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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고재 전시 : 작가 강요배 '소소, 반색' 관람후기 - 제주도의 다른 시선

a4b4 2026. 9. 8.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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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삼청동 갤러리 투어에서 만난 강요배 작가 개인전 '소소 반색' 관람후기입니다.

이번 전시는 학고재에서 4년 만에 열리는 강요배의 개인전으로, 회화 28점을 선보입니다. 전시는 제주라는 거대한 자연에서 시작해 나무와 꽃, 열매, 새, 고양이처럼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는 작은 존재들로 이동하는 소소한 제주의 다른 시선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 전시회 개요

  • 강요배 '소소, 반색'
  • 2026. 8. 12 - 9. 12
  • 학고재 본관, 서울 종로구 삼청로 50
  • 회화 28점


전시 제목인 '소소, 반색'도 이러한 시선을 잘 보여줍니다. '소소'는 우리가 평소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작고 미미한 것들을, '반색'은 그렇게 곁에 있었던 존재를 새삼 반갑게 맞이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제주 바다와 하늘, 바람처럼 장대한 자연을 그려온 화가가 이제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시선을 옮긴 것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이를 작업세계의 갑작스러운 변화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멀리 바라보던 사람이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에 가깝습니다.

 

1952년 제주에서 태어난 강요배는 한국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1세대 작가입니다. 서울대학교 회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80년대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습니다. 1988년부터 '제주민중항쟁사' 연작을 제작하며 제주 4·3을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역사적 주제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러나 강요배의 작품을 역사화가라는 하나의 범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1990년대 제주로 돌아간 이후 그의 작업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은 것은 자연입니다. 바다와 바람, 나무와 꽃, 눈과 구름을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제주라는 장소에 축적된 시간과 기억을 그려왔습니다.

그에게 자연은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기 위한 소재가 아닙니다. 자연 안에는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역사가 함께 축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주 풍경에서는 자연과 역사, 개인의 기억을 명확하게 분리하기 어렵습니다.

 

'소서'와 '대서'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작품 '소서'와 '대서'입니다.
화면에서는 물이 절벽을 따라 거칠게 쏟아지고 흰 물보라가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처음 작품만 보면 거대한 폭포를 그린 풍경화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제목은 폭포가 아니라 24절기 가운데 여름을 의미하는 '소서(小暑)'와 '대서(大暑)'입니다.


즉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특정 폭포의 모습이 아니라 한여름의 더위와 물이 만나면서 발생하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강요배는 이번 작품에서 보이지 않는 한여름 무더위의 기운을 담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거칠게 흘러내리는 물감과 빠른 붓질을 보고 있으면 물의 형태보다 떨어지는 속도와 힘이 먼저 느껴집니다.

 

 

'창파' 바다의 형태가 아니라 파도의 힘

 

'소서'와 '대서'에서 시작된 물의 움직임은 2015년작 대형 회화 '창파(滄波)'에서 거대한 바다로 이어집니다.
197×333cm의 화면을 가득 채운 검푸른 파도와 흰 포말은 특정한 제주 바다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풍경이라기보다 거대한 자연의 운동 자체에 가깝습니다. 두껍게 쌓인 물감과 거친 질감, 빠른 붓질이 뒤섞이면서 화면 전체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만듭니다.

 

가까이에서는 추상적인 붓질처럼 보이지만 몇 걸음 물러나면 거대한 파도가 나타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강요배에게 붓질은 형태를 묘사하기 위한 수단만은 아닙니다. 붓을 움직이는 작가의 신체와 자연의 움직임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파' 앞에서는 바다를 바라본다는 느낌과 동시에 파도 한가운데 들어가 있는 듯한 감각을 받게 됩니다.

 

 

'나무' : 풍경의 일부였던 나무가 하나의 존재가 되다

 

이번 전시의 중요한 변화는 작가의 시선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점입니다. 넓은 제주 풍경 속에 있던 나무가 '나무' 연작에서는 화면의 중심으로 들어옵니다. 작가는 나무 전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몸통에 바짝 다가갑니다. 거칠게 갈라진 껍질과 깊게 팬 표면, 오랜 시간 비바람을 맞으며 만들어진 흔적들이 화면을 채웁니다.

이전에는 풍경을 구성하던 하나의 요소였던 나무가 이제는 자신만의 시간을 견뎌온 하나의 생명으로 등장합니다. 강요배가 이번 전시에서 이야기하는 '소소'를 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거대한 자연을 바라보는 것과 작은 나무껍질 하나를 바라보는 것은 작가에게 서로 다른 일이 아닙니다. 작은 존재 역시 대자연과 같은 시간과 생명의 질서 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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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등아귀' : 인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의 생명

 

'혹등아귀'(2025)는 이번 학고재 강요배 전시에서 상당히 낯선 작품입니다. 제주의 바다와 나무를 그려온 강요배의 작품 사이에서 커다란 입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심해어가 갑자기 등장합니다.

혹등아귀는 수심 수백에서 수천 미터의 깊은 바다에서 살아갑니다. 빛 한 점 없는 환경에서 스스로 빛을 만들어 먹이를 유인하며 생존하는 생명체입니다. 강요배는 이 생물을 생물학적인 표본처럼 정확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둠 속에서 정면을 바라보는 생명체의 존재감에 집중합니다. 학고재는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심해를 인간 중심적인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영등바람' : 보이지 않는 바람을 그리는 방법

 

'영등바람'(2026)은 강요배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제주와 바람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제주의 영등바람은 입춘 무렵 바다와 땅을 휩쓰는 북서풍과 연결되며, 제주에서는 음력 2월이면 바람의 신인 영등할망을 맞이하는 의례가 이어져 왔습니다. 따라서 강요배에게 영등바람은 단순한 기상현상이 아닙니다.

제주의 계절과 신화, 사람들의 삶과 오랜 시간이 함께 담긴 바람입니다. 학고재 역시 이 작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바람을 따라 흘러와 화면에서 형체를 얻는다고 설명합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화가는 무엇을 그려야 바람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강요배는 바람 자체를 묘사하는 대신 바람에 흔들리는 자연과 빠르게 움직이는 붓질을 통해 그 힘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보이는 대상보다 보이지 않는 자연의 움직임을 어떻게 회화로 바꿀 것인가라는 문제가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해바라기-쿠르스크' :  제주 4·3의 동백에서 우크라이나의 해바라기로

 

이번 전시에서 특히 오래 보게 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가 '해바라기-쿠르스크'(2025)입니다. 쿠르스크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주요 격전지가 된 지역입니다. 강요배는 전쟁의 참혹한 장면을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고 눈밭에서 말라버린 해바라기를 화면에 남겼습니다.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해바라기를 통해 폭력이 남긴 상처를 우회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라버린 해바라기가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꽃은 다시 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전쟁이 남긴 상흔과 함께 그럼에도 계속 이어지는 생명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강요배의 작품에는 거친 붓질이 많습니다. 형태의 경계도 선명하지 않고 물감이 흐르거나 흩뿌려진 흔적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자유로워졌습니다. 작가는 묽은 물감을 흘리고 캔버스를 눕혀 우연히 생기는 번짐까지 받아들이며, 오래 생각한 이미지를 비교적 빠른 붓질로 완성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전시는 작품 앞에서 정답을 찾으려고 하기보다 먼저 바라보는 것이 좋았습니다. 바다를 보면 파도의 소리를 떠올리고, '영등바람'에서는 바람의 방향을 느껴보고, 나무 앞에서는 거칠어진 표면의 시간을 바라보는 식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작품의 제목을 보면 처음에는 모호했던 이미지가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결국 '소소, 반색'은 특별하고 거대한 것을 발견하기 위한 전시라기보다 이미 우리 주변에 있었지만 너무 익숙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전시였습니다.

학고재 서울 종로구 삼청로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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