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로랑생 : 무지개 위의 춤 展 '춘희, 암사슴들, 광란의 시대'
마리 로랑생 : 무지개 위의 춤 展 관람후기 2부입니다.
총 4장으로 구성된 마리로랑생 회고전 후반전시는 '3장 무지개 위의 춤_파리에서의 전성기' '4장 장미와 여인 흔들리지 않는 세계'와 함께 춘희, 광란의 시대, 암사슴들 3개의 소섹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21년은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된 해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긴 망명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파리로 돌아와 예술적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파리로의 귀환과 종결
망명 생활의 종료: 독일인 남편 오토 폰 뷔트옌(Otto von Wätjen)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전쟁 중 스페인과 독일 등지에서 유배에 가까운 망명 생활을 했던 로랑생은 1921년 드디어 사랑하는 파리로 돌아옵니다. 파리 귀환과 동시에 남편 오토와 이혼하며 결혼 생활을 정리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독자적인 예술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레이스 사이로 비치는 마리로랑생 회고전 다음 전시공간

춘희
'춘희'는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삼총사'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들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가 1848년에 발표한 소설입니다. 원제는 'La Dame aux Camélias'(동백꽃을 든 여인)이며, ‘춘희(椿姬)’라는 제목은 일본 번역에서 만들어진 이름이 한국에 그대로 정착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큰 인기를 얻어 1852년 희곡으로 공연되었고, 이후 주세페 베르디에 의해 1853년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도 각색되었습니다.

이야기는 화자인 ‘나’가 경매에서 고급 창녀 마르그리트 고티에의 유품인 소설 '마농 레스코'를 구입하면서 시작됩니다;. 이후 아르망 뒤발이라는 청년이 나타나 책을 사갔다고 하며 두 사람은 알게 되고, 아르망은 화자에게 마르그리트와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르망은 파리 사교계에서 ‘동백꽃을 든 여인’이라 불리던 마르그리트와 사랑에 빠지고, 창부로 살아가던 마르그리트 역시 아르망의 사랑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그와 함께 살게 되는데요. 그러나 아르망의 아버지가 찾아와 아들의 미래를 위해 헤어져 달라고 요구하자, 마르그리트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떠난다. 이후 그녀가 다시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자 아르망은 배신감을 느끼고 절교한다. 뒤늦게 마르그리트가 폐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르망은 깊이 후회합니다.

이 작품은 뒤마 피스가 실제로 사랑했던 프랑스의 고급 창부 마리 뒤플레시스와의 경험에서 모티프를 얻어 탄생했다고 합니다.. 뒤마 피스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의 만남을 이어 갔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잦은 음주와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에 실망해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 뒤마 피스는 아직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해 충분한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마리 뒤플레시스가 생활을 위해 후원자를 계속 두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책 춘의 속 마리로랑생의 삽화들...

총 12작품으로 수채화로 작업한 작품



제 3장 무지개 위의 춤 파리에서의 전성기
마리 로랑생 : 무지개 위의 춤 展 세번째 공간입니다.
1921년, 서른여덟 살의 로랑생은 7년 결혼 생활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옵니다. 전쟁의 상처를 뒤로한 채, 1920년대 초 파리에서 다시 화가로서 자리를 잡고, 대작 '숲 속의 여인들'을 높은 가격에 판매하며 경제적 기반도 마련합니다. 1923년에는 새 거처를 마련해 오랜 방랑을 끝내고, 초상화가로 활발히 활동하며 화려한 삶을 이어갑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단순히 화려함에 머무르지 않고, 그 안에 숨은 감정과 공허함까지 담아냅니다. 당시 사교계 인물들 사이에서 로랑생 특유의 인물상은 큰 유행을 일으킬 만큼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다이애나, 영성작가라면 한 번은 소재로 작업하는...
마리로랑생 다이애나 만의 느낌이...


| 기타를 든 아를르캥
사교계의 아이콘 코코 샤넬 역시 로랑생에게 초상화를 의뢰합니다. 로랑생은 그녀를 부드럽고 우아한 모습으로 그려냈지만 완성된 초상화에 대해 샤넬은 만족하지 못해 수정을 요청합니다. 로랑생은 이에 단호히 거절하며, 작품을 다시 그리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힙니다. 결국 이 초상화는 다른 수집가의 손에 들어가 오늘날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소장된 샤넬의 초상화로 남아 있습니다. 이 일화는 로랑생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도, 그리고 성공을 거둔 이후에도 자신의 표현 방식을 쉽게 타협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줍니다.

| 키스
로랑생은 1923년, 파리 몽타뉴에 벽돌로 지은 오페라 옆에 이자크와의 작업실을 마련합니다. 당시 그녀의 환심을 사던 젊은 댄서이자 배우였던 니콜 피브르는 그곳에서 살았고, 로랑생은 그녀를 위해 연인인 이자크와의 초상화를 그려줍니다. 전쟁 후 ‘남핀’이라 불리던 암페타민이 유행하던 시기, 로랑생 역시 중독에 빠졌고, 1927년 작 '키스'와 1928년 작 '푸른 치마;에 그 모습이 드러납니다.

두 작품은 시든 꽃 같은 상처 입은 여성상을 통해 로랑생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그녀가 살던 사교계의 공허한 화려함과도 연결됩니다. 로랑생은 당시 젊은 댄서이자 배우였던 니콜 피브르와 가까웠고, 그녀가 살던 곳에서 이자크와 함께 초상화를 그려줍니다. 이 시기 로랑생은 중독에 빠져 1927년과 1928년 작품에서 이를 드러냅니다.


거트루드 스타인이나 나탈리 클리퍼드 바니가 주도했던 살롱 문화처럼, 로랑생의 작업 역시 여성들 간의 관계와 감각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남성의 시선이 배제된 장면 속에서 여성들 사이의 친밀한 교감과 정서를 섬세하게 포착하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키스'와 '두 친구'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인물의 부드러운 접촉과 서로를 향한 시선은 절제된 긴장감을 형성하며, 기존의 지배적인 재현 방식과는 다른 관계성과 감정의 층위를 제시합니다. 또한 로랑생 특유의 부드럽고 이상화된 여성 표현은 이러한 요소들을 시각적으로 완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 결과 작품은 우아하고 장식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여지는 동시에, 그 이면에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이중적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 두 친구

광란의 시대
Les Années Folles (The Roaring Twenties)
광란의 시대는 ‘미친 시절’로 지칭되는 전쟁(1914~1918) 직후 1920년대, 평화 회복과 함께 나타난 문화적·예술적 폭발을 뜻합니다. 파리 중심으로 재즈와 아르누보풍, 자유로운 사교 문화가 만연했고, 모더니즘 예술이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로랑생은 이 시기 작업실을 차리고 초상화로 큰 성공을 거두며 전성기를 누립니다.

4년간 전쟁으로 황폐화된 파리는 ‘엉겁결’ 부흥을 맞았고, ‘음주가지 도른다’는 표현처럼 향락이 유행했습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등장하며 예술계는 급변하고, 로랑생은 이에 휩쓸리며 파괴적 사교 생활을 합니다.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파탄 났고,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그녀는 1929년 대공황으로 막을 내리는 광란의 시대를 예술로 기록합니다.




| 검은 망자의 산책
로랑생은 자신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지키기 위해 ‘밤의 수첩’ 중 “[망의 수첩]” 중 “말, 나의 영혼” 이라는 구절을 읊으며, “세상에 맞춰 그려야 한다면 차라리 죽겠다”며 고집을 보입니다. 당시 그녀는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초현실주의자들과 어울렸고, 초현실주의 전시회에서 주목받습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녀의 작품을 자신들의 운동에 이용하려 하자, 로랑생은 단호히 거절하며 독자적 입장을 고수합니다. 앙드레 브르통이 그녀의 초상화를 극찬하며 초현실주의의 아이콘으로 삼으려 했으나, 로랑생은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녀는 초현실주의 전시회에 참여했지만, 운동의 일부가 되려 하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합니다. 이 시기 로랑생은 앙드레 브르통의 제안을 뿌리치며, 자신의 예술 철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섹션 1에서도 만났지만 마리 로랑생 자화상에서 받는 느낌은 너무나 우울하다.





암사슴들
당시 최고의 향수 제조업자 프랑수아 코티는 로랑생에게 초상화를 의뢰합니다. 1924년, 그녀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의 백무민으로 활동하던 자메트 닐로바를 그려냅니다. 이 초현실주의적 작품은 로랑생의 전성기를 상징하며, 닐로바의 우아한 자태와 대비되는 기묘한 배경이 특징입니다.

코티 부인은 작품에 매료되어 이를 구입하고, 이후 로랑생은 코티의 후원을 받아 작업실을 유지합니다. 그녀는 닐로바 초상화로 큰 성공을 거두고, 코티의 지원으로 안정된 창작 환경을 갖춥니다. 이 시기 로랑생은 사교계와 예술계에서 동시에 인정받으며 전성기를 누립니다.


마리 로랑생 암사슴들 책 삽화 15점






마지막 섹션에는 마리 로랑생이 참여한 발레 암사슴들 영상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티스토리는 영상 업로드가 안되니,


4장 장미와 여인 흔들리지 않는 세계
마리 로랑생 : 무지개 위의 춤 展 마지막 전시공간입니다.

1920년대 파리 사교계에서 로랑생은 초상화 의뢰를 받으며 활약하고, 1929년 대공황 전까지 성공을 누립니다. 사교계 젊은 여성 수집가들이 그녀 작품을 사랑합니다. 1930년대 초 이자크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1932년 갤러리 소외와 경제난 속에서도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초상화를 그리며 창작을 이어갑니다. 그녀는 개인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독립적 예술 세계를 유지하며, 루이즈 부르주아와의 교류로 예술적 영감을 얻습니다.




마담 앙드레 그루의 초상
1930년대 초반, 로랑생의 희망은 간직하고 있었지만 사교계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녀가 사랑했던 수많은 젊은 댄서이자 배우였던 니콜 피브르는 세로에 벽난로 앞에서 사망하고, 로랑생은 깊은 슬픔에 잠깁니다. 그녀로부터 받은 편지는 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 인사였고, 이로 인해 로랑생은 1937년 작 '마담 앙드레 그루의 초상'을 그립니다. 이후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이다 옹드르 그루 역시 병으로 세상을 떠나며, 로랑생은 사랑했던 이들을 잃고 고독에 빠집니다.



아를르캥
1940년 6월, 파리 나치 독일 점령 후 로랑생은 위독한 상태로 입원 중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경험한 공포가 되살아나며 정신적 충격이 큽니다. 그녀는 자결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작전 중 받은 편지는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1944년에는 그녀로부터 사망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집니다. 로랑생은 점령지에서 고독과 공포 속에 살았고, 1940년 작 '아를캥'에서 이를 표현합니다. 그녀는 점차 쇠약해지며 '밤의 수첩(Le Carnet des nuits)'을 통해 내면의 어둠을 기록합니다.

무희들
제가 느끼기에는 가장 마리 로랑생 스러운 작품 중 하나









푸른 옷을 입은 수잔 모로
전쟁 이후 노년의 로랑생은 하녀 수잔 모로와 복잡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1925년 고용된 수잔은 헌신적인 모습으로 신뢰를 얻은 뒤, 점차 로랑생의 일상과 인간관계를 통제하며 그녀를 외부와 고립시켰습니다. 그러나 고독했던 로랑생은 유일하게 곁에 남은 수잔에게 더욱 깊이 의존했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관계는 작품 <푸른 옷을 입은 수잔 모로>에서 로랑생이 아끼는 푸른색을 그녀에게 입힌 것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법적 관계로도 이어졌습니다. 1954년 로랑생은 수잔을 양녀로 입양했으며, 이로 인해 수잔은 그녀의 모든 재산과 작품을 물려받는 유일한 법적 상속인이 되었습니다.



세명의 젊은 여인들
말년의 로랑생은 수도원에서 사색하며 삶의 비애를 영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대작 <세 명의 젊은 여인들>은 그녀가 사랑한 모티프들과 노화가의 차분한 시선이 잘 드러난 작품입니다. 1955년, 그녀는 법적 분쟁 끝에 나치에게 빼앗겼던 사보르냥의 집을 되찾으며 마지막 안식처를 마련했습니다. 1956년 6월 8일, 로랑생은 그곳에서 향년 72세로 조용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유언에 따라 순백의 드레스와 붉은 장미, 그리고 평생 간직한 옛 연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편지들과 함께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전쟁과 운명으로 헤어졌던 두 사람은 이제 파리의 흙 속에서 나란히 잠들어 치열했던 사랑과 예술의 이야기를 조용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인생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어렴풋이 예감한 마리 로랑생은 여느 때보다 자주 자신의 아틀리에를 찾았다. 그것은 단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닌 삶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50년 동안 그려 온 자신의 그림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바라보았고, 그 속에서 지나온 시간을 조용히 되짚었다. 사랑했던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정리하는 일 또한, 마지막까지 그녀가 지녔던 사치스러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마리는 편지를 정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가장 중요한 것들, 저기는 조금 덜 중요한 것들, 그리고 바닥에 놓인 것들은 아예 의미 없는 것들.”


1956년 6월 8일...

아지막 공간에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순백의 드레스와 붉은 장미 한 송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안그래도 이번 마이아트뮤지엄 마리 로랑생 전시회 오디오가이드와 함께 작품 감상하면서 상당히 우울 했는데요. 전시회 마지막에서 가슴을 후벼 파네요


마리 로랑생 : 무지개 위의 춤 전시회 예약, 할인, 도슨트, 아트샵 굿즈 정보는 지난 포스팅 참고하세요

마리 로랑생 회고전 : 무지개 위의 춤 할인, 굿즈, 도슨트 정보
마이아트뮤지엄 2026년 봄 전시 '마리 로랑생 회고전: 무지개 위의 춤' 관람후기입니다. 기대한 느낌과는 정 반대의 느낌을 받고 미술관을 나왔지만, 나름 매력있는 전시회 였네요. 오늘은 마리로
www.a4b4.co.kr