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알렉산더 레비 개인전 'FINAL ACHIEVEMENT IS RUIN' @ 갤러리현대 청담 전시
이번엔 좀 무거운 전시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청담 분더샵에서 열리고 있는 헨리 알렉산더 레비(Henri Alexander Levy)의 개인전 'FINAL ACHIEVEMENT IS RUIN'인데, 보고 나서 며칠은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전시 개요
전시명은 국문으로 '성취의 끝에서 파멸을 보다'라고도 소개되고 있어요. 신세계갤러리 분더샵 청담(강남구 압구정로 60길 21, 지하 1층)에서 2026년 9월 2일부터 10월 17일까지 열리고, 입장은 무료예요. 도슨트는 네이버 예약이나 갤러리 문의로 가능하다고 하니 참고하세요.


레비는 회화, 영상, 의복, 아상블라주 등 서로 다른 매체를 넘나드는데, 이번 전시는 그 작업들이 '문화적 소외와 상징적 통제가 작동하는 방식'이라는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수렴하던 시기의 작품들을 모았다고 해요. 청소년기의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흔적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자신의 과거와 성장 과정에서 마주한 사회를 되짚는 작업이라, 보는 내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어요. 그런데 그게 이 전시의 의도이기도 하더라고요.

작가 소개
헨리 알렉산더 레비는 1991년 미국 출생으로, 지금은 로스앤젤레스·파리·빈을 오가며 거주하고 작업한다고 해요. 전통적인 위계나 제도적 인정 바깥에서 작업해온 작가라, 범죄성이나 지워짐, 방치의 흔적을 품은 사회 주변부의 물건과 재료를 가져와 감상주의를 배제한 채 새로운 맥락에 놓는 방식을 써요. 유럽과 러시아 등지에서 프로젝트를 소개해왔고, 이번이 서울에서의 전시라고 하네요.

앙팡(엔팡) 리쉬 데프리메 브랜드 소개
레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그가 설립한 패션 하우스 '앙팡 리쉬 데프리메(Enfants Riches Déprimés, ERD)'예요. 신세계갤러리 자료에는 '엔팡 리쉬 데프리메'로 표기돼 있는데, 국내 언론과 신세계인터내셔날 쪽 표기는 '앙팡 리쉬 데프리메' 쪽이 더 많이 쓰이더라고요.

UCLA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한 레비가 2012년 말에 만든 브랜드인데, 첫 디자인이 자신이 다녔던 스위스 보딩스쿨 '앵스티튀 르 로제이'의 휘장을 프린트해서 일부러 찢어놓은 티셔츠였다고 해요. 시작부터 '누구나를 위한 브랜드'가 아니라 아주 특정하고 좁은 취향을 겨냥한다는 태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요. 레비 스스로 브랜드를 '엘리트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쿠튀르'라고 표현한 적이 있고, 2015년 가디언 인터뷰에서는 "가격은 가치의 표시일 뿐 아니라 작품 자체의 본질적인 일부"라며 대중을 위한 저렴한 제품을 만들 생각이 없다고 못박기도 했어요.

브랜드는 나오자마자 화제였어요. 칸예 웨스트, 코트니 러브, 프랜시스 빈 커베인, 건즈 앤 로지스 멤버들 같은 셀럽들이 초기부터 입었고, 맥스필드·바니스 뉴욕·10 꼬르소 꼬모 같은 편집숍에 들어갔어요. 2017년엔 크리스티 파리에서 런웨이 컬렉션을 선보인 최초의 패션 하우스라는 기록도 세웠고, 2019년 파리 마레 지구 플래그십은 건축가 디디에 피우자 포스티노와 함께 '은행 금고, 브루탈리즘 고문실, 시계태엽 오렌지'를 섞어놓은 듯한 공간으로 꾸몄대요. 2025년엔 강남에 서울 플래그십도 열었더라고요.


한국에서는 신세계인터내셔날이 공식적으로 들여오는 브랜드이기도 해요. 신세계인터내셔날 사이트에도 '2012년 설립, 철저한 수작업 방식'이라는 소개가 나오는데, 이번 신세계갤러리 전시도 이런 유통 관계와 무관하지 않아 보여요. (이 단락은 위키피디아와 신세계인터내셔날 공식 자료를 참고했어요.)

확실한 건, 이번 전시 설명에도 나오듯 레비에게는 '진정성은 타협과 공존할 수 없고, 럭셔리와 실용성은 서로 배타적'이라는 태도가 패션과 순수미술 양쪽에 똑같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에요. 브랜드도, 이번 전시의 회화·조각도 결국 같은 사람의 같은 문제의식에서 나온 두 개의 얼굴인 셈이죠.


전시된 작품과 작가의 작품 경향
레비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하나만 꼽으라면 저는 '아상블라주'를 고르고 싶어요. 신추상표현주의적 어법을 다시 불러와서, 오래된 물건들—버려지거나 잊힌, 사회 주변부의 흔적을 품은 재료들—을 캔버스와 나무판 위에 못박고 꿰매고 쌓아올리는 방식이거든요.


가장 인상 깊었던 건 《Cages (Seoul ED.)》(2026)예요. 이번 서울 전시를 위해 프랑스에서 특별 제작됐다는 대형 설치작인데, 크기가 210×714×123cm에 달해서 공간 전체를 압도해요. 전시장이 마치 감정을 밀폐하고 압축하는 '오토클레이브'처럼 느껴진다는 설명이 이 작품 앞에서 특히 실감 났어요.




작은 오브제 작업들도 하나하나 이야기가 있어요. 《Untitled Assemblage (Djagilev's Grave)》(2021)는 오래된 발레 슈즈와 철제 사슬을 니스 칠한 나무 케이스에 박아 넣은 작업이고, 《Untitled Assemblage II》(2025)는 오래된 한국 리본을 재생 목재에 못박아 손으로 낡힌 철제 사슬에 매달아둔 작품이더라고요.


서울에서 열리는 전시라 그런지 이런 디테일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어요. 《A Psychiatrist Told Me I am Making a Game out of Painful Memories》(2026)는 졸업앨범 사진과 낡은 철제 케이지를 검은 테이프로 감아 나무판에 고정한 작업인데, 제목부터 작품까지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려고 작정한 것 같았어요.








《Armless Dick Man》(2025)처럼 청동 소재의 케이지 스탠드에 저렇게 직설적인 제목을 붙이는 걸 보면, 무거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유머와 냉소를 놓지 않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고요.








종이 작업들도 상당히 많았는데(체크리스트로만 22점이더라고요), 잉크·아크릴·그래파이트에 담배나 피, 커피, 차 같은 재료를 섞어 쓴 게 특징이에요. 작가는 이걸 '반응하지 않는 영아'의 심리적 순환—정서적 단절이 걱정을, 걱정이 불안을, 불안이 위축된 반응을 낳고 다시 무반응으로 이어지는 순환—에 빗대서 설명하더라고요.






실제로 《Horses》(2018), 《Severity of Adjustment Problems》(2017) 같은 작업엔 재료 표기에 '피(blood)'가 그대로 적혀 있어서, 자료를 보다가 저도 잠깐 멈칫했어요.

전체적으로 제한된 색채, 기능적인 선, 광택 내고 벗겨내고 뒤집고 덧칠한 표면들이 관람객을 친절하게 초대하기보다는 하나의 닫힌 체계이자 장벽처럼 다가와요. 그래서 이 전시는 '한눈에 읽히는' 전시가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의미를 늦게, 천천히 내어주는 쪽에 가까운데, 그 지연 자체가 요즘 콘텐츠처럼 빨리 소비되는 문화와는 다른 속도로 작품을 보게 만드는 것 같았어요.



마무리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전시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그 불편함이 이 전시가 하고 싶은 말이라고 느꼈어요. 편하게 소비되길 거부하는 예술, 그리고 그 태도를 패션 브랜드까지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작가의 고집이 궁금하신 분들께는 확실히 한 번쯤 볼 가치가 있는 전시예요.
전시명: 《FINAL ACHIEVEMENT IS RUIN》 · 작가: Henri Alexander Levy(헨리 알렉산더 레비) · 장소: 신세계갤러리 분더샵 청담(지하 1층) · 기간: 2026.09.02~10.17 · 입장료: 무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