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 전시회 '변하는 변하지 않는' 관람후기|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에서 박서보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 '변하는 변하지 않는 Changing Unchanging'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박서보 작고 3주기를 맞아 마련된 전시로, 1970년대부터 2023년까지 약 50년에 걸친 작업 세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K1, K3, 한옥 세 공간에 총 40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 박서보의 '묘법'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 박서보 전시회 개요
전시명 : 박서보 '변하는 변하지 않는 Changing Unchanging'
기간 : 2026. 8. 24 ~ 10. 18
장소 : 국제갤러리 서울 K1, K3, 한옥
주소 : 서울 종로구 삼청로 54
관람시간 : 월~토 10:00~18:00 / 일요일·공휴일 10:00~17:00

아래와 같이 국제갤러리에서는 김세은 박서보 두 작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데요. 박서보 회고전은 K1 K3 한옥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작가의 연대기순 관람을 원하신다면 K1 > K3 > 한옥 순으로 관람하시는 것 추천 드립니다.

| 초기 묘법 연작 (1967–1986)
K1 전시 시작은 박서보의 초기 '묘법' 연작(1967–1986)으로 시작합니다.

박서보(1931~2023)는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단색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멋지게 그려내는 것보다 반복적인 행위와 과정에 있습니다. 선을 긋고, 다시 긋고, 한지를 밀어내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화면을 만들어갑니다.

이러한 작업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묘법(Écriture)' 연작입니다.


'묘법'이란?
박서보의 묘법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50여 년 동안 계속 변화해 왔습니다.
초기에는 흰색 안료가 마르기 전 연필로 반복해서 선을 긋는 방식이 중심이었다면, 이후에는 한지를 사용하면서 작업 방식이 달라집니다. 젖은 한지를 밀어내고 움직이면서 종이 자체가 화면 위로 솟아오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에서 작품을 보면 단순히 선이 그려진 평면 회화가 아니라 한지가 만들어내는 굴곡과 깊이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 지그재그묘법(1982–1997)
K1 안쪽 전시장에서 선보이는, 흔히 지그재그묘법(1982–1997)으로 알려진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박서보 ‘지그재그 묘법’은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화면을 채워나가는 묘법 연작의 중요한 흐름입니다. 연필로 선을 긋던 초기 묘법에서 한 단계 변화하여, 젖은 한지의 물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 특징입니다.

작가는 캔버스에 한지를 붙이고 물감을 올린 뒤, 화면이 마르기 전에 손과 도구를 이용해 일정한 방향으로 밀어내며 반복적인 선과 골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화면에는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리듬감 있는 흔적이 형성됩니다. 미리 정해진 이미지를 그린다기보다 같은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재료와 작가의 신체가 만나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작품이 됩니다.


특히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한지가 밀리고 눌리면서 만들어진 굴곡과 물감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단순히 선을 ‘그린’ 회화라기보다 한지의 물성을 이용해 화면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회화와 부조의 성격을 함께 보여줍니다.

박서보에게 이러한 반복은 단순한 패턴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의도를 앞세우기보다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비워내고 재료의 성질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지그재그 묘법은 완성된 형태뿐 아니라, 작품이 만들어지는 시간과 반복되는 신체의 움직임까지 함께 바라보면 더욱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해당 공간에서는 이와 함께 흑백묘법(1995–2004) 작품들도 같이 만나볼 수 있습니다.

박서보의 ‘흑백 묘법’은 한지의 물성과 반복적인 행위를 바탕으로 흰색과 검은색을 중심으로 전개한 작품군입니다. 화려한 색채를 배제한 화면에서는 색보다는 선의 흐름과 한지의 질감, 반복되는 리듬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작가는 캔버스에 한지를 여러 겹 붙이고 물에 적신 뒤, 물감과 함께 밀고 긋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지가 밀려나며 화면에 일정한 골과 융기가 만들어지고, 반복되는 선들은 단순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표정을 만들어냅니다. 평면적인 그림이라기보다 화면 자체가 하나의 물질적인 공간처럼 느껴지는 것도 묘법의 특징입니다.


특히 흑백 묘법에서는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가 만들어내는 절제된 분위기가 인상적입니다. 멀리서 보면 규칙적인 선이 반복되는 단순한 화면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한지의 섬유와 굴곡, 손의 움직임이 남긴 흔적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옵니다.

박서보의 묘법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그렸는가보다 ‘어떻게 반복했는가’에 있습니다. 끊임없이 긋고 밀어내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의도를 덜어내고 화면과 재료에 집중합니다. 흑백 묘법은 이러한 박서보의 작업 방식이 가장 절제된 색채 속에서 드러나는 작품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연필색채묘법 (2019–2021)
박서보는 말년에 이르러서도 변화를 향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국제갤러리 한옥 공간에서는 작가가 1986년 이후로 중단했던 연필묘법을 재개한 연필색채묘법(2019–2021) 작품을 먼저 만나볼 수 있습니다.


박서보 ‘연필색채묘법’은 초기 묘법에서 보여주었던 연필의 반복적인 선과 후기 묘법의 색채가 함께 어우러진 작업입니다. 오랜 시간 이어온 묘법의 조형 언어를 다시 돌아보면서도, 한층 풍부해진 색을 통해 새로운 화면을 만들어냈습니다.


화면을 따라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연필선은 일정한 질서와 리듬을 형성합니다. 가까이에서 보면 하나하나의 선과 미세한 흔적이 눈에 들어오지만, 조금 떨어져 바라보면 선들은 색채와 어우러지며 하나의 커다란 흐름처럼 느껴집니다.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보다 긋는 행위와 그 과정에서 축적되는 시간 자체가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특히 이 시기의 작품에서는 색채가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박서보는 자연에서 받은 인상과 색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색은 강렬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반복되는 선과 만나 차분하고 깊이 있는 화면을 만들어냅니다.

‘연필색채묘법’은 박서보가 오랫동안 지속해 온 반복과 수행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연필이라는 익숙한 재료와 색채를 다시 결합해 묘법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후기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신문지묘법(2022–2023)
이번 박서보 회고전이 열리는 국제갤러리 한옥 안쪽공간에서는 작가의 말년 작품인 신문지묘법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박서보의 ‘신문지묘법’은 생애 말년에 선보인 묘법 연작으로, 기존에 사용해온 한지 대신 신문지를 작업의 재료로 끌어들였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오랜 시간 이어온 묘법의 반복적 행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일상적인 재료를 통해 새로운 화면을 만들어냈습니다.


신문지 위에는 기사와 사진, 활자 등 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작가는 그 위에 반복적으로 선을 긋고 화면을 구성하면서 신문이 가진 정보와 묘법의 흔적을 하나의 화면 안에 겹쳐 놓았습니다. 읽기 위한 매체였던 신문은 작업을 거치면서 정보 전달의 기능에서 벗어나 하나의 조형적인 재료로 변화합니다.


특히 신문지는 특정한 날짜와 사건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시간’이라는 의미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그 위에 작가의 반복적인 행위가 더해지면서 일상의 시간과 작업의 시간이 한 화면 안에서 중첩됩니다.


‘신문지묘법’은 박서보가 마지막까지 묘법이라는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이어가면서도 새로운 재료를 받아들이며 변화를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후기 작품입니다.



| K3 색채묘법(2001– 2018) 작품
K3 전시장에는 자연의 색을 화면에 옮긴 색채묘법(2001– 2018)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박서보의 작품이 변화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화면의 질서가 더욱 절제된 흑백묘법이 등장합니다. 젖은 한지를 흑연으로 반복해서 밀어내면서 수직의 선과 요철을 만들어냅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강렬한 색채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박서보는 자연에서 발견한 색에 주목했습니다. 특히 일본 후쿠시마 반다이산에서 본 단풍의 붉은색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후 자연에서 발견한 색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색이 달라져도 반복되는 선과 고랑, 한지의 물성이라는 작업의 기본적인 구조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 제목인 '변하는 변하지 않는'이 작품을 보고 나면 조금 더 쉽게 이해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