋重三郎, 17501797)의 인장과 막부 검열을 통과했음을 증명하는 기아메(極印)가 찍혀 있습니다.
활기 연작 중 료고쿠 にぎわいぞろい·両国のにぎわい
우타가와 구니요시(歌川國芳, 1797~1861) 에도 시대(江戸時代) 19세기 도쿄국립박물관
이 작품은 구니요시의 《활기》 연작 가운데 하나로, 우키요에와 부채를 취급하던 도매상 이세야 소에몬(伊勢屋惣右衛門, 생몰년 미상)이 출판을 담당했습니다. 요정 2층에서 젊은 여인이 스미다강[隅田川]의 료고쿠(両国) 다리를 내려다보며 활기찬 풍경을 감상하고 있습니다. 료고쿠는 에도 최고의 번화가였으며, 여름이면 불꽃놀이를 보려는 인파로 붐볐습니다. 이 그림에서도 강에는 지붕 달린 유람선과 쪽배가 떠다니고, 다리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인의 시선 끝에는 이제 막 솟아오르려는 불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내유락도병풍 邸内遊楽図屏風
작가 모름 에도 시대(江戸時代) 17세기 전반 국립중앙박물관
건물 실내에서 다양한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묘사한 풍속화입니다.
이 작품은 6곡 병풍 두 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물의 마당과 실내에서 여러 놀이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하나의 큰 화면으로 이어 담았습니다. 오른쪽 병풍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 주인을 기다리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가마꾼과 하인들, 그리고 마당에서 북과 소고 연주에 맞추어 흥겹게 춤추는 이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왼쪽 병풍에는 증기 목욕탕에서 목욕하는 사람들과 샤미센(三味線, 일본의 대표적인 현악기) 연주에 맞추어 신나게 춤을 추는 사람들, 그리고 2층 누각에서 장기를 두고 편지를 쓰며 카드놀이와 차 마시기 등 여흥을 즐기는 이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유흥거리를 묘사한 ‘유락도(遊樂圖)’는 무사들의 패권 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센고쿠 시대(戰國時代)가 끝나고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사회가 안정된 16세기 말부터 17세기에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를 즐기려던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잘 반영된 작품입니다.
당자유도병풍 唐子遊図屏風
나가사와 로세쓰(長澤蘆雪, 1754~1799) 에도 시대(江戸時代)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동자들이 물가에서 꼬리잡기 놀이를 하며 노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일본에서는 중국풍으로 머리를 묶거나 옷을 입은 아이들을 ‘가라코(唐子)’라고 부릅니다. 가라코는 다산(多產)과 다복(多福)을 상징하는 길상적인 소재로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습니다. 이 병풍은 네 폭이 하나의 화면을 이루고 있으며, 양 끝과 중앙에 달린 손잡이를 통해 원래 종이를 바른 장지문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 속 아이들은 일본 전통 놀이인 ‘고토로코토로(ことろことろ)’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이 놀이는 맨 앞 아이가 술래의 공격을 막아 뒤쪽 아이가 잡히지 않도록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에서 생동감과 흥겨움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림에는 동자가 모두 마흔여 명 있습니다.
이번 '일본미술, 네 가지 시선 특별전은' 8월 10일 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06호 에서 전시될 예정입니다.
해당 기관 특별전시실1 에서는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매술 대전이 열리고 있으니 한일 양국의 비슷한 시기 작품들을 비교하면서 감상하실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전시회 관람후기 입니다.
아마도 올해 한국미술 전시회로는 가장 큰 규모의 핫 한 전시회가 될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금주까지는 무료관람이 진행되지만 다음주 부터는 유료전시회로 전환됩니다.
오늘은 새 나라 새 미술 전시회 관람팁 (예약, 할인, 도슨트, 오디오가이드, 포토존, 아트샵, 관람시간, 주차장 정보) 공유합니다.
| 전시회 정보
이번 조선 전기 미술 대전 특별전은 8월 31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1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조선 전기 15-16세기의 도자, 회화, 불교미술 690여건의 작품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대규모 특별전으로 여름방학 아이들과 함께 관람하는 것도 추천 드립니다.
| 입장료, 사전예약 추천
이번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입장료는 개인기준으로 성인은 8,000원, 청소년 (13~24세)은 6,000원, 어린이는 4,000원입니다. 미취학 아동이나 65세 이상은 무료관람 또는 할인이 가능합니다.
다만, 워낙 핫 한 전시회로 30분 단위로 입장이 가능한 현장 발권은 오픈런 아니면 티켓팅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예매는 네이버와 티켓링크를 통해 사전 예약이 가능합니다.
참고로 6월 15알 까지는 개관 기념 무료입장이 가능해서 저는 무료관람하고 왔네요.
| 사진촬영 및 포토존
이번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전시회는 한 점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실내촬영이 가능합니다. (삼각대나 플래시 사용금지)
또한,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장 입구와 실내에 몇 몇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이번 전시회는 자율 입장이 아닌 오전 10시 부터 30분 단위로 예약 및 티켓팅이 가능합니다. 해당 시간이 지나면 입장이 어려울 수 있으니 시간 엄수해 주시고요. 실내에 충분한 실내공간과 아트샵 등이 있어 기다리기에 지루하지 않습니다.
| 오디오 가이드와 도슨트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도슨트는 없습니다.
별도 오디오 가이드 (음성안내기)가 티켓팅 전에 대여가 가능합니다. 저는 저의 스마트폰 앱을 이용한 오디오가이드를 선호하는데요.
아래와 같이 이번에는 가이드온 앱에서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오디오가이드를 서비스한다고 되어 있지만, 입장후 앱 확인하니, 현장 오디오가이드 기기만 가능하다고 안내가 나와있네요. (대략 난감)
앱 없어요. 현장 기기 꼭 대여하세요
| 총 5개 섹션, 관람 시간은 150분 이상 고려
이번 새 나라 새 미술 전시회는 입구의 프롤로그와 마지막 훈민정음 특별공간과 함께 크게 3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섹션별로 작품에 맞게 상당히 고급스러운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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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도 넓고, 작품수도 많고 국내의 여러 박물관과 사찰은 물론 해외 미술관이 보유한 작품까지 있다보니 이번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관람에 최소 2시간 이상 필요합니다. (대충 봐도)
조금 시간을 가지고 작품을 감상한다면 반나절도 부족한 시간의 전시입니다. 시간안분 잘 하세요.
01. 프롤로그 : 조선의 새벽 새로운 나라로
한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시작됩니다. 어떤 역사의 새벽녘을 들여다봅니다. 고려 말 1391년, 이성계와 그 측근들은 사리장엄을 조성하여 금강산 월출봉의 석함 안에 봉안했습니다. 고려 말 부처에게 기원하는 영험한 장소였던 금강산에 납입한 사리장엄에는 미륵의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혼란한 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을 구원하는 존재인 미륵에게, 저무는 시대를 뒤로하고 새로운 나라를 열고자 한 이성계의 굳은 다짐을 투영했습니다. 사리장엄을 구성하는 금동 사리함에 보이는 티베트계 불교미술의 영향은 조선 건국 이후 전개될 불교미술의 한 단면을 제공합니다. 사리함이 담겨 있던 백자 발은 청자 중심의 고려 도자에서 백자 중심의 조선 도자로 이행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고려 말 사람들이 가지고 온 물질문화의 기반 위에서, 이제 새 나라 조선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전시회 첫 공간은 프롤로그로 조선의 건국과 방향이 소개됩니다. 이곳에서는 이성계가 조선 건국 직전에 발원한 사리장엄 (李成桂 發願 舍利莊嚴)과 함께 조선의 시작을 알립니다.
조선 건국 직전인 1390-1391년에 이성계가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금강산에 모신 사리장엄입니다. 백자 발과 청동 발, 탑 모양의 금동 사리함 등 여러 점을 돌로 된 함에 넣어 모셨습니다. 백자 발과 사리함의 표면에 미륵이 내려올 때를 기다린다는 내용의 명문을 적었습니다. 불교를 깊이 믿었던 이성계는 고려시대의 불교 성지였던 금강산에 사리장엄을 모시면서 새 나라의 건국을 꿈꿨던 것으로 보입니다.
02. 白 조선의 꿈을 빚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푸른 청자의 시대가 가고 하얀 백자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은 유교 질서를 세우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며 나라의 기틀을 갖추었습니다. 나라에서는 전국의 물자와 장인을 엄격하게 관리했고, 이를 바탕으로 도자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고려 말 쇠락한 청자는 인화印花 분청사기로 변모하며 다시금 전성기를 맞이하고, 마침내 새하얀 경질백자가 탄생했습니다. 조선 건국 후 200여 년 동안은 우리 역사상 가장 다양한 도자가 공존했습니다. 1부에서는 조선 전기 도자를 살펴보며 백색을 향한 정신과 새로운 미감으로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첫 공간에서는 조선 전기 백자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 백자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과 멀티미디어 자료를 통해 작품에 대한 자세한 배경설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조오례의서례 國朝五禮序例
『세종실록世宗實錄』「오례五禮」를 정비한『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序例』
1474년(성종 5) 편찬된 의례서로 국가 의례 전반의 기준을 마련한 『국조오례의』와 짝을 이룹니다. 이 책에 수록된 길례 제기도설祭器圖說, 가례·빈례 준작도설尊爵圖說 등은 당시 정비된 의례기의 형식과 조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제기는 금속으로 만드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조선 초에는 금속이 부족해 경제적이고 제작이 쉬웠던 도자제기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일부 의례에는 의도적으로 도자제기가 선택되기도 했으며, 분청사기는 도설에 제시된 복잡한 문양들을 표현하는 데에 적합한 기법상의 장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자 철화 끈무늬 병 白磁 鐵畫 繩文 甁
조선 16세기 신수12074 1995년 서재식 기증 보물
이 병은 회색빛을 살짝 머금은 옥호춘병에 목을 한 바퀴 돌려 감은 끈 한 가닥이 자연스럽게 밑으로 흘러내리듯 철화 장식을 더하였습니다. 이 병의 굽 안 바닥에는 음각으로 ‘니ᄂᆞ히’ 라는 한글이 쓰여 있습니다. 조선 전기 청화백자와 철화백자의 문양이 대체로 세한삼우歲寒三友처럼 상징적인 소재로 확장성을 보이는 것에 비해, 이 병과 같이 간결한 표현은 매우 드물어 신선합니다. 관련하여 경기도 광주 관요 도마리 1호 가마터에서 출토된 청화백자 전접시 편片에서 쓰인 시詩에 ‘옥호(술병)에 푸른 실을 묶어 술을 사 오는 것이 왜 이리 더딘가?’ 라는 표현이있어 주목됩니다. 조선 전기 왕실과 관인사대부의 풍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전시회에서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던 백자 작품 중 하나
섹션 1이 끝나고 다음 전시공간으로 이동합니다. 2관과 3관에서는 조선의 회화와 서예, 그리고 불교미술이 소개됩니다.
03. 묵墨, 인문으로 세상을 물들이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이 건국되면서 사람의 수양과 도덕을 중시하는 인문人文시대가 열렸습니다. 사대부들은 시와 글씨, 그림에 자신의 이상을 담았습니다. 그들이 남긴 글과 그림은 조선을 물들이며 문文의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문치文治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검지만 오색五色을 담은 먹은 사대부의 내면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도구였고, 자연과 만나며 더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수묵산수화의 풍경은 단순한 경치가 아니라 사대부가 꿈꾼 이상세계이자 내면을 확장하는 창이었습니다. 2부는 서화를 통해 사대부들이 바라본 세계와 품었던 인문정신을 들여다봅니다. 한 점 한 점에 담긴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따라가며 그 시대의 풍경을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작품 보호와 집중을 위해 다소 어두운 공간...
어촌에 지는 저녁노을과 모래에 내려앉는 기러기
어촌석조도 漁村夕照圖 평사낙안도 平沙落雁圖
전傳 안견安堅(15세기 활동) 조선 15세기 말~16세기 초 비단에 먹과 엷은 색 야마토문화관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에서는 국내에 소장된 조선전기 작품은 물론 일본이나 미국 미술관 등에서 소장한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작품별로 전시기간이 상이하니 이 부분도 확인하고 방문하세요.
자연 속 생각에 잠긴 선비 고사관수도 高士觀水圖
전傳 강희안姜希顔(1417~1464) 조선 16세기 중반 종이에 먹 본관2504
쓰러질 듯한 거대한 절벽 아래 한 사람이 물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거대한 절벽은 붓을 단번에 쓸어내려 표현하였고, 절벽 아래로 뻗어 나온 넝쿨은 빠른 필선으로 표현하여 전체적으로 강렬한 필묵이 돋보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강희안의 필치를 성글고 거친 붓질이 특징이라고 한 언급과 맞닿아 있습니다. 화면 왼편 가운데 「인재仁齋」 인장이 있어 그의 작품으로 전해오고 있지만, 그의 작품으로 보지 않는 의견도 있습니다.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
16세기 평상복을 입은 선비의 초상 김진 초상 金璡 肖像
15세기 공을 세운 신하의 초상 장말손 초상 張末孫 肖像
많은 작품은 아니지만 조선 전기의 초상화를 만나볼 수 있는 것도 이번 전시회의 매력입니다.
석봉 한호가 쓴 천자문 천자문 千字文
글씨 한호韓濩(1543~1605) 조선 1583년 간행 종이에 목판 개인소장 보물
조선 선조 대 명필 석봉石峯 한호가 쓴 『천자문』입니다. 『천자문』은 예로부터 글씨를 처음 배울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교육서였습니다. 이 책은 1583년(선조 16), 선조의 명을 받아 한호가 직접 쓰고 나라에서 목판으로 찍어 배포한 것입니다. 처음 간행된 판본인 만큼 석봉체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습니다. 글씨는 획의 굵기가 일정하고, 점과 선, 자형 모두 단정하고 깔끔합니다. 학습용 글씨로 손색이 없는 구조와 균형을 보여줍니다. 이후 한호의 『천자문』은 여러 차례 다시 간행되었으며 전국의 관아, 사람들에게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이것이 정녕 사람이 쓴 글씨인가?
04 금金, 변치 않는 기도를 담다
조선의 건국되면서 유교의 시대가 시작된 뒤에도 불교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교는 공적 영역에서 경제적·사회적 위치가 제한되었지만, 이념과 명분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또한 변함없이 삶의 고통과 죽음의 슬픔을 위로하는 신앙으로 존재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왕실 가족과 사대부는 물론, 일반 백성까지 화려한 불교미술의 조성과 불교 행사에 끊임없이 열중했습니다. 빛나는 금빛 부처를 만드는 마음은 유교의 사회가 시작되어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는 않는 금처럼, 변치 않는 마음을 담은 조선 전기의 불교미술을 3부에서 소개합니다.
너무나도 좋아하는 불교 미술 중에서도 화려한 불상과 불화등을 국립중앙박물관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전시회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심곡사 탑에서 발견된 부처와 불감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감과 금동불상군
深谷寺 七層石塔 出土 金銅佛龕·金銅佛像群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기단에서 발견된 부처와 불감입니다. 상자 모양의 불감 안에 7구의 부처와 보살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7구 중 크기가 큰 아미타부처와 관음보살, 지장보살의 삼존상은 원·명 티베트계 불교미술의 영향으로 날씬한 신체를 드러내고 화려한 장신구를 걸쳤습니다. 4구의 작은 상은 대좌가 없고 부처는 양 어깨를 가리는 옷을 입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이처럼 탑 안에 부처와 불감을 넣는 신앙이 유행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 석가탄생도 釋迦誕生圖
조선 15세기 비단에 색, 금니 혼가쿠지
석가모니 부처의 일생을 그린 여러 폭의 그림 중 하나입니다. 석가모니가 카필라 왕국의 왕자로 태어날 때의 여러 이야기를 한 화면에 그렸습니다. 그림 중앙에는 석가모니 부처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는 모습을 그렸고, 시간적으로 전후에 해당하는 장면들을 배치했습니다. 이 그림에 나오는 장면은 조선 전기 왕실에서 지은 부처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에 실린 변상도와 매우 비슷하여, 왕실에서 만든 그림으로 추정됩니다.
작품 속에서 한 손으로는 하늘을 다른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석가모니를 찾아 보세요.
금동관음보살좌상 金銅觀音菩薩坐像
여말선초 금동 높이 18.6 본관11724 보물
연꽃 모양의 대좌 위에 앉아 있는 관음보살입니다. 화불이 있는 보관을 쓰고 큰 귀걸이와 목걸이, 무릎까지 드리워진 장신구를 걸쳤습니다. 허리가 잘록하고 곧은 자세와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은 고려 말 원 티베트계 불교미술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이 보살은 금강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합니다. 금강산은 고려시대부터 불교 성지로 여겨졌고, 불상을 금강산의 암벽에 봉안하는 신앙이 조선 초까지 유행했습니다.
보살님 저에게 구원과 자비를...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불상중에 너무나도 매력적인...
오늘은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작품소개는 이렇게 간략하게 마칩니다.
마지막 섹션에서는 훈민정음을 해설한 책 훈민정음 訓民正音이 전시되어 있는데 생략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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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아트샵과 주차장 정보 공유합니다.
| 아트샵 및 상품
새 나라 새 미술 :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아트샵에는 이번에 전시된 대표 작품들의 굿즈가 판매되고 있습니다. 작품감상 중에 에 저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작품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데요. 모두 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아트샵에서 구입하고 싶은...
다만 국립중앙박물관 아트샵 굿즈의 경우 워낙 완성도가 높게 나오는 편이어서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금동관음보살좌상 金銅觀音菩薩坐像 미니어처도 아트샵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중간 크기는 레진제품으로 72,000원 오른쪽 작은 보살님은 16만원
백자 철화 끈무늬 병 도자도 구입할 수 있는데요. 제가 이번 전시회에서 좋았던 작품들이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아트샵에 있는 것을 보니 작품을 선호하는 기준이 다 비슷한 것 같네요.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 도록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도록 가격은 54,000원. 전시회 도록 구입하다가 가산 탕진할 듯...
| 국립중앙박물관 주차장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 주차장은 국립중앙박물관 소형차 전용 지하 주차장 이용하시면 됩니다.
주차요금은 2시간 2,000원 기본요금이 부과되며, 이후 30분당 500원 주차요금으로 큰 부담은 없습니다. 주말에 자리가 없어서 그렇지...
추가로 다둥이, 국가유공자, 하이브리드 차량등 친환경 자동차 등 50% 주차요금 할인이 지원됩니다.
이번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 전시회는 사진촬영 가능하지만, 동영상 촬영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도슨트나 오디오가이드는 없지만, QR코드 인식통한 모바일 리플렛으로 작품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확인이 가능합니다.
| 4개의 섹션, 300여 작품
이번 전시회는 4개의 섹션으로 국가지정문화유산 20건 포함 300여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시회 관람에 필요한 시간은 최소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됩니다. 제가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 예약이 있어 딱 한 시간만 관람했는데, 뒷부분 작품 감상에 시간이 다소 부족했네요.
전시장 입구에는 한 점의 고려청자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청자 어룡모양 주자 (靑磁魚龍形注子)
- 국보 (National Treasure)
- 높이 (Height) : 24.4cm
- 시기 : 고려 12세기
물고기와 용이 결합된 상상의 동물 어룡魚龍을 형상화한 주자입니다. 꼬리를 치켜 올려 전체적으로 U자 형태이며 몸체는 부풀어 터질 듯합니다. 눈동자와 이빨에는 안료를 찍어 생동감을 더했습니다. 신령스러운 존재로 인식된 ‘어룡’이라는 소재와 주자에 표현된 화려한 조형성과 위엄은 왕실과 상류층의 권위를 보여줍니다.
| 제1부 그릇에 형상을 더하여
Part 1 Giving Figural Form to Pottery
흙으로 특정한 형상을 빛는 상형 행위는 역사가 오래되어 이미 신석기시대에 토기 들과 함께 사람이나 동물을 투박한 솜씨로 빚어낸 토우가 등장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무엇인가를 본떠 만든 토제품의 이른 사례 로는 3~6세기 신라와 가야 무덤에서 발견된 상형토기와 토우장식 토기가 눈에 됩니다. 주로 부장품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토기에 표현된 다양한 형상은 죽은 이를 위한 바람 이나 장송 의례와 관련된 의미를 담고 있습 니다. 상형토기와 토우장식 토기가 내세의 그릇이라면 고려 상형청자는 실생활에서 사용한 현세의 그릇입니다. 이 상형 토기와 토우장식 토기를 만드는 데 사용된 다양한 기법이 훗날 고려 상형청자 제작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말 탄 사람모양 뿔잔 (騎馬人物形角杯)
- 국보 (National Treasure)
- 높이 (Height) : 23.2cm
- 시기 : 가야 5세기
- 소장처 : 국립경주박물관
말을 타고 있는 무사를 형상화하였습니다. 무사, 말을 감싼 비늘갑옷, 말 엉덩이 위의 뿔잔 등을 서로 붙여 완성하였습니다.
고려 상형청자 중에도 이와 같이 각 부분을 따로 만들어 결합한 예가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제작기법은 서로 통합니다. 고려 상형청자 제작의 배경으로 그 전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진 토기의 조형적 전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새모양 토기 (鳥形土器)
- 시기 : 신라 3~5세기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삼국시대 상형토기 중 이른 시기의 새모양 토기입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조弁辰條에 “큰 새의 깃털로 죽은 이가 날아오를 수 있도록 했다”라는 내용이 있어 무덤에 새모양 토기를 묻은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3세기 후반 경주 지역의 덧널무덤에서 나온 새모양 토기는 액체를 넣고 따르는 구멍이 있어 제사용기로 추정됩니다. 큰 볏이 달리고 부리가 넓은 새모양이 유행하였고, 부엉이모양 토기도 있었습니다.
| 제 2부 제작에서 향유까지
고려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한 중국의 청자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수준 높은 청자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11~12세기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주변 국가로부터 다양한 문화적 영향과 자극을 받았습니다. 고려 장인들은 외부의 영향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창의적으로 변용하면서 고려 상형청자만의 독자적 세계를 완성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온전한 모습으로 전하는 상형청자도 중요하지만, 가마터에서 출토되는 상형청자 조각들은 장인의 무수한 실험과 도전 과정을 보여줍니다. 바닷길에서 출수된 상형청자는 가마터에서 수도 개경을 비롯한 소비처로 운송되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개경 이외 지역에서 발견된 상형청자는 다양한 사용자를 둘러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청자 꽃모양 완 (靑磁花形碗)
- 높이 (Height) : 7.4cm
- 시기 : 고려 12세기
꽃잎 5개로 이루어진 촉규蜀葵모양을 본떴습니다. 나선형으로 꽃잎을 양각하고 중심에는 꽃술대를 조각해 붙였습니다. 꽃잎 안쪽 가장자리에는 촉규 넝쿨무늬가 장식되었습니다. 비슷한 형태가 금속기로도 전해져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푸른색의 유약을 덮어 은은하고 영롱한 미감으로 완성한 것은 상형청자만의 특징입니다.
청자 주자와 승반 / 청자 귀룡모양 주자
고려 12세기
액체를 담았다가 따르는 기능을 하는 이 주자는 모두 둥근 형태입니다. 왼쪽은 장식이 없는 그릇 본연의 형태이지만 오른쪽 상형청자는 용머리에 거북의 몸체를 결합한 상상의 동물인 귀룡베모양입니다. 기능은 같은 그릇이지만 상형청자가 시각적으로 한층 풍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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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공간에는 상형청자와 함께 청백자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청자 사자모양 향로 (靑磁獅子形香爐)
- 국보 (National Treasure)
- 높이 (Height) : 21.2cm
- 시기 : 고려
사자는 불교의 가르침을 수호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고 산예狻猊라고도 합니다. 고려청자 절정기를 대표하는 비색과 세련된 조형으로 고려 상형청자의 높은 기술력과 뛰어난 조형미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송宋의 사신 서긍徐兢(1091~1153)이 정교하고 빼어나다고 평한 고려 왕실의 ‘산예출향狻猊出香’ 즉, 사자모양 향로가 바로 이 향로와 같은 종류였을 것입니다.
청자 참외모양 병 (靑磁瓜形甁)
- 국보 (National Treasure)
- 높이 (Height) : 22.8cm
- 시기 : 고려 12세기
가장 널리 알려진 고려 왕실의 상형청자로 비색청자의 대표작입니다. 인종仁宗(재위 1122~1146)의 무덤인 장릉長陵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고려는 비색翡色 유약과 날씬한 형태가 조화를 이루는 작품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금대金代 벽화나 고려불화를 참고할 때 이러한 병은 꽃병으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청백자 물병 및 주차, 병 참외모양 병등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국제도시 개경과 상형자기
상형청자가 화려하게 꽃핀 고려의 수도 개경은 외국과 교류가 활발했던 국제도시 였습니다. 중국 송*(960~1279)의 정요, 여요품, 경덕진요 옆에서 만들어진 자기가 수입되어 왕실과 상류층을 중심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고려 상형청자의 탁월함과 독자성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있습니다.고려의 사자모양 향로를 보고 감탄한 내용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고려 상류층에 스며든 향, 차, 술을 즐기는 문화, 문인 취향, 그리고 더 좋은 것을 갖고 감상하려는 고려 사람들의 바람도 상형 청자를 만드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넘어온 자기들... 원형이 유지되고 있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청자 연꽃모양 향로 조각과 향로뚜껑 조각
중국 북송시대 유물로 소개되어 있다.
| 제3부 생명력 넘치는 형상들
상형청자에서는 다양한 동물과 식물의 특징을 잘 포착해 실감 나게 표현한 형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됩니다. 이러한 소재를 표현한 방식은 대상이 되는 형태 전체를 본떠 만드는 것과 소재의 특징적 부분을 그릇에 적용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떠한 방식이든 하나의 조각 작품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러한 형상은 고려청자만의 비색과 투명한 유약을 더함으로써 한층 더 생명력 넘치는 모습으로 재탄생합니다.
고려 상형청자의 소재는 고려 사람들이 주변에서 실제로 보거나 상상했던형상으로, 크게 동물과 식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때로는 권위와 지위의상징으로, 때로는 항상 곁에 두고 싶은 자연을 대신하는 벗으로 고려 사람들의삶에 자리 잡았습니다
청자 철와 퇴화무늬 두꺼비모양 벼루와 청자 사자모양 향로
고려 12세기 작품으로 두 점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익살스러운 모양이 내 눈길을 끄는...
아래는 청자 사자모양 연적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 전시장 중앙부분에 위치한 공간에 배치된 한 점의 청자가 보입니다.
해당 주자는 리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으로 기억하고 봤던것 같은데요. 이번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 전시회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놀러온 것 같네요.
| 청자 양각·동화 연꽃무늬 조롱박모양 주자 (靑磁陽刻·銅畫蓮花文瓢形注子)
- 국보 (National Treasure)
- 높이 (Height) : 32.5cm
- 시기 : 고려 13세기
아래쪽 몸체와 위쪽 뚜껑은 연꽃모양이고, 그 사이 움푹한 곳에 연꽃 줄기를 들고 있는 동자모양 장식이 있습니다. 손잡이 위의 개구리는 뚜껑에 달린 작은 벌레를 응시하는 듯합니다. 동화銅畫기법으로 그린 붉은 무늬가 청자의 색과 대비되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룹니다. 1257년(고종高宗 44) 사망한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항崔沆의 무덤에서 나왔다고 하여 당시 권력자들의 취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다소 급 높은 상형청자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
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 ( 靑磁透刻七寶文香爐)
- 국보 (National Treasure)
- 높이 (Height) : 15.3cm
2021년 이건희 회장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작품이라 한다.
고려 상형청자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대표작입니다. 공 모양 뚜껑은 칠보무늬를 맞새김하고 원과 원이 겹쳐진 부분은 상감과 퇴화 기법으로 화려함을 더했습니다. 몸체에는 틀로 찍어낸 꽃잎을 붙였습니다. 상형과 함께 음각과 양각, 투각, 퇴화, 상감, 첩화 등 다양한 기법이 조화를 이루어 무르익은 고려 상형청자의 기술과 조형미를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토끼모양의 다리 장식이 생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상상의 동물
상형청자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은 용, 어룡, 커룡, 기린, 사자입니다. 이들은 예부터 상서롭고 신성한 동물로 여겨진 서수입니다. 이러한 형상은 왕실이나 귀족의 권위와 지위를 상징합니다. 상상의 동물은 향로에서 가장 많이 보이며, 연적과 베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형청자는 왕실 의례와 같이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거나 일상생활에서 상류층의 지위를 돋보이게 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청자 귀룡모양 주자 (靑磁龜龍形注子)
- 국보 (National Treasure)
- 높이 (Height) : 17.3cm
- 시기 : 고려 12세기
물을 담고 따르는 주자입니다. 용의 머리에 거북 몸을 결합한 상상의 동물인 귀룡이 연꽃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귀룡은 고개를 들고 입을 벌려 포효하는 듯합니다. 세밀하게 음각한 비늘과 뿔, 발톱이 맑고 투명한 비색 유약 아래로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눈과 손잡이에는 철 안료로 점을 찍어 생동감을 더했습니다.
청자 용모양 향로 (靑磁龍形香爐)
- 높이 (Height) : 22.7cm
- 시기 : 고려 12~13세기
상상의 동물인 용은 고려에서 왕실의 권위를 나타냈습니다. 이 향로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용의 역동적인 모습을 포착하여 향로 뚜껑을 장식하였습니다. 머리를 치켜들고 몸을 비틀어 한쪽 앞발로 보배 구슬을 쥔 자세는 용에 응축된 힘을 잘 보여줍니다. 이 용 형상은 중국 허난성 청량사淸凉寺 여요 汝窯에서 출토된 용 장식 조각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 고려와 북송의 문화교류를 알려줍니다.
청자 베개인데, 작품 소개가 기억나지 않는다.
품안의 자연
앞에서는 상상의 동물을 모티프로 제작한 청자가 전시되었다면, 지금부터는 자연속 식물과 동물을 소재로 작업한 고려 상형청자가 선보입니다.
| 청자 석류모양 주자 ( 靑磁石榴形注子)
- 높이 (Height) : 18.3cm
- 시기 : 고려 12~13세기
고려 문인들은 석류를 옥 이슬방울이나 선인仙人의 음료로 부르는 등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 주자는 석류 열매 네 개의 형태를 합쳐서 만들었습니다. 맨 위의 입수구는 석류 꼭지를 크게 벌려 액체를 넣기 쉽게 만들었고, 옆쪽 주구는 석류 잎을 돌돌 만 형태입니다. 열매, 잎, 가지 등 석류의 모든 요소를 집약하여 독보적인 조형성을 창출했습니다.
청자 물고기 연적과 청자 물고기 모양 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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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순모양, 호리병모양 등 자연에서 가저온 상형청자들을 만나볼 수 있는 공간...
다소 변색되었더나 파손된 작품들이 여기에 모여 있고...
여기는 국립중앙박물관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 전시회에서 조금 더 고급진 청자들이..
| 청자 죽순모양 주자 (靑磁竹筍形注子)
- 보물 (Treasure)
- 시기 : 고려 12세기
주자에 죽순의 요소를 덧씌우듯 결합하였습니다. 액체를 넣고 따르는 기능을 고려하여 아래쪽을 풍만하게 만들었습니다. 주자에 담긴 액체를 따뜻하게 데우기 위해 주자의 바닥을 보온용 그릇인 승반 위에 올린 예도 있습니다. 한편, 죽순모양 주자의 은은한 푸른빛 유색은 죽순을 푸른 옥에 비유했던 문인 이곡李穀(1298~1351) 쓴 시,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기능성과 형태미를 모두 충족시킨 이 주자들은 고려 상형청자가 도달한 높은 수준의 경지를 보여줍니다.
제4부 신앙으로 화장된 세상
Part 4 Into the Other World 고려시대에 청사는 실용과 예술의 범주를 넘어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거나 신앙적 바람을 표현하는 영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러한 화장성은 표현 매체로서 청자가 지닌 위력과 고려 사람들의 창의성을 잘 보여줍니다. 도교와 불교는 고려 사람들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이들의 삶에서 청자가 애호되었고 청자 제작 기술이 뛰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려 사람들의 종교 문화에 청자가 포함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교와 불교 의례에 사용되는 기물이 청자로 만들어졌고, 종교적 소재를 담은 청자 그릇도 제작되었습니다. 니아가 기존에 주로 다른 재료로 만들던 불상도 청자 기술을 적용해 만들었습니다. 종교적 용도로 만틀어진 싱형청자는 공예와는 또 다른 차원의 시각적 경험과 의미를 줍니다
청자 나한상 조각들
전북 고창 절터에서 출토된 작품들이라고 하는데. 뭔형이 너무나도 궁금하다.
청자 사람모양 주자 ( 靑磁人物形注子)
- 국보 (National Treasure)
- 높이 (Height) : 28cm
- 시기 : 고려 13세기
도교의 인물이 새를 타고 무언가를 바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주자입니다. 이 인물이 손에 든 그릇 구멍에 액체를 넣고 앞쪽의 새 입으로 따르는 구조입니다. 새는 풍선처럼 부푼 몸과 머리 위의 볏 그리고 긴 꼬리가 특징입니다. 이 새를 봉황鳳凰 또는 난鸞새로 보기도 합니다.
청자 나한상 (靑磁羅漢像)
- 높이 (Height) : 22.3cm
- 시기 : 고려 13세기
바위 위에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비스듬히 앉아 있는 나한상입니다. 팔을 옷소매에 집어넣고 경상經床에 기댄 자세를 하였습니다. 주름진 얼굴에 진지한 표정, 정면을 응시하는 눈매에서 수행자의 면모가 느껴집니다. 이 상의 출토지가 강화도인 점으로 미루어, 고려 조정이 몽골의 침략에 맞서 강화로 수도를 옮겼던 1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보살, 나한, 여래상 등 불교와 도교의 청자들...
보살, 나한상 등 청자 불상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절이나 암자를 개보수하면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원형이 보전되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 소개하는 국립중앙박물관 겨울 전시회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 는 내년인 2025년 3월 3일까지 선보일 예정입니다.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아이들과 함께 방문해 보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이번 전시회 관람시간은 최소 2시간 이상 고려하셔야 합니다. 우선 관람객이 많아서 주요 작품에는 대기가 필요하고요. 좋아하는 작품들이 많다 보니 저는 2시간30분 정도 소요 되었네요.
[프롤로그] 비엔나에 분 자유의 바람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비엔나를 유럽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도시 확장 계획을 단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비엔나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꼽히는 유명한 건축물들이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과거 예술 양식의 모방과 재현에 그쳤습니다. 기대와 실망 속에 논란의 중심이 된 대도시 비엔나에는 각종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였고, 토론의 장이 펼쳐졌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이때 새로 지어진 건물에 벽화를 그리면서 크게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전통 양식을 그대로 따르는 일은 클림트의 뜻과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예술의 길을 탐구했고,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특별한 예술 운동을 시작합니다. 클림트는 새로운 도전을 꿈꾸던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클림트와 동료들이 만든 비엔나 분리파의 활동으로 이제 비엔나에 ‘자유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에곤 실레 (1890–1918) / 1918년, 종이에 석판화 / 개인 소장
비엔나 분리파는 '시대에는 시대에 맞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을 모토로 1897년 창립되었습니다. 초대 회장에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선출됐어요. 당시 비엔나 예술가들이 가장 믿고 따랐던 클림트는 많은 전시회를 열면서 그들이 추구한 '새로운 예술'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1902년에는 베토벤에 경의를 표하는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비엔나 분리파는 전통을 깬 혁신의 상징이었던 베토벤을 존경했습니다.18세기 음악적 형식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던 때, 베토벤은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나 감정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음악적 구성을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전시회의 포스터는 알프레드 롤러가 그렸습니다. 그는 포스터 역시 하나의 예술 분야로, 관심 없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포스터에는 수수께끼 같은 상징이 많습니다. 빛나는 물체를 들고 몸을 굽힌 여성은 어둠에서 빛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마치 비엔나의 새로운 빛이 되고 싶었던 비엔나 분리파의 꿈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흔히 구스타프 클림트를 ‘황금의 화가’라고 알고 있지만, 예술가로서 그를 설명하는 한 단어를 꼽는다면 그건 바로 ‘혁신’입니다. 초기에 클림트는 주로 전통 양식으로 작업했고, 황제로부터 상도 받으며 큰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곧 인간의 내면 세계를 표현하는 주제에 주목했고, 유럽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인상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비엔나의 방식으로 수용한 ***아르누보 등 다양한 예술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클림트는 외국 작품을 소개하고 활발한 전시 활동을 하면서 오스트리아 예술을 모더니즘의 시대로 이끌었습니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젊은 예술가들이 실험적인 예술을 할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혁신’을 향한 그의 열망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시장 모습과 클림트의 사진, 정말로 옛날에 클림트 도록에서 이 사진을 보고 클림트에 대한 환상이 깨진적이 있었다는... 조금은 그의 작품과 비슷한 느낌을 상상하고 있었던 시절...
국립극장의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86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수도 비엔나를 대도시로 탈바꿈시킨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비엔나를 둘러싼 성벽이 철거된 자리에 생긴 커다란 대로에 오스트리아의 정치경제, 문화, 예술을 위한 수많은 건물이 세워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비엔나로 여행을 간다면 방문해야 하는 대표적인 명소들이죠. 구스타프 클림트는 바로 이 시기, 새로 만들어진 건물을 장식하기 위한 예술가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이 작품은 클림트가 국립극장의 실내 장식을 위해 그린 습작입니다. 바로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연회 장면인데요, 중앙에는 디오니소스의 조각상이 있고, 양쪽으로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왼쪽 여인은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지팡이를 들었고, 오른쪽 여인은 월계수 관을 들고 있습니다. 디오니소스 연회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돈 연극의 기원으로 생각되었기에, 클림트는 국립극장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해 이 주제를 선택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초상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하나 지역의 소녀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83년경 패널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작품에 제작 시기가 쓰여 있지 않지만, 구스타프 클림트가 학생이던 시절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체코 모라비아에 있는 하나 지역에서 온 소녀를 그렸다. 소녀는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있는데, 이는 하나 지역 풍습을 따른 것이다. 옷과 배경을 모두 옅은 회색으로 칠해 사실적으로 묘사한 얼굴이 더욱 두드러진다. 살짝 옆을 보는 소녀의 눈길은 그녀가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노인의 옆모습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96년경 카드보드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트라운 백작’이라는 제목으로도 전해지는 까닭에 주문받은 초상화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림 속 인물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옆얼굴만 보여 주는 구도 역시 평범하게 주문받아 제작한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클림트는 얼굴의 특징을 명확하게 드러내면서도 윤곽선을 부드럽게 처리했다. 배경을 단색으로 칠해서 노인의 옆얼굴에 더욱 눈길이 머문다. 클림트가 인물화에서 새로운 구도와 효과를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모자를 쓴 여인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97/98년 캔버스에 유화 클림트재단
작품 속 여성은 당시 비엔나에 유행하던 패션과 장신구를 보여 준다. 목을 감싼 칼라와 챙이 넓은 모자를 모두 검은색으로 칠해 여인의 얼굴이 더욱 돋보인다. 19세기 말 유럽에서는 불편한 코르셋이나 지나친 장식에서 벗어나 실용적이고 편안한 의복을 강조하는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비엔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패션 디자이너였던 에밀리 플뢰게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예술적 동반자로서 깊은 관계를 유지했고, 그녀의 패션은 클림트의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풀 속 여인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898년경 캔버스에 유화 클림트재단
세련된 모자를 쓰고 풍성한 소매가 돋보이는 블라우스를 입은 초상화 속 여인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두터운 물감으로 그려낸 수풀과 여인의 블라우스 소매는 손으로 만지지 않아도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구스타프 클림트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예술을 오스트리아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과정에서 프랑스의 인상주의와 같은 화풍이 오스트리아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클림트도 초기에는 전통적인 화풍으로 그렸지만, 점점 인물화에서 여러 가지 구도나 표현법을 실험했습니다. 1890년대 후반에는비엔나 중.상류층 여성들의 초상화가로 자리 잡으면서, 이 작품처럼 완성도 높은 인상주의 화풍의 인물화틀 그렸습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대표작품이기도 한데요. 작품 사이즈도 A4 용지정도 크리로 작고, 제가 기대한 것보다는 다소 소박한 크림트의 인물화 입니다.
클림트를 기대하고 방문했다면 실망할 전시회
뒤에도 클림트의 그림은 계속되지만 기대했던 황금빛의 클림트 그림은 이번 전시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번 전시회 제목인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뒤에 클림트는 빠져야.
1부. 비엔나 분리파, 변화의 시작
19세기 말 비엔나에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변화의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예술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기득권과 맞서는 젊은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된 구스타프 클림트는 동료들과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하여 과거의 관습과 예술 양식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의 초대 회장이 된 클림트는 활발하게 전시를 열어 작품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는 교류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회화뿐 아니라 공예, 삽화, 책 표지와 우표 디자인 등 일상의 여러 분야로 예술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그들의 예술 철학과 외국의 예술 동향을 알리는 잡지인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도 발행했습니다. 여러 예술 장르를 합쳐 하나로 완성된 아름다움을 구현한다는 ‘총체예술’의 개념은 비엔나 분리파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영원하지 않았던 클림트의 분리파
비엔나 분리파는 크게 두 개의 단체가 결합된 형태였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7인회’와 더 전통적인 양식을 고수했던 ‘하겐 클럽’입니다. 두 단체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가졌기에 분열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1905년 비엔나 분리파 회원들의 작품 판매처로 7인회와 친분이 있는 갤러리를 활용하는 방안을 두고 형평에 어긋난다며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요인은 풍경화를 주로 그리며 순수미술을 중요시한 하겐 클럽과 예술과 공예의 통합을 지향한 7인회의 서로 다른 성향으로 인한 충돌이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결국 분열로 이어졌고, 클림트와 콜로만 모저, 요제프 호프만을 비롯한 예술가들은 비엔나 분리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비엔나 분리파는 이후에도 존속하며 젊은 예술가들의 등용문 역할을 했습니다.
제14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알프레드 롤러 (1864–1935) 1902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는 '시대에는 시대에 맞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을 모토로 1897년 창립되었습니다. 초대 회장에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선출됐어요. 당시 비엔나 예술가들이 가장 믿고 따랐던 클림트는 많은 전시회를 열면서 그들이 추구한 '새로운 예술'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1902년에는 베토벤에 경의를 표하는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비엔나 분리파는 전통을 깬 혁신의 상징이었던 베토벤을 존경했습니다.18세기 음악적 형식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던 때, 베토벤은 기존의 형식에서 벗어나 감정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음악적 구성을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전시회의 포스터는 알프레드 롤러가 그렸습니다. 그는 포스터 역시 하나의 예술 분야로, 관심 없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집중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포스터에는 수수께끼 같은 상징이 많습니다. 빛나는 물체를 들고 몸을 굽힌 여성은 어둠에서 빛으로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 포스터
루돌프 칼바흐 (1883–1932) 1908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 안에는 구스타프 클림트처럼 다양한 예술장르를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회화와 같은 순수미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1905년 클림트와 뜻을 함께한 예술가들이 비엔나 분리파를 탈퇴했습니다. 클림트가 비엔나 분리파에 속했던 시기를 '빛나는 7년'이라고 부릅니다. 무려 23번의 전시회를 열면서 유럽의 예술가들과 왕성하게 교류를 했고,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변혁의 움직임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클림트는 비엔나 분리파를 탈퇴한 후 '클림트 그룹'을 만들어 더 급진적인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지금 보고 계시는 전시회 포스터는 클림트 그룹이 개최한 '비엔나 예술전람회'입니다.이 전시에서 만나게 될 '꿈꾸는 예술가들'이 총출동했습니다. 콜로만 모저와 요제프 호프만은 디자인과 장식 예술 분야를 담당했고,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도 출품했습니다 이 전시는 오스트리아 예술계가 모더니즘으로 전환하는 시작점으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좀 더 자유롭게 자신만의 예술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이겠죠?
제40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포스터
에른스트 에크 (1879–1941) 1912년 종이에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는 클림트와 동료들이 떠난 뒤에도 활동을 이어갔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열어 다양한 예술가의 작품을 오스트리아에 소개했다. 또한 젊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제40회 전시회에서는 포스터라는 장르가 독립된 예술 분야임을 강조했다. 비엔나 분리파는 서체와 그래픽 디자인이 조화를 이룬 다양한 포스터를 전시했다. 에른스트 에크는 흰색과 검은색만으로 강렬하고 순수한 디자인의 포스터를 만들었다.
제14회 전시회장에서 촬영한 비엔나 분리파 회원들
모리츠 네어 (1859–1945) 1902년 사진 비엔나 이마그노 사진 기록 보관소 (크리스티안 브란트슈테터 수집)
혁신의 상징, 베토벤을 위한 전시회
비엔나 분리파는 1902년 ‘베토벤에 대한 경의’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 전시관인 *제체시온의 중앙 전시실에는 독일 조각가 막스 클링거의 <베토벤> 조각상이 놓였습니다. 베토벤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곳곳에 전시되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중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일부를 인간의 고통과 투쟁,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여정으로 묘사한 <베토벤 프리즈>를 전시실의 세 벽면에 그렸습니다.
전시회 개막식에는 비엔나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지휘 아래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일부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 전시회의 전체 디자인은 비엔나 분리파의 요제프 호프만이 맡았습니다. 새롭고 대담한 전시회였다는 좋은 평가도 있었지만, 급진적인 시도를 어려워하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엔나 분리파는 이 전시회에 회화, 조각, 음악, 디자인 등 전시의 모든 요소가 하나로 어우러져 특별한 감상을 선사하는 ‘총체예술’의 이상을 구현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가 만든 잡지
비엔나 분리파는 미술과 문학을 아우르는 『베르 사크룸(성스러운 봄)』이라는 잡지를 발간했습니다. 이 잡지는 1898년부터 1903년까지 간행되면서 외국의 예술 동향을 알리고 새로운 예술을 보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이 잡지는 비엔나 분리파의 초기 역사를 가장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예술가들이 돌아가며 디자인을 담당한 까닭에 누가 맡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양식의 잡지가 발간되었습니다. 이 또한 특정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예술을 지향했던 비엔나 분리파만의 특징이었습니다. 『성스러운 봄』은 단순한 잡지가 아니라 문학과 그림, 표지 디자인을 결합하여 비엔나 분리파가 추구했던 ‘총체예술’을 구현한 또 하나의 매체였습니다.
성스러운 봄 1호
1898년 1월 발간 오스트리아 예술가연합 활판 인쇄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는 6년 동안 '성스러운 봄'이라는 잡지를 발간했어요. 이 잡지는 유럽 예술의 동향을 파악하고 그들이 보여주려고 한 새로운 예술이 무엇인지 알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정사각형 판형으로 만들어진 '성스러운 봄'의 첫 번째 호입니다. 표지를 보시면 나무의 뿌리가 화분을 뚫고 자라나 있고, 풍성한 나무에 열매처럼 매달린 세개의 문장이 있습니다. 이는 예술의 중요한 요소인 건축회화, 조각을 상징합니다. 마치 새롭게 뿌리내리는 비엔나 분리파와 성스러운 봄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성스러운 봄'은 매번 다른 예술가가 편집장이 되었다고 해요. 그래서 나올 때마다 각자의 색을 담은 제각각의 디자인이 돋보입니다. 라틴어로 쓰인 잡지 제목 '베르사크룸'은 '성스러운 봄'이라는 의미로, 비엔나 분리파가 전통에서 벗어나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스러운봄 5/6, 9월, 10월호
오스트리아 황제 즉위 60주년 기념우표를 위한 디자인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기마상, 60헬러 콜로만 모저 (1868–1918)
1908년 카드보드에 연필(23), 종이에 연필(24-26), 불투명 수채 오스트리아 포스트 AG
콜로만 모저는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재위 1848-1916)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디자인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98년 열린 제1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의 개막식에 참석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고 비엔나가 유럽 예술의 중심지임을 강조하기 위해 비엔나 분리파를 지지했다. 모저는 기하학적인 무늬로 우표의 테두리를 각각 다르게 디자인했다. 예술이 삶의 모든 부분에 스며들어야 한다는 모저의 예술적 지향을 잘 보여 주는 작업이다.
벨베데레 궁전
카를 몰 (1861–1945) 1909년경 종이에 다색 목판화 레오폴트미술관
19세기 후반 비엔나에서는 목판화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비엔나 분리파의 창립 회원이었던 카를 몰 역시 비엔나 풍경을 담은 판화를 많이 만들었다. 이 판화는 벨베데레 궁전 정원의 겨울 풍경을 담고 있다. 왼쪽에 보이는 조각상에서 쭉 뻗은 정원 길을 따라 벨베데레 궁전으로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몰은 빛의 반사와 섬세한 색감을 세련되게 활용하여 겨울 분위기를 표현했다.
2부 새로운 시각, 달라진 오스트리아의 풍경
비엔나 분리파의 대다수 회원은 유럽으로, 일부는 아시아 지역까지 여행하며 새로운 예술을 접하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전시회를 열어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어떤 예술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오스트리아를 그린 풍경화가 나타났습니다.
전통 양식을 따르던 보수적인 아카데미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탐탁치 않아 했고, 당시 유럽에 퍼져 나갔던 예술적 자극에 대한 수용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비엔나 분리파는 새로운 시도와 자극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모방이 아닌 그들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들의 예술 철학과 도전은 이후 비엔나 예술계가 모더니즘으로 나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큰 포플러 나무 11 (다가오는 폭풍)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902/0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를 이끈 구스타프 클림트는 예술가들이 유럽의 다양한 미술을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오스트리아 밖으로 나가서 보고 배우라고 지시했습니다. 또한 유럽의 예술가들을 초청해 전시회를 열어 소통의 장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유럽에서 유행하던 인상주의나 상징주의가 비엔나에 알려졌고, 오스트리아의 예술가들은 이전과 다른 풍경화들을 그리게 됩니다..
클림트의 풍경화에서 거대한 포플러나무는 작품의 오른편을 가득 채우고 있죠. 나무를 잘 보시면 여러 가지 색 물감을 찍어서 반짝이는 효과를 냈습니다.어떤 평론가는 이것을 '마치 송어의 비늘 같다'고 말했어요. 멀리 펼쳐진 들판 너머로 하늘이 크게 그려져 있는데, 바람이 소용돌이치듯이 불고 먹구름이 져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쏟아질 것 같네요. 하늘을 극적이고 생생하게 그렸던 화가가 한 명 떠오르지 않나요?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클림트도 유럽에서 유행했던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당시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정사각형 화폭을 선택한 것도 참 클림트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숫가의 남녀
에른스트 슈퇴어 (1860–1917) 1897/190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그림 속 남녀는 호숫가 난간에 기댄 채 서로의 시선을 피해 먼 곳을 바라 보고 있다. 비엔나 분리파의 창립 회원인 에른스트 슈퇴어는 이 작품에서 여러 빛깔의 색들을 섞지 않고 점을 찍어서 표현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파란색과 연보라색 점들이 왠지 우울하고 쓸쓸한 감정을 자아낸다. 슈퇴어는 주로 희미한 저녁 빛을 표현해 서정적인 장면을 연출했고,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을 담아내고자 했다.
넓게 펼쳐진 들판과 언덕을 표현한 이 그림은 레오폴트 블라우엔슈타이너의 초기 작품이다. 높이 쌓아 올린 옥수수 짚을 여러 곳에 배치해 화면을 구성했고, 가까운 곳과 먼 곳의 풍경을 조화롭게 표현했다. 당시 흔했던 황토색 옥수수 짚을 소재로 수확 이후 여름날 풍경을 묘사했다. 일본 목판화와 인상주의 회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구도와 색을 실험적으로 사용하고 그 결과를 작품에 충실히 반영했다.
피아노를 치는 레오폴트 치하체크
에곤 실레 (1890–1918) 1907년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에곤 실레는 열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매독으로 죽자 삼촌인 레오폴트 치하체크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이 작품은 실레의 삼촌이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그렸다. 실레는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 밝은 부분과 그림자가 있는 어두운 부분을 구분하여 명암의 대비를 살렸다.
가로로 긴 화폭 역시 극적인 구도를 만들어 준다. 붓질의 방향이 모두 빛이 들어오는 오른쪽 아래를 향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치는 손으로 눈길이 간다. 실레는 삼촌의 손을 번지도록 표현하여 피아노를 치는 율동감을 살렸다.
실비아 콜러 (화가의 딸)
브론치아 콜러-피넬 (1863–1934) 1926년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브론치아 콜러-피넬은 구스타프 클림트, 요제프 호프만 등 비엔나 분리파 예술가들과 매우 가깝게 교류했다. 그녀의 집은 비엔나의 화가, 과학자, 음악가, 철학자들이 모여 교류하는 장소였다. 그녀는 특히 인물화와 정물화에서 독특한 색채와 구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화가로 활발히 활동하면서도 에곤 실레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브론치아의 딸 실비아는 자신감 넘치는 자세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으며, 사랑과 헌신의 상징인 분홍 카네이션을 들고 있다.
교류와 후원, 비엔나의 카페 문화
카페는 화가, 소설가, 음악가, 건축가, 정치인 등 주요 인사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정보를 주고받는 장소였습니다. 카페 문화는 당시 비엔나 예술계의 중심이었으며, 예술의 장르를 넘나들며 서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기 비엔나 예술가들은 활발한 예술 후원에 힘입어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 나갔습니다. 카페는 후원자와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탐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의 재력가들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술가들은 감사의 의미로 후원자의 드로잉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굽은 목재로 만든 의자, 255번
카페 뮤지엄을 위한 디자인 디자인: 아돌프 로스 (1870–1933) 제작: 야코프 & 요제프 콘 1898년경
굽은 목재, 너도밤나무에 검붉은 칠, 나무로 엮은 좌석 레오폴트미술관
여러분은 카페에 가면 무엇을 하시나요? 공부나 일을 위해 혹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가시나요? 19세기 말 비엔나에서는 이런 카페 문화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예술, 철학, 문학, 음악의 중심지 비엔나에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모였던 가장 중요한 장소가 바로 카페였어요. 그 중에서도 최고의 명소로 꼽히는 곳이 바로 카페 뮤지엄이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계시는 의자는 1899년 카페 뮤지엄이 문을 열었을 때 놓여 있었던 것이에요. 이때 만들어진 카페 의자는 단순한 디자인에 대량 생산이 가능한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이 의자를 디자인한 아돌프 로스는 장식이 없는 단순한 디자인으로 기능성을 살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막상 카페 뮤지엄이 문을 열었을 때는 엄청난 논란이 있었다고 해요. 화려한 장식을 기대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의 디자인이 너무 무미건조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아돌프 로스의 실용성과 기능성을 강조한 디자인은 이후 모더니즘 건축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이자 드로잉 작가로, 코코슈카는 다양한 매체와 기법을 사용했으며, 수많은 전시회와 작품을 통해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가 남긴 예술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파울 셰어바르트
작품집 『사람의 얼굴』에 수록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6년
출판사: 데어 슈투름, 베를린 종이에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가 그린 독일의 소설가이자 건축 이론가 파울 셰어바르트의 초상화다. 그는 표현주의 잡지 『데어 슈투름』에 많은 글을 기고했다. 특히 건축에 유리를 사용하여 인간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유리 건축 이론’을 제시해 주목받았다. 코코슈카는 다양한 굵기로 선의 강약을 조절하여 셰어바르트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헤르바르트 발덴
작품집 『사람의 얼굴』에 수록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6년
출판사: 데어 슈투름, 베를린 종이에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가 그린 독일의 미술 비평가 헤르바르트 발덴의 초상화다. 발덴은 표현주의와 같은 새로운 예술의 흐름을 지지했다. 그는 베를린에 출판사와 갤러리를 열어 새로운 예술 운동을 지원하고 이를 세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발덴이 1910년 창간한 잡지 『데어 슈투름(Der Sturm)』은 표현주의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중요한 출판물이었다. 오스카 코코슈카 역시 이 잡지에 여러 점의 삽화를 그렸다.
콜로만 모저
콜로만 모저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만든 예술가입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에서 조각, 유리 등 다양한 방면의 디자이너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주도하며 가구, 벽지, 도자, 직물,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도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모저의 디자인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부드러운 곡선과 자연스러움이 특징입니다. 또한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양식으로 세련되고 현대적인 디자인을 추구했습니다. 디자인 공방을 떠난 이후로는 빛과 색을 연구한 회화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했던 콜로만 모저는 비엔나 예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끈 만능 예술가였습니다.
산맥
콜로만 모저 (1868–1918) 191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이 그림을 그린 콜로만 모저는 이번 전시에서 주목하는 6명의 꿈꾸는 예술가들' 중 한 명입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로 활동하면서 많은 전시회를 디자인하고 기획했어요.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주도하면서는 공예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죠. 공방을 나온 이후에는 회화 작업도 남겼으니, 그야말로 장르의 경계 없이 만능으로 활동했던 예술가네요
콜로만 모저는 지금 보고 계시는 것과 같은 풍경화를 많이 그렸는데요,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여러 산을 그렸지만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어요. 노랗게 표현돈 하늘 아래로 몇 개의 선을 그려서 산맥을 구분하고, 열은 따란색과 어두운 색을 대비시켜서 구분했어요. 이런 단순한 구성과 색 대비는 일본 목판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우키요에 라고 부르는 일본 목판화가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간결하고 단순한 구성이 선명하고 풍부한 색감은 전통적인 원근법과 사실적 표현어 익숙했던 유럽 사람들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일본 미술이 비엔나에서 새로운 표현을 탐구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빛과 색의 마법, 모저의 꽃 그림
마리골드 콜로만 모저 (1868–1918) 1909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이끈 콜로만 모저는 다양한 재질의 공예품을 만들고 그래픽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 수공예와 장인 정신을 내걸었던 공방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자, 경영 방식에 대한 의견 충돌이 생겼고 결국 모저는 1907년 디자인 공방을 떠났다. 그 뒤로 모저는 회화를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특히 하루 또는 계절에 따라 빛과 색이 달라지는 장면을 담은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이후에는 강렬한 색채를 띠는 정물과 꽃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동굴 속의 비너스
콜로만 모저 (1868–1918) 1914년경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동굴의 둥근 공간에서 비너스가 베일을 쓰고 나오는 장면을 그렸다. 비너스의 몸은 밝은 부분에서는 노란색을, 어두운 부분에서는 옅은 보라색을 띤다. 모저는 비너스뿐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베일, 바위, 꽃다발 등에 흔히 쓰지 않는 색을 혼합해 사용했다. 그는 독특한 색채 대비와 상징으로 고전적 주제인 그리스·로마 신화를 새롭게 재해석했다. 1914년 무렵 모저 화풍의 변화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하겐 클럽과 알빈 에거-리엔츠
비엔나 분리파의 예술가들 중 일부는 하겐 클럽에 속했습니다. 이들은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공예보다 회화와 같은 순수 미술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사실적으로 자연을 묘사하면서도 차분하고 정돈된 분위기로 오스트리아의 풍경이나 풍속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알빈 에거-리엔츠는 1900년까지 하겐 클럽에 소속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농민, 노동자 등 서민의 삶을 담은 풍경을 많이 그렸습니다. 극단적으로 감정을 표출했던 표현주의 작가들과 달리 무게감 있고 따뜻한 정서로 오스트리아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깊은 숲 (<아베>를 위한 습작)
알빈 에거-리엔츠 (1868–1926) 1895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희미한 빛이 어린 울창한 숲속에 침엽수가 높이 뻗어 있다. 햇빛이 스며들고는 있지만 땅에 닿지 못하기에 차가움이 느껴진다. 빠르고 자유로운 붓질로 나무 아래 우거진 덤불을 표현했다.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뾰족하게 갈라진 나뭇가지다. 앞쪽에는 밝은 색을, 뒤쪽으로 갈수록 어두운 색을 두껍게 칠해 깊이감을 주면서 햇빛이 스며드는 느낌을 나타냈다. 이 작품은 1809년 베르기젤 전투 이후 티롤 민병대가 기도하는 장면을 묘사한 <베르기젤 전투 이후의 아베 마리아>의 배경을 위한 습작이다.
이상하게 이 그림도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장에서 마음을 흔들었던 작품 중 하나.
점심 식사 (<수프> 두 번째 그림)
알빈 에거-리엔츠 (1868–1926) 1910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분리파의 한 축을 이루었던 그룹은 회화나드로잉이 공예보다 수준이 높다고 생각한 하겐 클럽사람들이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를 중심으로 한 그룹이탈퇴한 후에도, 이들은 계속 전시회를 열고 활동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생활상이나 풍경을 차분하고 따뜻한정서로 다뤘던 알빈 에거-리엔츠라는 화가가 그러한 부류에속합니다.
사람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분위기는 침착하고 평온하며, 사람들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합니다.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어 따뜻한 분위기가 전해집니다.에거-리엔츠는 농부들의 일상을 무게감 있게 그렸는데요, 같은 주제로만 무려 25점이나 되는 그림을 남겼다고 합니요. 그만큼 이런 주제에 대해서 깊이 탐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실에서 2실로 2부에서 3부로
전시장 중간에 있는 공간에서는 이번 전시회관련 멀티미지디어 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과 에곤실레 작품을 대형 현수막으로 출력한 포토월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3부. 일상을 예술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탄생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동료들은 공예도 예술과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하며, 일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예술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에서는 회화, 공예, 조각, 포스터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였고, 예술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대중에게 알렸습니다. 1903년 콜로만 모저와 요제프 호프만은 일상의 물건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설립했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초기 디자인은 19세기 말 유럽에서 유행한 장식 미술과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곡선 형태가 두드러졌습니다. 그러나 곧 기능성과 미학의 조화를 강조한 영국 *예술공예운동의 영향으로 기하학적 단순함을 중시하는 디자인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들의 철학은 이후 기능주의를 추구하며 설립된 예술학교 **바우하우스를 비롯해 여러 방면의 디자이너와 건축가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판된 이 책의 제목은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03-1928’이다. 공방과 관련된 많은 사진 자료를 포함하고 있으며, 글은 여러 가지 언어로 쓰여졌다. 이 책의 제작에는 세 명의 예술가가 참여했는데 그 중 마틸데 플뢰글의 경우 책에 수록될 사진 자료와 글을 선정했고 전반적인 디자인을 담당했다. 책에는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활동한 주요 예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공방의 역사와 성과를 담았다.
연하장 엽서
디자인: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 (1893–1971) 제작: 비엔나 디자인 공방
연대 모름 카드보드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는 새해, 부활절,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날을 위한 엽서도 디자인을 했습니다. 여기, 붉은 옷을 입은 광대가 꽃다발에 둘러싸인 돼지를 들고 있는 장면이 보이시나요? 우리나라에서도 돼지꿈을 꾸면 그날은 복권을 사야한다는 말이 있죠.
전통적으로 돼지는 복을 상징하는데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에서도 돼지는 행운을 나타내는 동물이라고 해요. 특히 새해 연하장에 시용될 때는 풍요로움과 부유함을 나타내는 동물로 쓰여서, 새해에 행운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엽서 위에 쓰인 것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문구입니다. 그러니까 이 엽서는 새해 연하장이에요. 광대는 새해를 갖이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어요.
하얀색 바탕에 동글동글한 장식이 들어간 주황색 줄무늬 디자인이 너무 매력적이에요. 총 16점으로 이루어진 이 도자기 식기 세트는 여러 예술가들의 협업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선 식기 세트의 모양은 콜로만 모저가 디자인을 했고, 주황색 장식은 콜로만 모저의 제자였던 유타 지카가 맡았습니다. 그리고 도자기 제작은 도자기 공방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비엔나 도자기 제작소'에서 만들었습니다.
1부에서 설명했던 '총체예술`기억하시나요? 베토벤 전시회처럼 회화, 조각, 음악, 디자인 등 예술의 여러 요소들이 어우러져 관람객에게 특별한 감상을 선사한다는 개념인데요, 일상과 예술을 통합하고, 이를 위해 모든 예술가들이 힘을 합치는 것, 이것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이 추구했던 '총체예술'의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06년 도예가이자 조각가인 미하엘 포볼니는 그래픽 디자이너 베르톨트 뢰플러와 함께 ‘비엔나 도예 공방’을 설립했다. 이들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미학과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함께 협력하기도 했다. 정수리 부분을 깎은 수도승 특유의 머리와 깡마른 얼굴, 움푹 들어간 눈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머리와 얼굴을 감싼 검은색 두건이 얼굴을 돋보이게 한다. 포볼니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표현하고자 했다. 수도승은 언젠가 맞이할 죽음을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잠긴 듯하다.
손가방
디자인: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1893–1971) 제작: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29년 천 에른스트 플로일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활동한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는 섬유, 금속, 도자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디자이너로 두각을 드러냈다. 리카르츠-슈트라우스는 독특한 기하학적 무늬와 밝고 대조적인 색채의 조합으로 장식미술과 일상 용품을 결합했고, 1920년대 비엔나 디자인 공방을 이끌었다. 이 가방은 일상생활에서 가볍게 들기 좋은 크기로 만들어졌다. 다양한 색의 동그라미 장식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형태로 표현했다.
가죽 공방의 성과, 세련된 디자인
디자인: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1893–1971) 마틸데 플뢰글 (1893–1958)
제작: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29년 염색한 가죽 에른스트 플로일
1912년 디자이너 마리아 리카르츠-슈트라우스는 열아홉 살 이른 나이로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첫 작품을 만들었다. 1920년대에는 꽃 등 식물무늬를 활용해 직물을 만들던 당대 예술가들과 달리 기하학적 구성과 대담한 색채로 눈에 띄는 독특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크리스털 식기 세트, 메테오르 100번
네 개의 와인잔 디자인: 콜로만 모저 (1868–1918)
제작: 마이어스 네페 (바칼로비츠 & 죄네 의뢰) 1899년 주조 유리 레오폴트미술관
콜로만 모저는 일상과 예술을 통합하는 철학을 실천한 디자이너였다. 모저는 다양한 모양과 색을 활용한 유리 공예품을 섬세하게 디자인했다. 이 작품들 역시 모저가 디자인하고, ‘바칼로비츠 & 죄네’ 회사가 보헤미아의 유리 공방 ‘마이어스 네페’에 제작을 의뢰해 만들었다. 기하학적 무늬를 잘 살린 모저 특유의 디자인을 보여 준다. 특히 유리를 성형할 때 만든 동그란 무늬가 마치 물 밖으로 떠오르는 공기 방울을 보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만든 다양한 작품들로 가득한 공간에 오셨습니다. 1903년 설립된 비엔나 디자인 공방은 일상적인 용품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는 철학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전시된 공예품들은 당시 일상에서 쓰이던 것들입니다.요즘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로 참 예쁘고 멋지죠? 몇 개는 집에 갖다 놓고 싶을 정도인데요?
콜로만 모저는 비엔나 디자인 공방 설립을 주도하면서 디자이너로서 영역을 넓히기 시작합니다. 특히 공방은 디자이너, 제작사 그리고 판매사 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모저는 공 모양의 꽃병에 강렬한 색채로 식물무늬|에서 영감을 받은 독특한 디자인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디자인은 비엔나에서 활동하던 도자기 및 유리 공방에서 꽃병으로 제작됐고,'바칼로비츠와 쇠네' 회사에서 판매했습니다. 이렇게 예술가와 제작사 간의 분업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수준 높은 공예품들을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요제프 호프만
요제프 호프만은 기능주의 미학을 강조한 오스트리아 건축가 오토 바그너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비엔나 분리파에서 개최한 많은 전시회를 디자인했는데, 초기에는 장식 미술에 바탕을 둔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영국 예술공예운동이 추구하는 간결하고 단순한 디자인에 매료되었고, ‘정사각 호프만’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기하학적인 디자인에 빠져듭니다.
요제프 호프만은 일상생활 속 물건에 예술적 가치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공간의 모든 요소를 일정한 디자인으로 통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특히 창문, 문, 가구, 식기 세트 등을 모두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디자인했습니다. 이는 모든 요소를 통합하여 최상의 디자인 효과를 내고자 했던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총체예술’이었습니다.
안락의자 721번
비엔나 전신국을 위한 디자인 디자인: 오토 바그너 (1841–1918) 제작: 야코프 & 요제프 콘 1902년경
굽은 목재, 너도밤나무에 칠, 합판 레오폴트미술관
오스트리아의 건축가이자 이론가로 유명한 오토 바그너가 디자인한 의자입니다. 오토 바그너는 기능적이고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움까지 담을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했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설립자 콜로만 모저외 요제프 호프만 역시 오토 바그너의 제자였습니다. 이들은 스승의 철학을 따라 장식적이면서도 기능성 좋은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이 의자는 오토 바그너가 비엔나의 전신국 사무실을 위해 디자인한 것입니다. 팔걸이와 등받이를 하나의 나무로 만든게 보이시나요? 나무에 수증기를 쐬어 부드럽게 만든 후 원하는 모양으로 구부려 곡선을 표현한 것입니다
꽃장식 테이블, M436번
디자인: 요제프 호프만 (1870–1956) 제작: 비엔나 디자인 공방 1905년경 철판에 아연 도금 후 칠 레오폴트미술관
하양고 깔끔한 꽃장식 테이블을 디자인한 사람은 비엔니 디자인 공방의 설립을 주도한 요제프 호프만입니다 요제프 호프만은 구스타프 클림트와 함께 비엔나 분리파를 창립했고,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이 있는 디자인을 추구했습니다.
이 테이블이 어떤 무늬로 가득 차 있는지 보이시나요? 바로 정사각형입니다. 요제프 호프만은 '정사각 호프만'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정사각형이 가장 완전한 형태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서 있는 바닥, 주변의 여러 작품들에서도 정사각형이 많이 보이실 거에요 요제프 호프만은 아름다움과 기능이 조화로운 수공예의 가치를 강조한 영국의 예술공예운동에 영향을 받아 정사각형에 매료되었습니다.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구성 속에 아름다움을 표현한 호프만의 디자인은 이후 많은 디자이너와 건축가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엔나 디자인 공방의 많은 금속 공예품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다시 유행한 고전적인 공예 제작 방식을 따랐다. 바로 금속을 고온에서 녹이지 않고 실온에서 물리적인 힘을 가해 성형하거나 가공하는 방식인데, 재료 본연의 성질은 유지하면서도 모양을 변형할 수 있었다. 이 바구니 역시 실온에서 가공한 뒤 표면에 구멍을 뚫어 만든 것으로, 복잡하고 섬세한 기하학적 장식을 조화롭게 배치했다.
4부 강렬한 감정, 표현주의의 개척자들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불만이 많았던 에곤 실레는 1907년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난 뒤로 예술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클림트는 실레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았고, 그를 주변에 소개하고 후원을 받게 함으로써 독립적인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둔 실레는 동료들을 모아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신예술가그룹’을 결성했습니다. 개인의 감정을 색채와 형태로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한 신예술가그룹 화가들은 비엔나 예술계를 모더니즘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자유롭게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개척하며 비엔나 예술계에 세대교체의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과장된 꽃과 장식적 배경
에곤 실레 (1890–1918) 1908년 캔버스에 유화, 금색과 은색 안료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가 구스타프 클림트를 처음 만났던 1907년, 실레는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의 학생이었습니다. 클림트는 단번에 에곤 실레의 재능을 알아보았죠. 그가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도록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게 하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게 소개해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스승이자 멘토와 같은 존재가 된 것이죠. 마침 에곤실레는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지쳐 있었습니다. 결국 에곤 실레는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료 예술가들을 모아서 신예술가그룹'을 만들었어요. 신예술가그룹은 비록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인물의 감정을 미술로 나타내는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여주면서, 비엔나 예술계에 세다 교체를 알렸습니다.
이것은 10년 전, 구스타프 클림트가 비엔나 분리파를 만들었을 때를 상기시켜 주네요.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 평행 이론일까요? 주황색 꽃으로 장식된 보라색 식물은 정사각형의 화폭에 그려졌습니다. 식물의 배경은 금색과 은색 안료로 장식되어있어 화려합니다. 클림트의 영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에곤 실레의 화풍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화
1910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구스타프 클림트는 에곤 실레가 자신만의 예술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스승이었다. 당시 클림트와 실레의 특별한 관계를 눈여겨본 사람들은 실레에게 ‘은색의 클림트’, ‘충실한 추종자’와 같은 별명을 붙여 주기도 했다. 섬세하게 그려진 하얀색 국화는 비엔나 분리파가 지향한 장식 미술의 영향을 보여 준다. 공간감 없는 검은색 배경과 대조를 이루는 국화의 구성에서 19세기 유럽에서 크게 유행한 자포니즘과 일본 목판화의 특징이 엿보인다.
소년과 큐피드
안톤 콜리히 (1886–1950)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한 소년이 벽에 기대 서 있습니다. 사실 소년이라고 하기엔 어른에 가까운 건장한 신체와 큰 발을 가지고 있는데요. 어딘가 부끄럽고 어색한 모습입니다. 소년의 옆에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사랑의 신으로 나오는 큐피드가 긴 창을 들고 있습니다. 즉, 육체적 변화를 겪으며 사랑을 알게되는, 그야말로 성장 중인 소년을 표현했네요 이 작품을 그린 안톤 콜리히는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서 에곤 실레와 만났고, 신예술가그룹으로 활동했습니다.
콜리히와 신예술가그룹 예술가들은 1911년 작품을 출품했고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겐 클럽은 젊은 예술가들이 새롭게 추구하기 시작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지지하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전시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여성의 초상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 (1887–1973) 1914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머리가 헝클어진 여인이 무심한 듯 평온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흰 블라우스에 값비싼 진주 목걸이를 한 이 여인은 부유한 후원자로 추정된다. 인물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며 감정을 담아냈다. 이 작품을 그린 알베르트 파리스 귀터슬로는 배우이자 극작가였지만, 1910년대 초반 파리에서 미술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야수파를 비롯한 최신 예술 동향을 접한 뒤로 화가로 전향했다. 귀터슬로는 신예술가 그룹에서 에곤 실레, 안톤 파이슈타우어 같은 예술가들과 함께 활동했다.
푸른 옷을 입은 소녀
로빈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1890–1969) 1913/14년경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한 소녀가 허름한 벽 앞에 앉아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양팔을 맞잡은 자세는 고민에 빠져 있는 소녀의 복잡한 심경을 보여줍니다. 어두운 표정과 눈 주변이 붉어져 있는 것을 보니, 금방이라도 운 것 같습니다.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있으니, 소녀의 슬픈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을 그린 로빈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에곤 실레와 함께 신예술가그룹을 만드는 데 함께했습니다. 이렇게 인물의 감정을 차갑게 가라앉은 색채로 그린 것은 20세기 초 나타난 표현주의적 경향입니다. 함께 전시된 신예술가그룹 작가들의 작품을 한번 둘러보세요. 인물화를 그릴 때 그 인물의 감정을 표현해내고자 했습니다.
조용한 여성 (화가 어머니의 초상)
안톤 콜리히 (1886–1950) 1909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안톤 콜리히는 1911년 친분이 있던 예술가 단체 하겐 클럽의 전시장에서 열린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 아홉 점을 출품했다. 하겐 클럽은 젊은 예술가들이 새롭게 추구하던 표현주의 예술을 지지하고 그들의 혁신적인 작품을 전시했다. 이 전시회로 신예술가 그룹은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콜리히가 당시 출품했던 아홉 점 중 하나인 이 작품은 어머니의 초상화다. 어두운 옷을 입은 화가 어머니의 모습이 밝게 빛나는 배경에서 돋보이며 실루엣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조명이 가끔씩 작품 감상을 방해한다. 얼굴 자세히 감상 하세요.
오스카 코코슈카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표현주의 경향의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던 오스카 코코슈카는 1900년대 비엔나 예술가들의 초상화가이자 작가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클림트의 초청으로 참여한 ‘비엔나 예술 전람회’(1908)에서 코코슈카는 ‘야수 중의 야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거칠고 과감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코코슈카는 인물화에서 단순한 외형 묘사를 넘어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했습니다. 특히 폭발하는 듯한 색채와 왜곡된 형태로 1차 세계대전으로 불안해진 인간의 심리를 묘사했습니다. 미술뿐 아니라 연극, 문학 등 장르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실험으로 대중의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를 이끈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소녀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05/06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가 비엔나 예술공예학교의 학생 시절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옷을 입지 않은 어린 소녀가 벽에 기대어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다. 다양한 갈색을 조화롭게 사용했으며, 코코슈카 특유의 표현주의 화풍이 드러나기 이전 전통 화법을 보여 준다.
목화솜 따는 소녀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08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요제프 호프만의 제안으로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의 포스터를 디자인했다. 직선적이고 단순한 윤곽선, 음영이 없는 색면의 사용, 두꺼운 서체 등은 비엔나 분리파가 만든 포스터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 준다. 이 포스터는 루돌프 칼바흐가 디자인한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의 또 다른 포스터와 매우 비슷한 양식이다. 코코슈카와 칼바흐는 비슷한 시기에 비엔나 예술공예학교에서 공부했으므로 동료로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피에타
연극 <살인자, 여성들의 희망>을 위한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09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공포영화와 같은 이 충격적인 그림은 오스카 코코슈카가 직접 극본을 쓴 연극'살인자, 여성들의 희망'의 홍보 포스터입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이런 포스터를 그린 걸까요? 이 연극은 남자와 여자의 파괴적인 사랑과 갈등을 주제로 합니다. 강렬하고 파괴적으로 과장된 포스터는 남녀 관계의 고통스러움과 혼란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스카 코코슈카는 이번 전시가 주목하는 '6명의 꿈꾸는 계술가들'중 네 번째로 만나볼 인물입니다. 그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교류하며 비엔나 디자인 공방에서 작업하기도 했지만, 곧 자신의 색깔을 찾아 표현주의적 경향을 드러내는 작품을 하게 됩니다. 코코슈카는 클림트의 초청으로 1908년 비엔나 예술전람회에서 데뷔했고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내면의 심리를 파고드는 독특한 표현법이 돋보이는 인물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극 문학 등 장르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실험으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지평을 넓힌 개척자였습니다
"얼굴 인식" 강연을 위한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1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방금 전에 보신 파괴적인 사랑과 갈등을 그린 연극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예상하셨겠지만 정말 끔찍했습니다. 급기야 오스카 코코슈카에게는 '문제아'라는 별명도 붙었어요. 그리고 몇 년 후 코코슈카는 강연에서 얼굴이 단순히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영혼을 담아내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어요. 전통적인 초상화는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만 코슈카는 변화무쌍한 감정과 영혼을 포착해 그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이 작품은 그 강연의 홍보 포스터입니다. 이런 코코슈카의 생각은 강연을 듣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불쾌감을 주었습니다. 영혼을 그림으로 그린다니, 심령술사가 할 법한 이야기로 들렸던 것 같아요. 포스터의 남자는 코코슈카 자신을 그린 것입니다. 얼굴로 영혼을 그려낸다고 했으니, 한번 볼까요? 자글자글한 주름과 움뚝 팬 눈으로 그려진 코코슈카의 얼굴은 고통 받는 영혼 그 자체 같네요. 코코슈카는 자신이 비엔나 예술계에서 느낀 고립감을 이렇게 자화상으로 표현했습니다.
양쪽에서 본 화가의 자화상
취리히 볼프스베르크에서 열린 코코슈카 전시회를 위한 포스터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23년 종이에 다색 석판화 레오폴트미술관
오스카 코코슈카는 1923년 가을, 취리히의 갤러리 볼프스베르크에서 열린 자신의 단독 전시회 포스터로 같은 해에 그린 자화상을 활용했다. 왼손에 붓을 들고 관람자를 쳐다보는 그림 속 인물은 예술가이자 개인전을 개최하는 주인공인 코코슈카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이 개인전은 코코슈카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넘어 국제적인 예술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코코슈카 작품느낌 너무 좋다.
헤르만 슈바르츠발트 II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6년 캔버스에 유화 브로에르 자선 재단
이 작품의 주인공 헤르만 슈바르츠발트는 아내와 함꼐 오스트리아의 젊은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들 부부의 아파트는 비엔나 건축가 아돌프 로스가 디자인했고, 오스카 코코슈카나 에곤 실레 등 표현주의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이들을 재정적으로도 후원하고 작품을 발표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스카 코코슈카는 헤르만의 초상화를 2번 그렸습니다.이 작품을 보시면 헤르만이 입은 옷과 뒷배경이 거의 비슷한 색으로 그려져 헤르만의 얼굴과 손에 시선이 집중됩니다. 얼굴의 주름과 혈관, 과장된 손가락과 손의 크기는 헤르만의 성격과 내면을 표현하고자 한 코코슈카의 독특한 기법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헤르만의 성격이 어때 보이시나요?
빅토어 리터 폰 바우어
오스카 코코슈카 (1886–1980) 1914년 캔버스에 유화 브로에르 자선 재단
1914년 무렵 오스카 코코슈카는 넓은 붓을 이용해 물감을 두껍고 대담하게 칠했다. 이 작품에서는 어두운 녹청색 배경에 짙은 녹색 양복을 입고 있어 그림 속 주인공의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코코슈카는 날카로운 선으로 얼굴 표정을 그렸으며, 얼굴과 마찬가지로 손도 돋보이게 표현했다. 산업가이자 예술 후원자였던 폰 바우어는 혁신적인 건축가 아돌프 로스와 친분이 있었다. 당시 코코슈카의 후견인이던 로스가 자연스럽게 폰 바우어에게 코코슈카를 소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화상
막스 오펜하이머 (1885–1954)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비슷한 색감의 뒷배경으로 얼굴과 손을 강조한 것은 앞서 보았던 코코슈카의 인물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작품은 막스 오펜하이머의 자화상입니다.오펜하이머와 코코슈카는 비슷한 시기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으며, 동료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림 속 오펜하이머는 미간을 찡그린 의심 많은 눈빛으로 우리의 시선을 살짝 피하고 있네요. 길게 왜곡되고 칼라비틀어진 것 같은 오펜하이머의 손은 마치 고통스러운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자화상은 오펜하이머가 주요 전시회에 모두 출품했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오펜하이머는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독일과 스위스에서도 활동하며 인물화로 새로운 예술적 경향을 탐구했습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 2관에는 사진과 같이 앉아서 휴식과 함께 작품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대략 여기까지 한 시간 반이 조금 덜 걸렸는데요.
휴식하면서 다음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에너지를 모아보는 것도...
리하르트 게르스틀
리하르트 게르스틀은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보다 훨씬 앞서서 표현주의의 길을 개척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웠지만 전통적인 화법을 거의 구사하지 않았고, 거칠고 자유로운 붓놀림과 과감한 색채로 인물을 표현했습니다. 독자적으로 활동한 게르스틀은 시대에 앞선 예술 양식을 선보였습니다. 게르스틀은 20세기 초 현대 음악의 창시자인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깊이 교류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음악가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예술적 실험과 도전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게르스틀이 후기에 그린 초상화들은 세부 묘사 없이 인물의 형태만 남긴 추상화에 가까웠습니다. 그의 실험적인 작품들은 당시에는 예술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새롭고 독창적인 화법으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문을 연 선구자였습니다.
스마라그다 베르크
리하르트 게르스틀 (1883–1908) 1906/07년 캔버스에 유화 개인 소장
섞지 않고 점을 찍어 표현하는 점묘법을 활용했는데, 도란색과 보라색이 주로 사용됐습니다. 게르스틀이 그린 이 여인은 피아니스트 스마라그다 베르크로, 20세기 초 표현주의 음악가로 유명한 알반 베르크의 여동생입니다.
알반 베르크는 리하르트 게르스틀과 함께 어울렸던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친구들 중 하나입니다. 아르놀트쇤베르크는 12음기법이라는 새로운 작곡 방식을 만드는 등현대 음악의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게르스틀은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던 음악가들과어울리며 예술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잔잔한 인물화는 게르스틀의 초기 양식을 보여줍니다
반신 누드의 자화상
리하르트 게르스틀 (1883–1908) 1902/04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침착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남자의 머리 주변은 밝은 색으로 그려져 마치 후광이 빛나는 것 같습니다. 손과 같은 신체의 다른 부분은 비교적 간단하게 그려졌지만, 얼굴만큼은 깊은 인상을 남길 만큼 강렬합니다. 남자의 시선은 우리를 향하는 것 같지만, 우리 너머의 더 먼 곳을 응시하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림 속 이 남자는 리하르트 게르스틀입니다. 그는 현재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표현주의자이지만,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보다 앞섭니다 그는 1908년, 25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게르스틀은 비엔나 분리파와 같은 단체에 속하지 않았지만 거칠고 자유로운 붓놀림과 과감한 색채로 자신만의 표현방식을 찾아나갔습니다. 그의 후기작들은 세부 묘사 없이 형상만을 남겨 추상화에 가까웠을 정도였습니다.
게르스틀은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지만, 시대를 앞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새로운 문을 열었다고 평가됩니다
5부. 선의 파격, 젊은 천재 화가의 예술 세계
20세의 어린 나이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확립한 에곤 실레는 1900년 비엔나의 표현주의 선구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의 예술 인생은 짧았지만 인간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독창성은 모더니즘 예술의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됩니다. 특히 에곤 실레는 자아 정체성, 고독, 욕망 등 심리적이고 실존적인 주제를 자신만의 선과 색으로 담아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혼자라는 두려움과 고독감, 한없이 불안한 마음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내면의 고통과 갈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에 표현했습니다. 이제 누구보다 솔직하게 인간을 탐구하고 그려냈던 예술가, 에곤 실레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의 가장 대표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입니다. 아마도 유일하게 긴 줄을 서야만 작품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패널에 유화 물감과 불투명한 물감 레오폴트미술관
6명의 꿈꾸는 예술가들' 중 마지막으로 만나볼 인물은 바로 에곤 실레입니다. 그는 '인간'에 대해 가장 솔직하게 접근한 예술가입니다. 에곤 실레는 죽음에 대한 공포,고독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과 같은 인간의 감정을 자신만의 선과 색으로 표현했는데요, 이제부터 그가 그려낸 작품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에곤 실레는 20세기 초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그 어떤 화가보다도 자신의 얼굴과 몸, 그리고 성격에 대해 깊이 탐구했습니다. 그가 남긴 100점이 넘는 자화상과 4천점이 넘는 밑그림에서 그가 얼마나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자화상에서 그는 깔끔한 흰색을 배경으로 검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실레의 옆에는 꽈리 열매가 강렬한 붉은 색으로 그려져 좌우의 균형과 조화로움을 유지합니다. 에곤 실레는 어깨를 비틀고 우리는 살짝 내려다보고 있네요. 그의 전성기에 그려진 만큼, 예술가로서의 자신감이 눈빛으로 드러납니다. 끊어질 듯 섬세하게 이어지는 선의 표현은 그만의 독창적인 특징입니다. 그의 예민한 성격과 예술가로서의 완벽주의도 잘 드러납니다
소녀의 초상
에곤 실레 (1890–1918) 1906년 종이에 검은 분필과 목탄 레오폴트미술관
1906년, 열여섯 살의 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최고의 미술 학교인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러나 엄격하고 보수적인 체제와 교수법에 반발해 1909년 아카데미를 그만둔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던 해에 그린 이 작품은 그가 드로잉에 얼마나 뛰어난 재능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긴 머리를 한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1907년 캔버스에 유화 E. 와 H. H. 컬렉션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는 에곤 실레의 자화상이다. 강한 빛을 받아 밝게 표현된 왼쪽 얼굴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빛은 실레의 이마, 뺨, 턱으로 쏟아지며 얼굴의 특징을 매우 섬세하고 정확하게 드러낸다. 다양한 채도의 갈색과 보라색으로 칠해진 머리카락은 개성 있고 생동감이 넘친다. 이 자화상은 실레 자신을 깊이 있게 표현하면서도 내면의 강렬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에곤 실레
철도회사 역장이었던 에곤 실레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랐지만, 실레는 두 살 때부터 색연필과 종이를 잡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실레는 삼촌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삼촌의 도움으로 비엔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교육 방식에 실망했고, 평생 스승으로 믿고 따랐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원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합니다.
실레는 클림트의 초청으로 참여한 전시회에서 유럽 거장들의 작품 세계를 접했습니다. 초기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지만 곧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인물을 표현하는 실레의 독특한 선과 뒤틀린 몸은 곧 그의 화풍으로 자리 잡았고 비엔나 예술계에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존재에 대한 고민을 자신만의 선과 색채로 풀어낸 방식은 에곤 실레를 세기 전환기의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스스로를 보는 이 II (죽음과 인간)
에곤 실레 (1890–1918)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 자신을 경영 잃어버리고야 말 것 같은 '정체성의 위기'를 깊이 탐구했습니다. 그는 정말, 불안하고 나약한 사람이었을까요? 그림 속 인물은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다른 나'의 유령 같은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속 주인공은 원래 나눠질 수 없는 자아가 분리되어 불안정한 상태에 있습니다. 창백하게 표현된 유령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유령이 주인공의 어깨를 감싸고 있어, 공포에 떨고 있는 것 같아요. 실레는 어두운 색깔과 날카로운 선으로 주인공이 느끼는 고통과 불안감을 생생하게 표현했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아래에서 올라온 매우 크게 그려진 손인데요, 처음에는 주인공의 손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이 손은 주인공의 것도, 유령의 것도 아닙니다. 게곤 실레에게 손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술가에게 손은 가장 기본적인 표현의 도구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더없어서는 안 될 '나 자신, 그 자체'입니다. 정체성의 위기와 죽음을 앞둔 공포, 에곤 실레는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던 걸까요? 죽음으로써 예술가의 삶이 끝나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요?
계시
에곤 실레 (1890–1918)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거의 남기지 않았지만, 이 작품에 대해서는 편지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어요. 그만큼 애정이 컸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편지의 내용을 읽어 드릴께요. 작품에 담긴 의도를 찬찬히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위대한 인물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이 작품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림은 스스로 빛을 발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의 빛을 평생 소비하며 살아간다. 빛이 모두 소진되면 그들은 더 이상 빛나지 못하게 된다. 뒤돌아선 사람은 위대한 인물에 매혹되었다. 그는 눈을 뜨지 않고도 세상을 보는 위대한 존재들에게 무릎을 끓고 경의를 표하고 있다. 위대한 존재가 발하는 빛은 다양하고 신비로운 색으로 표현됐다. 무릎을 끓은 작은 사람은 크게 빛나는 위대한 존재와 합쳐져 하나가 되고 있다. 이것이 내가 그린 그림 <계시>에 대한 설명이다.
예술가라는 ‘자아 정체성’의 위기
에곤 실레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레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뒤틀린 몸과 해골 같은 얼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선은 인간의 죽음, 예술가라는 정체성이 끝나버리는 순간에 대한 불안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실레는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겼을 정도로 자신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자기 몸을 거울에 비춰 보며 다양한 자세와 구도를 연구했습니다. 실레의 자화상은 자신의 겉모습을 그린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술가라는 정체성을 탐구하기 위한 도구였으며, 에곤 실레만의 독특한 화법을 보여주는 주제였습니다.
뒤틀린 자세의 누드 자화상
장식이 있는 가운을 입은 누드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1909년 종이에 연필과 색분필 레오폴트미술관
한쪽으로 몸을 돌려 정확히 관람자를 바라보는 자화상이다. 실레의 작품에서 보이는 독특한 선의 표현은 인물의 연약함과 강렬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몸을 옆으로 돌린 채 어깨 너머로 정면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긴장감이 감돈다. 실레가 걸친 빨간 장식 가운이 팔에서 흘러내려 벗은 몸의 일부만을 가리고 있다. 배경을 비워 인물에게만 집중하게 만든 구도로 인해 실레의 독창적인 화풍과 강렬한 인체 표현이 더욱 돋보인다.
에곤실레를 위한 마지막 공간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 마지막 공간인 5부 공간은 에곤실레를 위한 공간 입니다. 이번 전시회를 주관하는 레오폴트미술관이 에곤 실레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5부에서 1~4부까지 아쉬웠던 부분이 한 번에 해결됩니다.
남성의 반신 누드 뒷모습
에곤 실레 (1890–1918) 1910년 종이에 검은 분필과 불투명 수채 레오폴트미술관
1910년 무렵 에곤 실레는 누드와 자화상을 중심으로 작업했고 훨씬 성숙한 표현주의 화법을 선보였다. 실레는 자화상을 그릴 때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 가며 자세를 연구했다. 이 반신 누드의 남성 역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빠르고 강한 선으로 그린 남성의 깡마른 몸은 과장된 비례와 비틀린 자세로 실레 특유의 인체 표현을 보여 준다. 빨간색, 파란색, 보라색으로 옅게 칠해진 몸과 굽은 손의 색감은 과장된 표현을 강조한다.
시인
에곤 실레 (1890–1918) 1911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밑그림 없이 빠른 붓질로 그린 이 작품에서 에곤 실레는 자신을 뒤틀린 자세를 한 시인으로 표현했다. 어색할 정도로 심하게 왼쪽으로 꺾여 있는 실레의 머리는 뒤쪽 흰색 공간에 둘러싸여 있다. 눈썹을 치켜뜬 의심에 찬 눈초리는 옆을 향하고 있다. 창백해 보이는 몸에 검은색 윗옷만을 걸친 실레는 어두운 배경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오른쪽 손목을 살짝 잡고 있는 왼손 아래로, 배꼽과 성기를 붉은색으로 그렸다.
어머니와 아이, 모성에 대한 갈망
1904년 새해 전날, 그의 아버지가 매독으로 사망한 후, 당시 14세였던 에곤 실레는 가정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실레의 어머니는 그가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정착하기를 바랐지만, 실레는 예술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실레는 어머니와 많은 갈등을 겪었고, 따뜻한 정서적 교감을 경험하지 못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실레는 어머니와 복잡한 관계를 형성했고, 동시에 여동생 게르트루드와의 친밀한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실레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와의 불안정한 관계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결합한 것입니다. 죽음은 실레의 예술 세계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습니다.
자화상
에곤 실레 (1890–1918) 재작업: 프리츠 보트루바 (1907–1975)
디자인: 1917년경, 재제작: 1965년 인조석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가 자기 얼굴을 조각한 매우 독특하고 유일한 자화상이다.
실레는 숱이 많은 머리를 뒤로 빗어 넘겼고, 고개를 살짝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하다. 조각에 관심이 많았던 실레는 오귀스트 로댕 같은 조각가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1917년 처음 만든 이 자화상 조각에 대한 실레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작품은 1965년 주조한 일곱 점의 청동 조각 가운데 하나다.
어머니와 두 아이
에곤 실레 (1890–1918) 1915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의 부모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15살 때 사망했고, 어머니는 미술을 배우고 싶은 실레를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에게 따뜻한 애정을 느껴보지 못한 실레는 불안한 관계에 있는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품에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피에타'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온몸을 녹색 천으로 감싼 어머니가 두 아이를 안고 있어, 에곤 실레가 '피에타'의 구도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외 아들의 얼굴은 죽은 듯 해골처럼 창백하게 그려졌고, 원작의 피에타'의 구도에 존재하지 않는 어린 아이가 공중에 떠 있습니다.이 어린 아이는 색색의 줄무늬 옷을 입고 죽은 듯한 어머니와 다른 아이를 절망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잘 지내고 싶었던 에곤 실레의 복잡한 감정들이 작품 곳곳에 표현돼 있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아이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패널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작은 크기의 화폭에 그려진 이 작품은 성화인 성모자상을 연상시킨다. 공간을 알아볼 수 없는 어두운 배경 앞에 어머니와 아이가 두꺼운 붓질로 그려져 있다. 두 사람의 머리는 서로 이어져 있는 듯하다. 어머니는 눈을 내리깔고 점잖은 표정으로 아이를 보고 있으나, 아이는 반짝이는 눈을 크게 뜨고 관람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이의 손은 어머니와 아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상징한다.
애도하는 여성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패널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어두운 천으로 머리를 감싼 여인의 얼굴과 창백한 피부는 마치 해골을 연상시킨다. 여인의 머리 뒤로 또 다른 인물의 얼굴이 살짝 드러난다. 눈썹을 치켜뜨고 입을 꼭 다문 채 관람자를 바라보는 또 다른 인물은 실레가 자신을 표현하던 방식과 비슷하다. 실레는 인물화에서 종종 두 개의 얼굴이나 다른 신체 부위를 사용해 인물 내면의 갈등, 분열된 정체성과 같은 어두운 감정을 드러냈다. 이러한 표현은 인간 심리를 깊이 탐구한 실레가 이중적인 감정이나 복잡한 내면을 다루던 방법이었다.
천을 두른 여성의 뒷모습
<개종 II>의 부분 에곤 실레 (1890–1918) 1913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이 작품의 원작인 <개종 Ⅱ>에는 가운데서 설교하는 인물을 열두 사람이 둘러싸고 있는 장면이 그려졌지만, 현재는 사라져 일부분만 남아 있다. 종교적 상징을 담은 <개종 II>는 인간 내면의 변화를 주제로 하여 영적 각성이나 내적 갈등을 표현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어깨에 천을 두른 여성의 비틀거리는 듯한 뒷모습에서 고독과 불안함이 느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 나무 (겨울나무)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캔버스에 연필과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바람에 휩쓸린 앙상한 나무가 하늘로 뻗어 있습니다. 꼭 나뭇가지가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잘 보면 나무의 기둥부분이 하늘과 같은 색으로 그려져 있습니다.마치 기둥을 잃은 나뭇가지가 바람이 몰아치는 하늘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듯합니다.고립된 외로움과 동시에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강렬한 생명력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전시회에 출품됐을 때, 한 미술사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의 죽어가는 자연이 가지는 특별한 분위기의 마법과 같다. 에곤 실레는 잎이 없는 앙상한 나못가지로 생명을 그렸다' 이렇듯 에곤 실레는 풍경화 속 자연을 인간이 느꼈을 법한 감정을 넣어 의인화하여 표현했습니다. 자서전과 같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실과 고립을 그린 검은 풍경화
에곤 실레는 마치 사람을 그리듯 도시와 자연 풍경에 감정을 담아냈습니다. 풍경은 예술가의 내면 심리와 감정을 나타내는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기묘하게 뒤틀리고 어두운 도시나 강변 풍경을 그린 작품들에서 우리는 실레의 고뇌와 시대적 불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실레는 인간의 상실감과 고립, 정서적 불안감을 검은 풍경화로 그렸습니다. 특히 자신이 보았던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유롭게 다시 조합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블타바강 가의 크루마우 (작은 마을 IV)
에곤 실레 (1890–1918) 1914년 캔버스에 유화, 검은 분필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시선으로 크루마우의 슐로스베르크 언덕 건너편 마을 풍경을 그렸다. 마을 집들을 노란색, 흰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으로 표현했는데, 실레가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그린 건물들에서는 깊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강물과 지붕은 대체로 어두워 실레가 도시 풍경에서 반복적으로 보여 준 고독과 소외감이 묻어난다.
작은마을 III
에곤 실레 (1890–1918) 1913년 캔버스에 유화,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색색의 집들이 빼곡하게 늘어선 곳 아래로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강물과 길, 집의 지붕이 모두 어두운 색으로 그려져 전반적으로 암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에곤 실레는 기묘하게 뒤틀린 검은 도시 속에 자신의 생각과 고민을 담아냈습니다. 그는 창의적이지 못한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안에서 고립된 자신이 느낀 불안감을 검은 도시 풍경화로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은 현재 체코의 체스키 크룸로프인 남부 보헤미아 지역의 중세 마을을 그린 것입니다. 실레는 이 지역에 살면서 여러 점의 도시 풍경화를 그렸지만, 마을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여러 곳에서 본 도시의 모습을 자유롭게 재조합하여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도시에서 머물며 느낀 소외감을 생명력을 잃은 죽은 도시처럼 검은색으로 그려낸 실레만의 표현법이 돋보입니다.
클림트와 실레의 누드 드로잉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는 각각 4,000장에 달하는 드로잉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중 많은 부분이 누드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누드를 표현한 방식과 목적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클림트는 누드 드로잉에서 여성의 몸에 담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습니다.
그의 드로잉은 섬세한 선과 세밀한 묘사가 특징인데 부드러운 곡선으로 여성의 매력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실레의 드로잉은 현실적이고 과감합니다. 그는 왜곡된 인체와 뒤틀린 자세를 날카로운 선으로 표현해 인간의 고독과 불안, 그 속에서 움트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도발적인 드로잉은 곧 실레 그림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회에서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공간 중 하나...
오른쪽에서 본 여성의 상반신 누드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916년경 일본 종이에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4천장에 달하는 드로잉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많은 작품이 누드일 정도였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흔히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의 중심어 성적 욕망이 있고, 이로 인해 정신적 갈등이 일어난다고 분석했습니다. 클림트와 실레는 인간의 본능을 예술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에로티시즘에 대한 접근 방식은 서로 달랐습니다. 클림트의 드로잉을 보시면, 독특한 코, 도톰한 아랫입술 우울한 분위기의 눈 등 섬세한 얼굴 표현이 돋보입니다. 클림트는 여성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그려냈습니다. 그는 여성의 매력을 표현하면서도 장식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아름답고 환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하죠. 클림트가 보여주는 드로잉은 섬세하면서 절제된 표현이 특징입니다
왼쪽에서 본, 다리를 올리고 있는 여성의 반신 누드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1917년 일본 종이에 인도 잉크 레오폴트미술관
클림트는 여인이 침대에 푹 파묻힌 느낌을 주기 위해 길고 날씬한 비율을 강조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정리된 윤곽선 대신 불규칙하게 겹친 선들을 사용하여 불안한 느낌을 준다. 거칠게 떨리는 선은 익숙하지 않은 펜과 잉크로 그렸기 때문이지만, 클림트의 후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특히 이 작품은 형태를 간략하게 암시하듯 그리면서 그 안에 담긴 감정을 드러낸 클림트 말년의 경향을 잘 보여 준다.
클림트의 누드 스케치를 감상했다면, 반대편 공간은 에곤 실레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같은 듯 전혀 다른...
팔이 올라간 여성의 누드
에곤 실레 (1890–1918) 1910년 종이에 검은 분필 레오폴트미술관
이 그림은 여성의 머리, 팔, 몸통을 본 대로 빠르게 스케치한 듯하지만, 양팔의 평행선이 방해받지 않도록 턱 부분을 생략하는 등 실레가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곳 위주로 그려졌다. 실레의 초기 작품들은 장식적인 표현을 추구했으나, 이 시기에는 몸의 구조에 집중했다. 팔과 몸통의 윤곽선이 해부학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팔을 들어 올린 몸의 안정적인 구조에 중점을 두고 표현했다.
올라간 속옷을 입고 누워 있는 여성의 누드
에곤 실레 (1890–1918) 1915년 종이에 연필 레오폴트미술관
이 작품에서 실레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와 선으로 인체를 표현했다. 이러한 방식을 시도한 시기는 짧았지만 실레는 독특한 양식을 보여 준다. 이 작품에서는 여인의 말려 올라간 속옷을 아무렇게나 낙서하듯 그렸다. 모델의 머리는 소용돌이 같은 선으로, 얼굴은 반원 등 간략한 선으로 그려 마치 인형을 보는 듯하다.
이 그림을 그리던 1915년 무렵, 실레는 개성 있는 얼굴 대신 개인의 특징을 생략한 기하학적 형태로 인물을 표현했다. 실레의 특징이던 ‘말하는 듯한 눈’도 텅 빈 구멍처럼 묘사했다.
파란 스타킹을 신고 앞으로 몸을 숙인 누드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종이에 연필과 불투명 수채 레오폴트미술관
이 작품을 보면, 척추와 근육이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마른 여성이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있습니다. 몸을 표현한 섬세한 선과 부분적으로 칠해진 색은 이 여성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매우 힘들어 보이지만, 섬세한 구도로 안정적인 자세를 만들어낸 것이 신기하네요. 그만큼 이 여인이 느끼고 있는 고통과 고뇌를 표현하기 위한 실레의 고민이 느껴집니다.
회색 망토를 두르고 무릎을 꿇은 여성 (발리 노이칠)
에곤 실레 (1890–1918) 1912년 종이에 검은 분필, 수채, 불투명 수채 레오폴트미술관
이 여인은 에곤 실레의 연인이었던 발리 노이칠입니다. 그녀는 에곤 실레의 모델이었고 그의 많은 작품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실레의 작품에 나오는 붉은 머리의 여성은 대부분 발리를 모델로 한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수줍은 듯 당찬 얼굴의 발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과 회색 가운의 주름이 세밀하게 표현됐고, 특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 발이 강조되어 안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실레와 발리는 생활고를 겪으며 여러 지역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실레는 1914년 정착한 곳에서 만난 중산층 집안의 여성과 결혼을 결심합니다. 결국 발리는 에곤 실레를 떠나게 됩니다
이번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의 마지막 공간입니다.
에곤실레의 작품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의 에로티시즘 작품이 빠질 수 없습니다. 그만의 독특한 누드 작품을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불안함에서 안정감으로, 달라진 누드
에곤 실레는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특히 경력 초기에 생활고에 시달리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칠과 연인 관계였으며, 그녀는 주변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실레를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안정적으로 정착하기를 원했던 실레는 결국 발리와 결별하고, 1915년 이웃으로 만난 중산층 집안의 딸 에디트 하름스를 만나 결혼 했습니다. 에디트는 따뜻하고 헌신적인 성품으로 실레에게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에곤 실레는 누드에서 주로 마르고 긴장된 모습으로 내면의 불안함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후기에 실레가 그린 인물들은 대체로 풍만하고 여유로운 모습입니다. 아내 에디트를 만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실레의 감정이 반영된 걸까요? 인물의 모습은 변화되었지만, 생명력을 강조하고 심리적 주제들을 탐구한 그의 예술 세계는 한결같아 보입니다.
누워 있는 여성
에곤 실레 (1890–1918) 1917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에곤 실레에게 누드는 단순한 육체의 묘사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인 욕망과 고독을 대하는 내면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안정된 정착 생활을 원했던 에곤 실레는 1915년 중산층 가정의 딸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했습니다.
에디트는 따뜻하고 헌신적인 성격이었고, 그것은 오랜 시간 실레가 원했던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예민하고 불안정했던 실레의 예술가적 성향과 달리 유복한 환경과 온화함을 가졌던 에디트의 성격은 실레에게 큰 안정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바로 실레의 아내, 에디트입니다. 양팔을 위로 올려 머리를 받친 팔의 자세와 넓게 벌린 다리가 가로로 긴 작품에서 대칭을 이룹니다. 실레는 인간의 성적 욕망을 있는 그대로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실레의 후기 작품에서는 이전의 깡마른 모습과 다른 풍만한 여성의 누드가 그려졌습니다. 결혼 이후 심리적으로 안정된 실레가 임신한 에디트를 보며 느낀 감정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요?
안타깝게도 1918년 유럽을 덮쳤던 스페인 독감으로 아내 에디트는 아들을 임신한 상태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3일 후, 에곤 실레도 세상을 떠납니다
서 있는 세 여성 (부분)
에곤 실레 (1890–1918) 1918년 (미완) 캔버스에 유화 레오폴트미술관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에곤 실레가 생을 마감하자 미완성으로 남게 된 작품이다. 세 여성은 모두 다른 표정과 자세를 하고 있다. 옆으로 몸을 돌린 가장 왼쪽의 여성은 무언가 이미 체념한 표정이다. 가운데 여성은 눈을 크게 뜨고 침착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이 여성에게 기댄 오른쪽 여성은 긴장을 풀려는 듯 눈을 감고 있다. 이 작품은 실레가 말년에 보였던 새로운 회화 양식을 잘 보여 준다.
에필로그/ 예술에는 자유를
전통의 벽을 넘어 새로운 양식에 도전하며 예술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해 왔습니다. 그 역사 속에서 각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이끈 선구자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났던 ‘꿈꾸는 예술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비엔나 분리파가 오스트리아 예술에 심은 ‘도전과 실험’이라는 나무는 에곤 실레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자유’라는 열매를 선물했습니다.
그들의 도전과 실험은 비엔나 예술을 모더니즘으로 이끌었고, 자유를 꿈꿨던 예술가들은 ‘비엔나 1900년’의 선구자가 됐습니다. 전통의 틀을 깨고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했던 이들의 시대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선사합니다.
오늘 소개한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전시회는 얼리버드 티켓팅 이후 너무나 기다리던 전시회 였는데요. 에곤 실레의 다양한 여러 원작들을 만나본 부분은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클림트는 약간 사기당한 느낌이 드네요. 제가 아는 클림트의 작품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작품은 어디에도 없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